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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의 기억

고충환

잔상의 기억 / 기억, 아득한 그리움에 빠지게 만드는, 현실을 온통 흔들어놓는


기억은 잔상을 남긴다. 좋은 기운과 나쁜 기운, 선한 기운과 악한 기운 같은. 기억 자체는 과거지사의 일이지만,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현재 위를 떠돈다.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을 결정하는 것. 그렇게 과거는 현재 위에, 기억은 현실인식 위에 포개진다. 사람들은 좋은 기억을 연장하고 싶고, 나쁜 기억을 잊고 싶다. 그러나 기억은 있는 그대로 재생되지는 않는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대로 나쁜 기억은 나쁜 기억대로 왜곡된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고, 실제보다 더 좋은 기억 속에 안주하고 향유하고 도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쁜 기억은 나쁜 기억대로 잊고 싶다고 잊히지가 않는다. 좋은 기억에 각색이 개입된다면, 나쁜 기억은 강박에 빠진다.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기억은 억압되고 무의식의 지층 밑으로 잠수를 탄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장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억지로 잊힌 것이므로 언제든 되돌아와 현실을 온통 흔들어놓을 수 있다. 프로이드는 그것을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기억을 현재 위로 되불러오는 작가들이 있다. 그렇게 현실로 호출된 기억들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다. 존재론적인 기억도 있고, 시대가 만들어준 기억도 있다. 이데올로기로 아로새겨진 내재화된 기억도 있고, 정보며 이미지의 얼굴을 한 보편적인 폭력의 기억도 있다. 이처럼 기억의 질은 각각이지만, 어느 경우이든 자기 자신에 골몰한다는 점에서 자기반성적인 성향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여하한 경우에도 자기반성적인 성향이 비인간적인 경우는 없다. 인간적이란 말이 오염된 탓에 선뜻 쓰기가 좀 그렇지만, 여하튼 기억을 매개로 인간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방혜자, 그리운 빛. 서울미대를 졸업한 직후인 1961년 도불한 작가는 이후 줄곧 빛을 그렸다. 그래서 빛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왜 빛을 그렸고, 또한 빛은 그에게 무슨 의미일까. 유학이 다반사며 해외여행이 일상사가 된 지금이라면 그렇지도 않겠지만, 오랜 해외 체류는 작가에게 무슨 향수병처럼 존재의 근원에 대해 자문하게 했을 것이다. 자기가 유래한 곳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는 것 곧 일종의 고향의식 내지 원형의식이 스스로를 지탱시켜주었고, 또한 작업의 주제며 소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제며 소재가 빛으로 응축되고 승화되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나타난 청색조의 화면은 고국의 투명하고 파르스름한 새벽의 색감을 닮았고, 그 색감 사이사이로 점멸하듯 깜박거리는 불빛은 호롱불을 닮았다. 아님, 혼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빛을 매개로 빛 자체보다는 일종의 내면의 빛으로 응축된 존재의 그리움을 그리고 있었다. 


서윤희, 기억의 흔적. 작가는 기억을 그리고, 기억이 남긴 흔적이며 잔상을 그린다. 먼저 약초와 같은 온갖 약재를 넘어 달인 끓는 물에 광목천을 담아 삶아 내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그러면 광목천에 크고 작은 구김살이 생기고, 약재 물이 천에 배어들어 흐릿하고 짙은 비정형의 얼룩이 생긴다. 그렇게 기억의 장이며 체가 만들어진다. 기억처럼 모호하고 잔상처럼 흐릿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약재 물은 기억의 질감을 조성하기도 하지만, 흐릿한 기억을 재생한다는, 기억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기억을 통해 치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곧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오는 것이란 점에서,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행위란 점에서 동시에 일종의 시간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억의 질감이 조성되고 나면, 화면의 적당한 부분을 찾아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일상사며 사건들을 그려 넣는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비정형의 얼룩 내지 구김살과 어우러져 마치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건너온 듯 비현실적인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송영욱, 기억의 허물. 사람이 옷을 벗듯 기억도 허물을 벗는다. 사람이 옷을 벗는 것이 사회인으로부터 자기로 되돌려지는 자기반성적인 행위라고 한다면(옷은 사회적 기호다), 기억이 허물을 벗는 것은 기억을 현재로 되불러와 현재화하는 행위며 과정에 비유할 수 있겠다. 작가는 그렇게 기억이 벗어놓은 허물을 만든다. 어린 시절 타고 놀았던 목마며 문짝, 여행 가방이며 이삿짐을 실어 날랐을 트럭과 같은 주로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되불러낸 사물들의 허물을 만든다. 한지로 사물 그대로를 떠내는 것인데, 기억의 허물답게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일루전에도 불구하고 정작 실체가 없다. 없다기보다는 모호하다. 실재와 비실재의 사이며 경계에 위치해있는 오브제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실물 그대로를 떠낸 오브제의 텅 빈 속에 조명을 장착하면 한지의 표면 위로 은근하고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온다. 기억에 생기와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따스했던 기억을 추억한다.   


송영욱, 기억의 더께, 가변설치, mixed media, 2009


박주욱, 사물의 안쪽. 사물은 겉보기가 전부가 아니다. 사물의 됨됨이는 겉보기와 다를 수 있다. 하이데거라면 존재자와 존재자체 혹은 존재다움의 차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물의 안쪽은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물의 안쪽은 어떻게 인식의 안쪽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가. 그래서 작가는 포지티브가 아닌 네거티브를 그렸다. 포지티브는 일상 그대로지만 그리고 인식한 그대로지만 네거티브는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낯설다. 작가는 사물의 표면이 아닌 이면이 궁금했고, 친숙한 것이 내장하고 있는 낯설음을 감지하고 싶었고, 캐니가 처음부터 품고 있었던 언캐니에 직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물의 양가성이며 다의성을 드러내고 싶고 복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네거티브를 그리던 작가가 근작에서 사물의 안쪽으로 이행한 것은 자연스럽다. 사물의 안쪽(어쩌면 내면?)으로, 낯설음으로, 그리고 인식 바깥쪽으로의 여행이 심화되고 강화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김재범, 사건의 재구성. 이미지는 모든 걸 삼킨다. 현대는 정보가 곧 자본이 되고 권력이 되는 정보의 시대며,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이미지의 정치학의 시대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 스펙터클한 삶의 무대 위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진다. 작가는 그 사건들 중 특정 사건을 취해와 재구성한다. 보통 미디어를 통해 접해지는 사건은 결론부분이 있을 뿐 전후가 없다. 없다기보다는 사이드로 밀려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작가는 그렇게 생략된 전후부분을 복원하는데, 미디어들이 흘려보낸 사건관련 정보들을 채집하고, 그 정보들을 근거로 사건을 재연해 사진으로 찍는다. 이렇게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사진들과 아카이브를 보면서 저마다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게 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미디어들 저마다 사실보도를 주장하지만, 그 보도내용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왜곡된다는 점이다. 이미지가 리얼리티를 변질시킨다고나 할까. 작가는 그렇게 리얼리티의 얼굴을 한 이미지를 보편적인 폭력으로 규정하고 그 폭력에 주목한다. 


뮌, 숨 쉬는 동상. 보통 공원이나 광장에는, 특히 사람들이 붐비는 큰 광장일수록 동상 하나쯤 서 있기 마련이다. 숲과 정원이 조성돼 있고, 동상이 보이는 주변머리에는 야외카페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이고, 어제 같은 오늘을 산다. 그렇게 일상을 사느라 여념이 없지만, 누구도 동상에 눈길을 주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일상처럼 숨처럼 당연지사라고 느낄 때 일상도 숨도 의식 밖으로 밀려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여기에 동상도 그렇다. 그런데 만약 동상이 숨을 쉰다면, 이라는 있을 법하지 않지만 흥미로운 상상을 작가는 해본다. 만약 죽은 동상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숨을 쉰다면, 그리고 그렇게 내 일상을 굽어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동상이 살아있다? 동상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상은 보통 그 속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포함한다. 그 기념비적인 성격이 이데올로기로 화신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상이 건립된다. 여기서 동상이 살아있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작가는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상에 탑재된 이데올로기가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렇게 숨 쉬는 동상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이데올로기며 유령들의 우화를 보는 것 같다. 


조습, 웃기는/웃기지도 않는 역사. 그리 멀리 않은 옛날에 명랑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명랑이라는 제목처럼 명랑한 내용으로 채워진 명랑한 잡지였다. 그리고 작가의 명랑교 시리즈를 보았다. 스스로 명랑교 교주 역할을 자처한 작가는 처절한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냈고, 그렇게 웃기지도 않는 세상을 풍자하고 있었다. 작가는 그렇게 기억되었다. 작가는 스스로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출연까지 하는 일인삼역을 도맡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연출사진을 매개로 한국근현대사를 패러디하고 있었고, 역사를 희화화하고 있었다. 그 문법은 과장과 오버액션이었다. 실제보다 더 처절하고, 실제보다 더 억울하고, 실제보다 더 피 칠갑을 했다. 그 터무니없음이 웃음을 자아냈고, 해묵은 상처를 들쑤셨고, 망각 속으로부터 역사를 끄집어냈다. 작가의 사진은 풍자일까 아님 해학일까 아님 블랙코미디일까 아님 날선 비판일까. 아님 알레고리?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귀신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렇게 산 사람의 명줄을 쥐고 있다? 읽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게 삶은 비극이라고 했다. 특히 역사적 현실을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들은 이런 희극과 비극 사이, 터무니없는 웃음과 터무니없는 비통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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