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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에서 미디어아트의 현재

고충환

한국현대미술에서 미디어아트의 현재



미디어아트의 용법


미디어아트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매체미술이 된다. 원래 매체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에서 널리 사용된 개념이다. 당시 민중미술에서 매체미술은 신문과 잡지와 같은 각종 대중매체에 대한 창작주체의 반응을 의미했고, 형식적으론 신문과 잡지에서 차용해온 시사적 이미지를 회화와 결합시키는 식의 소위 포토콜라주의 형태를 의미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대중매체에 반영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와 함께, 이미지는 모든 것을 삼킨다거나 이미지가 삶을 결정한다는 식의 소위 이미지의 정치학을 선취한 경우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미디어아트는 그 의미하는 바가 매체미술과는 일정한 차이를 갖는데, 각종 신종 미디어의 기술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를 수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신문과 잡지 그리고 사진을 아우르는 평면매체, 비디오의 동영상매체, 디지털의 인터미디어매체, 동력미술(키네틱아트), 복사미술(카피아트 혹은 제록스 프린트), 2D와 3D 프린트, 테크놀로지아트, 하이테크미술, 메일아트, 컴퓨터아트, 인터넷아트, 사이버네틱스아트(인공지능미술), 웹아트, 넷아트, 정보예술(인포메이션아트의 줄임말인 인포아트로 통용되는), 홀로그래피, 일렉트로닉아트(전기 혹은 전자예술), LED와 레이저 그리고 광섬유를 아우르는 라이트아트 등 실로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신종 미디어가 계속 출현하는 한 그 범주는 더 넓어질 것이고 덩달아 조형예술을 정의하는 경계도 유연해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디어는 매체를 의미하며, 주로 여러 매체를 혼성한 경우와(혼합매체), 빛과 소리와 그림자와 같은 비물질 매체를 아우른다. 



비디오아트


이런 미디어아트의 중추 매지 핵으로 치자면 단연 비디오아트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비디오아트는 크게 영상에 초점을 맞춘 경우와 영상과 오브제를 결합시킨 경우로 구별된다. 영상에 초점을 맞춘 비디오아트는 서사가 강하고(이를테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오브제와 결합한 비디오아트의 경우에는 설치의 경향이 강한 편이다. 그 주요작가들을 보면 백남준, 박현기, 육근병, 육태진, 김창겸, 정정주, 정영훈, 고경호, 김영진, 오창근, 홍성철, 양만기, 문주, 이용백, 한계륜, 그리고 김수자 같은 작가들이 주목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백남준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시도한 비디오아트의 효시로는 1963년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전자 TV전>이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백남준이 추구한 조형예술의 배경에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이해가 깔려 있는데, 원래 음악미학을 전공한 것이나, 이후 탈장르를 지향하는 그룹 플럭서스의 핵심멤버로서의 역할을 한 것(특히 피아노 설치와 연주), 그리고 특히 존 케이지와 함께한 소위 소리예술을 통해 조형예술에 입문하고 나아가 비디오아트를 창시하기까지에 이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런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이해는 나아가 왜 에로틱한 음악은 안 되는가, 라는 다분히 도발적인 문제의식으로 샬롯 무어맨과의 첼로 협연을 낳았고, 이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공공연한 무당으로 표명한 요셉 보이스와 함께 무속과 비디오아트의 결합을 시도하는 등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매개로 한 현대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장르 간 경계를 허무는 일에 선각자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경우라면,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실질적인 선구자로서 평가된다. 그의 첫 비디오아트는 1977년 대구의 K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15분짜리 기록비디오 작품으로서, 국내 최초의 비디오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수면에 비친 조명기구의 그림자를 기록한 비디오 작품으로서, 화면은 수면의 파동에 따라 형태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외에 그의 주요 작품을 보면 실제의 돌과, 그 돌을 기록한 모니터를 한 무더기로 쌓은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을 선보인 바 있으며, 또한 낙동강 변에서 기록한 비디오 작업에서는 물속에 거울을 수직으로 세워 그 표면에 비친 물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물과 거울의 상호 반영성을 통해 실제와 이미지와의 경계가 사실은 모호한 것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박현기 비디오 작품의 수작이랄 수 있는 만다라 연작(불상과 포르노그래피를 결합한)에서 작가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통해 종교적인 구원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확인해 볼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을 연상시키는 봉분 형태의 구조물 속에다, 사람의 깜박거리는 눈 영상의 모니터를 내장한 육근병의 작업은 한눈에도 기념비적인 인상을 준다. 여기서 눈은 인간의 실존을 함축하고 있는 삶과 정신을 상징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시각적인 기호로 환원한 것이다. 그리고 봉분은 죽음과 자연 그리고 터(마당 혹은 장)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로써 그의 작업은 삶과 죽음, 정신과 자연이 교차하는 생명의 장을 함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을 봉합시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종의 주술적인 치유과정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그의 작업은 눈이 갖는 이러한 상징적 문법으로부터 점차 인류의 역사와 생존의 문제에 대해 논평하는 식의 상대적으로 더 복합적이고 서사적인 문법으로 옮아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대개 터널 속을 걷거나, 길을 건너는 보행자로 나타난 육태진의 비디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착민과 비교되는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대변해준다. 여기서 터널과 길은 삶의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며, 또한 터널과 길을 건너는 행위는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이로써 작가는 통과의례와 관련된 신화적 의미 즉 정화의식과 거듭남의 상징적 지평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인물들이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예컨대 목표 같은)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처럼 엉거주춤한 인상에서 동시대의 인간 실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느껴진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말하자면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라는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김창겸은 실물을 주물로 떠낸 석고 모형과, 실물 그대로를 영상으로 담은 화면을 오버랩 시킨다. 그리고 작업에 서사를 도입한다. 이를테면 공간에다가 석고로 만든 돌확을 설치하고, 여기에다 수면에 비친 하늘과 수면을 들여다보는 사람 형상의 영상을 투사한다. 그리고 일정한 시차를 두고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자연음을 증폭시킨 소리를 중첩시킨다. 여기에다 말해봐, 기억해? 가버려, 떠나지 마, 그러나, 보고 싶었어, 정말이야? 등등의 사적인 말들을 부가한다. 이 말들 자체는 구체적인 것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수면에 돌을 던질 때 나는 증폭음 속에 해체되어 흩어진다. 이렇게 작가는 불완전한 의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이 단절된 인간의 실존을 다룬다. 그리고 이때 영상으로 나타난 수면은 일종의 자기 반성적인 매개체로서의 거울을 상징한다. 그 수면에서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파문은 생생한가 하면 흐릿하다. 결코 온전한 형태로 복원해낼 수는 없는 불완전한 기억과 그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의 폭력이 느껴진다. 그의 작업은 사적이면서 시적이다. 

그런가하면 정정주는 장소 특정적인 작업의 사례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전시 전에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질 미술관의 공간 구조 그대로를 본뜬 합판이나 투명 아크릴 판 소재의 미니어처를 만든다. 그리고 미니어처 안쪽 천장에다가 회전하거나 움직이는 소형 카메라를 설치하고, 그 카메라가 포착한 영상을 미니어처 외부에 따로 설치된 스크린에 투사한다. 이때 관객은 사실은 정교하게 재현된 미니어처의 내부 공간 장면을 마치 실재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관객이 미니어처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그 속을 들여다볼 때 이를 카메라가 미니어처의 내부 장면과 함께 포착해 보여줌으로써 처음의 실재감은 의구심으로 변한다. 공간구조와 특히 실재 크기에 대한 선입견을 흔들어 놓는 이 작업은 사물에 대한 인식행위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지시킨다. 작가는 근작에서 이 일련의 작업들을 매개로 cctv와 감시정국을 비판하는 것으로 발전시킨다. 


여기에 정영훈은 디지털 프로세스를 매개로 한 일련의 영상작업에서 옷과 신체와 몸짓에 투사된 성적 기호며 사회적 기호를 다룬다. 그런가하면 고경호와 김영진의 작업은 흔히 영상작업이 갖는 매체적인 특수성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선입견을 비켜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영상작업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들은 영상작업 고유의 하이 테크놀로지의 성과보다는, 최소한의 기계적인 조작과 오브제가 결합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과 함께 로우 테크놀로지의 흔적을 보여준다. 마치 정지화면을 연상시킬 만큼 느리게 흐르는 화면에서 영상매체가 하나의 테크놀로지로서보다는 어떤 시적인 아우라를 생산하기 위한 또 다른 매체로서 여겨질 따름이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외부와 내면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반영성에서 영상매체의 특성을 찾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영상매체(예컨대 카메라 렌즈, 슬라이드 필름, 모니터, 스크린 등의) 역시 반영성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물(수면) 또는 거울과 동격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영상매체가 자기 반성적인 매개체의 한 형태로서 전유된 셈이다. 


이런 자기 반성적인 성질은 오창근과 홍성철의 영상작업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얻는다. 디지털 프로세스를 매개로 한 영상작업을 마치 거울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모니터를 일종의 디지털 거울처럼 사용해 관객을 자연스레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 유도한다.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관객들에게 결코 자신의 완전한 모습을 되돌려주지는 않는다. 대신 관객들은 그 디지털 거울(모니터)로부터 마치 모자이크 퍼즐처럼 해체되고 재조립된, 분절되고 파편화된 이질적이고 낯설고 생경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혹은 과거 속으로 편입된 자기를 찰나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로써 작가는 완전한 총체로서의 자기, 현존하는 실체로서의 자기는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그 이면에는 근대인의 자의식을 견인해온 주체, 자기, 자아, 에고에 대한 회의가 놓여 있다. 



특별한 미디어, 미디어아트들 


비디오아트 외에 주목할 만한 미디어 내지 미디어아트의 경우로는 정하응의 사운드몽타주(소리), 한기창의 뢴트겐 정원(엑스레이필름),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플래카드), 양아치의 전자정부, 이형구의 가상캐릭터 호모 아니마쿠스, 진기종의 가상 스튜디오, 이부록의 워바타(픽토그램), 조범진 팀의 아치와 씨팍(플래시 애니메이션), 장영혜 중공업의 웹아트, 코디 최의 데이터베이스페인팅, 이완의 축구공과 야구공, 그리고 김주연의 식용식물이 흥미롭다. 


이 가운데, 정하응은 자신의 작업을 사운드몽타주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몽타주하는가. 사운드몽타주라는 말이 예시하고 있듯 작가는 소리를 몽타주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음원으로는 여러 종류의 라디오 채널과 작가가 일상 속에서 직접 채집한 소리들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 음에다 일상 속에서 작가가 직접 채록한 음원을 더해 관객이 이를 임의로 혼성할 수 있게 하고, 일종의 즉흥연주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라디오라는 사회적 기계며 제도적 장치를 사적인 차원으로 전유하고, 나아가 관객도 전유하게 해준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채집된 음원을 보면 전철 안에서 걸인이 구걸하면서 들고 다니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하모니카 연주소리, 전철 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파묻히는 취객의 통화소리, 안내방송과 뒤섞이는 술 취한 노숙자의 독백들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소리, 거의 소리의 원형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지점을 겨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일상의 질감(그 자체가 삶의 질감이며 존재의 질감이기도 한) 그대로를 감촉케 한다. 


한기창은 엑스레이 필름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일련의 뢴트겐 정원으로 알려진 작업을 통해 작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종의 치유미술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이 예사롭지 않은 소재는 당연히 어떤 연고가 있을 것이고, 그 연고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연유한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작가는 자연스레 엑스레이 필름을 접하게 되고, 이로부터 소재적인 가능성을 생각해낸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 전력을 염두에 두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 한국화와의 일정한 닮은꼴이 유추된다. 한지처럼 엑스레이 필름도 투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더욱이 필름에 찍힌 피사체는 무슨 먹그림 같다. 작가는 이 필름을 이용해 일종의 꽃밭으로, 정원으로 재구성해낸다. 뢴트겐 정원으로 이름 붙인 이 작업의 핵심논리가 바로 아이러니며 역설이다. 멀리서 보면 이면에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빛과 더불어 꽤나 장식적인 꽃밭이며 정원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꽃밭이며 정원을 이루고 있는 매체는 엑스레이 필름 곧 일종의 뼈 그림이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이 충돌하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 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화면에 중첩된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혼성풍경으로 볼 수가 있겠다.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실크로드를 따라 진행된다. 그 대략을 보면, 국내에서 온갖 형태의 쓰다버린 플래카드를 수거하고 세탁하고 포장하여 경유지에 해당하는 각 국가별 촌락에 들러 이를 현지인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연후에 재차 현지를 방문해 현지인들이 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퍼포먼스의 근간이다. 이때 플래카드는 내국인에게 일종의 의미(이를테면 일종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호)로서 다가오지만, 외국인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로서보다는 그저 알록달록하고 현란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식적인 천으로 받아들여질 따름이다. 해서, 이를 소재로 하여 집을 꾸미기도 하고, 몸을 치장하기도 하고, 모자나 가방 그리고 베개 커버와 같은 각종 생활소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플래카드 본래의 의미기능이 변질되고 변환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로써 미술이 의미론(차이 나는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퍼트리는)과 소비학(의미기호가 장식적인 이미지로 전유되고 변용되고 소비되는) 그리고 상호교류사(간섭과 매개와 수정의 과정을 동반한 상호영향사와 문화적 혼성)와 같은 여타의 사회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지층과 만나질 수 있는 접점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여행의 스킬과 도쿠멘타가 미술(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여기서 여행의 기술은 곧 삶의 기술이며 존재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공감을 자아낸다. 


현대인은 고도로 제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카프카는 <성>에서 제도적인 사회, 관료적인 사회, 기계적인 사회의 비인간화를 실감 있게 그린 바 있다. 이처럼 제도적인, 관료적인, 기계적인 사회는 유감스럽게도 모든 근대국가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의 모습이다. 그 속에 인간성이 개입하고 간여할 여지는 없다. 인간성은 기껏해야 사회의 체계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는 불순물이며 적에 지나지 않는다. 온, 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드는 작가 양아치는 인간의 육체를 직접 통제하는 경찰국가(감옥과 정신병원을 통해 지배하는 체계), 인간의 의식을 파고드는 계몽국가(학교와 교육을 통해 지배하는 체계)에 이어, 네트워크로 나타난 가상체계(심지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를 통해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자정부의 실체를 예시해준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실제서사와 허구적 서사(이를테면 가상도시나 상황을 가정해보는)를 긴밀하게 직조해내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비롯한 유사 실험도구를 이용하여 얼굴의 특정 부위를 왜곡시켜 보여주는 이형구의 작업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인상이 감지된다. 그 이면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 그리고 마치 사이보그와도 같은 도구화된 인간, 기계화된 인간이 느껴진다. 이런 도구화 내지는 기계화된 인간은 근작에서 터무니없는 도구를 매개로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이 오히려 불편을 겪는 역설로 확대 재생산된다. 특히 호모 아니마쿠스는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일종의 전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서(2007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 대표작가로서 출품한), 외관상으론 자연사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공룡 뼈 화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것은 작가 자신이 유년시절에 즐겨 보았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차용하고 변용한 것이다. 가상세계 속 캐릭터에게 현실의 살과 뼈를, 실체를 부여해주는 것에서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로써 일종의 유사고고학(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가상 캐릭터?)을 실현한 것이며, 적어도 동시대 작가에 관한한 가상현실도 감각적 현실과 똑같이 현실감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타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개인과 가장 가깝게 만나지는 장이 매스미디어다. 미디어와 개인과의 관계는 쌍방통행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일방통행이다. 이처럼 미디어가 일방으로 전송해오는 정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디어는 개인의 감각을 자극하고,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들고, 판단과 가치관의 근거로까지 작동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그 정보를 근거로 울고 웃는다. 그 정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보가 알고 보니 조작된 것이고, 그 정보가 알려준 실제가 사실은 연출된 것이라면? 작가 진기종은 바로 이 지점을 다룬다. 일종의 가상 방송제작센터를 재구성해놓은 설치작업은 크게 제작 스튜디오와 방송이 방영되는 최종 단계로 나뉜다. 모니터를 통해 본 장면이 스튜디오에서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실제는 가상임이 드러나고, 현실은 가공된 것임이 드러난다. 이제는 상식이 된 이미지의 정치학을 건드리고 있으며, 조작된, 연출된, 만들어진 리얼리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트루먼 쇼에 출연한 트루먼 버뱅크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가상현실이 미처 도래하기도 전에, 이미 진즉에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종의 문자그림인 픽토그램을 소재로 한 이부록의 작업에서는 아바타를 변형시킨 워바타를 만날 수 있다. 워바타는 전쟁과, 가상현실 속의 캐릭터인 아바타의 합성어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일종의 전쟁 캐릭터인 워바타는 동시대가 또 다른 형태의 전시(戰時)체제 하에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출된 것이다. 그러니까 은폐되거나 공공연한 개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 억압과 폭력의 계기들을 일종의 전쟁 상황으로 극화한 것이다. 나아가 전쟁은 스펙터클 소사이어티를 위한 매뉴얼, 정치와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일상과 심지어는 오락마저 지배하는 매뉴얼이 되었다. 워바타는 이처럼 일상 속에 유포된 잠정적인 전쟁의 계기들을 채집하고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전시체제의 풍경으로 변질된 일상을 고발한다. 


조범진 팀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은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희화화해 보여준다. 이를 위해 현실의 과장과 극화를 넘어 일종의 가상현실을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인간의 똥만이 유일한 에너지원인 똥 도시라는 가상의 도시가 등장한다. 배변 능력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기준이 결정되는, 그리고 모든 시민은 성실한 배변의 의무를 갖는 똥 도시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항문에 칩이 내장돼 있어서 똥을 쌀 때마다 그 횟수와 성분이 일일이 당국에 의해 체크된다. 똥 도시의 주민들은 똥을 쌀 때마다 중독성이 강한 하드 하나씩을 부상으로 수여받고, 갱단이 출몰해 호시탐탐 하드를 강탈하려고 노린다. 조잡한 잔머리를 잘 굴리는 아치, 행동이 늘 앞서 일단 때리고 보는 씨팍,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는 똥 도시의 트러블 메이커 이쁜이, 그리고 똥 감시국 특수 경찰 게코가 등장해서 서로 쫓고 쫓기는 공방전을 펼쳐 보인다. 잔혹과 코믹, 불경스러움과 냉소적 유머, 통렬한 풍자와 욕설이 난무하는 거의 배설이라고 해야 할 이 작품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설정이 세기말적 비전의 코믹 버전을 보는 것 같다. 


장영혜중공업은 오프라인 상의 전시와 함께 온라인상의 전시를 리드하는 경우로서 웹 아트를 실천한다. 이를테면 삼성 프로젝트로 대변되는 문자 메시지와 영상, 음악 등의 다중매체를 이용한 그의 웹 작업은 휘트니 비엔날레 2000 웹 아트 부문에서의 수상과 함께, 제 1회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더불어 뉴미디어와 관련해서는 코디 초의 소위 데이터베이스페인팅이 주목된다. 작업에서 작가는 동물의 이미지(물론 동물 이외의 어떤 이미지도 가능하다)를 컴퓨터 자료로부터 차용해 이를 다른 동물의 이미지와 중첩시키거나 변형시킨 다음, 이렇듯 변형시킨 이미지를 뷰텍(vutek) 프린트 기술을 이용하여 메쉬(mesh)라는 얇은 플라스틱 소재의 화포에 출력한다. 이로써 작가는 데이터베이스를 통한 정보의 조합을 새로운 창조의 근원으로 이해하는 한편, 이로써 데이터베이스 페인팅(Database Painting)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는 웹아트나 넷아트가 원칙적으로는 사이버 공간 즉 컴퓨터 화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과 비교된다. 


그리고 이완은 흔한 축구공과 야구공을 보여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축구공은 고양이 사체를 갈아 만든 것이며, 야구공 또한 생닭을 갈아 만든 것이란다. 죽음(혹은 주검)이 매개가 돼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공들은 푼돈을 받고 하루 종일 가죽 공을 꿰매는 일에 동원된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낭만적인 풍경의 설원 또한 케이크로 만들어진 것이며, 풍경이 케이크와 함께 썩어가고 있다. 썩음과 부패가 불러일으키는 죽음에의 환기가 낭만적인 풍경과 충돌하면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낭만적인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썩음과 부패를 내장하고 있고, 이로써 죽음과 파멸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아름다움을 결합시킨 것은 낭만주의의 위대한 유산이다.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선미합일사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죽음의 순간이 아름답다. 숭고의 미학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이 감정은 극적이고 장엄하다. 그런데, 여기에 자본주의의 욕망이 덧붙여진다면?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각종 명품 브랜드가 디스플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부패한 죽은 참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명품은 죽음마저도 넘어선다는(넘어서게 해준다는) 뜻일까. 불현듯, 감미로운 선율이 자본주의의 욕망에 바쳐진 레퀴엠처럼 들린다. 



그리고 미디어아트를 표방한 미디어시티서울이 있다. 2000년 처음 창설된 미디어시티서울은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그 대상을 미디어아트로 특성화한 것이란 점에서 다른 비엔날레들과 구별된다. 그동안 미디어시티서울은 테크놀로지의 감각적 표면을 더듬는 것에서 점차 정치적 현실을 담는 것으로 변화해오고 있다. 여기서 굳이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디어만큼 현실을 담아내기에 적절한 용기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말하자면 미디어는 현실을 담는 용기에서 현실 자체로, 삶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도구로부터 삶 자체로 진화해오고 있다. 그렇게 진화하면서 도쿠멘타와 아카이브, 정치적 비디오와 이미지의 정치학, 그리고 스펙터클 소사이어티와 같은 담론들, 나아가 재현과 서사와 소통 같은 전형적인 문제의식들을 생산하고 가공하고 소비하고 유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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