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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 아트스페이스3

편집부


아트스페이스3에서 전시중인 《좋은 이웃》(5.25-6.10)을 보고왔다.

《좋은 이웃》은 하나의 주제로 기획된 전시가 아닌, 김지현, 문유소, 신이채, 이종환, 이한나, 임다울, 조완준 각 작가의 역량을 선보이고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일곱 명의 작가는, 다양한 매체와 주제를 다루며 자신들만의 개성있는 작업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다.



이한나 작가
이한나 작가는 초라한 생명이 소멸하여 가는 순간을 주목한다. 소멸을 향해가는 생명들이기에 다소 처절한 순간이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사라지기 직전의 초월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순간으로 비춰진다. 작가는 그 빛남을 그리고자 거미, 꽃, 애호박, 밤껍질에 아름다운 색을 입고 단단한 몸을 만들어 준다. 이제 그들은 작가의 몸을 빌려, 그리고 ‘예술'이라는 매혹을 입고, 전시장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낸다.









조완준 작가
전시장에 놓인 그림-드로잉들은 ‘아니, 그게 아니고' 드로잉이다. 처음에 그린 것을 지워낸 듯 뿌옇게 덮인 배경 위에 추상도, 구상도 아닌 상태로, 딱히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암호처럼 그려져, 보는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면... 뭔데?’ 하지만 작품 안에서 작가의 온전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다. 아리송하게 뒤돌아섰을 때, 그저 ‘그러네..’라고 생각하며 싱거운 웃음이 날 것이고, 한 걸음을 더 옮겼을 때는 자조와 애잔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아마도 슬쩍, 어떤 진실에 도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무의식에서 그림으로, 그림에서 언어로, 오역과 잘못된 은유가 만들어 내는 ‘삑사리'난 소통이 계속 헛다리를 짚는 것 같았겠지만 뒤돌아서던 순간, 당신도 킥킥 웃었을 테니 말이다.









이종환 작가
작가는 그저 어릴 적 호기심에 라디오를 분해해 보듯, 회화라는 것을 하나씩 분해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디오를 전부 해체하여 부품만을 나열한다면, 회화를 모두 분해하여 진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것이 ‘회화’가 아니라면, 다시 조립하는 과정의 어느 순간에 ‘회화'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조건들을 변주하고 제거하거나 봉합하는 이 과정은 결국 무엇이 ‘존재’를 ‘존재'이도록 하는지에 대한 탐구다.









김지현 작가
내가 그의 사진에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수평으로 길게 이어지는 구도, 표정을 알 수 없는 인물들, 공기와 빛, 필름 사진 특유의 온화한 색채, 그리고 사진 밖 어딘가에 있을 물건의 주인들과 작가의 시선이 나에게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애정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세잔은 색들의 조합으로 슬픔을 띤 입술이나 미소 띤 뺨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나는 경복궁의 지붕들이 만들어 내는 길게 뻗은 지평선을 바라볼 때 가슴이 저릿해진다. 특정한 색의 조합이나 특정 구도가 그러한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로지 그것에 의한 것만은 아니리라. 작가의 사진 속 피사체, 구도와 색감이 이 몰입을 만들어 내는 이유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그렇다면 무엇이 더 있는 걸까? ... 나는 알 수 없는 그것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의 사진이 내게 주는 정적과 혼돈에 다시 머물러 본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이 그저 ‘사진’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문유소 작가
운동성만을 지닌 간략한 드로잉으로 시작된 그의 그림은 물감이 캔버스 전체를 몇 번이나 뒤덮은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여러 번의 덧칠을 거쳐 완성된 그림은 칠해진 것인지, 그려진 것인지, 그저 물감의 덩어리로 묻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 타지의 언어들로 가득 찬 듯한 - 미지의 화면을 만든다. 작가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그림이 자신을 불러내는 순간이 어느 지점에선가 찾아온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그 순간부터 자신은 너무 일방적이지 않도록, 그림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며 작품을 진행해 나간다고. 그 말을 떠올리니, 그림 위에 펼쳐진 저 미지의 것들은 그림이 자신의 어법으로 스스로를 조직한 결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캔버스 위에 두껍게 쌓인 물감의 질감과 물성, 색과 형태는 그림이 스스로를 채워나간 흔적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소개하는 일은 오래전에 봉인된 어떤 것을 해방시키는 것과 같은 긴장감과 쾌감이 공존한다. 그가 무엇을 불러내었는지, 앞으로 어떤 것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혼합, 그 복합적인 마음이 그림과 은밀하게 만날 때, 그림은 정말 살아 있는 것만 같다.









신이채 작가
작가는 주로 아크릴판에 그림을 그린 후 종이에 그것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이 방식은 모노타이프, 즉 평판화라 불리는 방식인데, 다른 판화 제작과 달리 오직 한 장만 제작이 가능하며, 압착 이후 원본의 그림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당신이 전시장에서 보게 될, 종이 위의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선과 흐르다가 스며들어 번진 물감, 빠르게 지나가 사라져 버린 붓의 흔적은 작가의 ‘그리기’의 순간에서 이미 한 발짝 멀어진 것이다. 작가가 그린 순간을 온전히 담은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그림은 이미 사라졌으며, 당신은 결코 그것을 볼 수 없다. 신이채 작품의 이러한 특징들은 일반적인 회화의 개념을 비껴가기에 흥미로운 지점들을 떠오르게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들은 원작이 아니지만, 그것을 찍어냄으로써 원작을 훼손하였기에 – 원작이 사라졌기에 – 복제본이라 할 수도 없다.








임다울 작가
이미지와 몸에 대해서 작가와 한창 이야기하던 중 문득 그가 시대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로맨틱한 방법으로. 전시장에 놓인 것은 빙의된 이미지를 걸쳐 입은 몸, 이미지와 본질을 합체한 것과 같은 그림, 슈타이얼의 이미지 7인 동시에 더 강렬한 스크린이라는 견고한 몸을 획득하고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우뚝 선 뼈와 살이다. 앞면의 이미지와 뒷면의 이미지는 둘 사이 위치의 격차 때문에 나의 움직임을 따라 그 실루엣들이 움직이며 망막에 닿는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그림은 이미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작가는 전시 동안 이 모든 이미지를 한 번 갈아입힘으로써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 낸다.
8 이미지들의 겹침과 움직임, 이어짐과 비껴감이 나의 시각과 생각 안에서 작동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 몸과 의식이 이미지 뒤로 사라지고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다분히 분열적이다.








이한나, <Spinners 2>, 2023, plaster bandage, wire, thread, beads, hand-sewn cushion, dimensions variable


한작품씩 따로 보았을때는 다소 어렵고 실험적인 느낌이 컸다.
그치만 전시장 전체의 느낌은 좋은 이웃이 모여 있는것처럼 조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사진,글 - 예슬
(전시설명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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