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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언 / 한규언의 신화 세계

김영호

화가 한규언의 인생편력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는 그가 강화도 태생이자 독학으로 화업의 노정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방문하게 된 동기는 한라산 중턱에 지어진 감귤 저장고를 화사(畵舍)로 정해 두문불출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눈여겨 본 어느 지인의 자신감 넘치는 추천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중산간 도로를 달려 한 시간 남짓 작업실로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신화의 섬에 정착한 사연을 물어보니 그저 팔자가 그렇기 때문이라 일축한다. 내심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이유가 마니산(摩尼山)의 신화에 대한 관심에서 한라산에 머무는 신들을 찾아 온 필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한가닥 연기처럼 차창 밖으로 사라진다.
한 작가가 반드시 자신의 예술적 원천을 추적하거나 밝혀야 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규언이 최근에 완성한 대형 작업들과 이미 오래전인 1980년대 초에 그린 일련의 드로잉들이 신화적 요소들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번 개인전을 위해 그가 선택한 제목이 <겨레의 혼 - 잉태>라는 점을 보더라도 작가의 관심이 전래적 신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00호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무수한 알들과 그 속에 담긴 태아들은 산정 호수와 더불어 생명과 그 터인 자궁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나타내는 증좌들이다.




한규언이 자신의 신화세계를 위해 초대한 소재들은 알 이외에도 잉어, 두꺼비, 벌, 공작, 황소 등의 조충어수(鳥蟲魚獸)를 비롯해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의 십장생에 이르는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이들 소재는 서로가 종(種)의 경계를 넘어 상호 합체가 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가령 화면에 자리한 황소나 인간은 어느덧 가지를 뻗은 고목의 형태로 이어지고 그 가지의 끝에 달린 거대한 열매의 내부에는 태아들이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이 그것이다. 이러한 조형방식은 작가의 드로잉 작업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화면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은 공간의 원근과 형태의 대소에 억매임 없이 자유롭게 묘사되어 몽환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한규언의 작업은 인간과 짐승과 식물이 경계를 허물고 상호 교류하는 설화세계 혹은 윤회사상의 단편들을 함께 드러낸다. 주목되는 점은 작가 자신의 인생노정이 그림 속 등장인물에 빗대어 표상됨으로서 ‘신화적 사고(思考)’의 세계를 가시화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신화적 사고란 ‘주관과 객관에 대한 구별 없이 주어진 대상 그 자체에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 세계를 즉자적(卽自的)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일컫는다. 이러한 사고의 방식은 인식주체와 그 대상을 구분하여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논리적 사고’와 함께 진리 인식의 한 방법론으로 다루어져 왔다. 이러한 관점은 한규언의 그림이 신변잡기가 아닌 진리 인식의 한 방식으로서 가치를 확보케 하는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신화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현실의 금기 사이의 타협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삶의 완충지대다. 이러한 신화는 문학 작품처럼 규범과 관습과 제도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정화해 왔다. 이규언의 그림은 전래적 신화의 내용을 차용하고 있지 않다. 그는 비가시적인 세계로서 신화적 내용들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표상해 냄으로서 신화 담론과는 차별화된 조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좋은 주제의 선택이 그대로 좋은 예술로 이어지지는 않듯이 그에게 던져진 과제는 신화적 주제를 조형적 언어로 번안해 내는 표현 능력에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규언의 그림을 둘러싼 형식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규언의 신화 세계는 대형화면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무신도나 십장생도 그리고 민화에서 발견되는 강한 색채의 대비효과는 그림의 분위기를 전통회화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다. 또한 작가가 사용하는 기법은 수묵화의 선묘에서 공예의 금박세공 그리고 조충도의 세밀 묘법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이는 작가가 그 어느 계보의 화법에도 억매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감각이 이끄는 데로 밀어 부쳐온 결과일 것이다. 그의 화면은 세련되지 않지만 개성적인 기운으로 충만하다.
한수 덧붙이자면 화가 한규언은 가지치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고유한 형식을 강화하는 일이며 주체적 의미생산의 일관성을 세우는 일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이론적 정당성을 의무화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품을 근간으로 한 형식논리를 세우는 일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논리는 역으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확고하게 보정하고 그것에 인생을 투신케 하는 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학 화가로서 한규언이 걸어온 노정은 세상의 진리를 인식하는 한 방식으로서 신화적 사고에 끈이 닿아 있다. 한규언의 예술은 다시 한차례 실험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새로운 출발점에 선 그에게 격려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권하는 이유는 당대가 요구하는 신화의 세계를 찾아 외로운 탐험길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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