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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복제시대의 오리지널 판화 논쟁

김영호

1. 프롤로그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의 개념이 국제기구의 차원에서 논의된 것은 1960년 ‘비엔나 규정(Vienna Definition)’ 이후로 알려져 있으나 미술의 영역에서 오리지널 논쟁은 서구미술의 기원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오래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제시한 모방론은 세계를 원본과 모사의 관계로 설정한 이론이며 이후의 예술창조 활동에 하나의 미학적 표준을 제공했다. 그리스의 모방론이 당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면서 서구미술의 전통적 형식논리를 세우는데 기여했다면, 비엔나에서 합의된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의 개념은 자본주의 시장구조 아래 판화의 상품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모방론은 예술생산의 주체로서 작가와 작품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지만,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은 예술소비자와 유통상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측면이 있다.
비엔나 규정이 마련된 1960년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차되는 시기였다. 화단에서는 다양한 실험적 매체와 형식들이 동시다발로 나타났지만, 모더니즘의 전통을 따라 회화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당시 판화는 새로운 실험적 매체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판화를 고급한 가치를 지닌 회화의 차원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장치가 요구되었다. 비엔나 규정은 이러한 문맥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린버그가 꿈꾸는 ‘한 단계 높은 대중문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판화는 만화, 잡지, 광고, 신문 등의 미디어와 함께 대중적 소비의 대상으로 부상했고 동시에 이들 값싼 대중매체 이미지와 구분해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것이 1960년 비엔나에서 합의되고 1963년에 공표된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였다.
1980년대 이후 디지털미디어가 확산되면서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와 그 유효성에 대한 의문이 점차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탄생한 판화제들은 전통적 판화의 개념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무한복제 상황 앞에서 오리지널 개념에 대한 수정 혹은 재론이 필요하게 되었다. 1980년 <국제소형판화비엔날레>로 시작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이러한 판화개념의 확산 현실에 부응하며 지속되어 왔고 3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보다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만 할 시점에 이르렀다.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무한복제의 시대상황에서 판화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판화의 개념은 수정되어야 하는가. 판화라는 용어는 멀티플 아트 혹은 프린트미디어로 대체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이번 ‘국제판화심포지엄’에 제기된 화두들이다.

2. 설문조사 분석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사무국에서는 2009년 제15회 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한 ‘서울국제판화심포지엄’에 앞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오리지널판화, 아직도 유효한가”라는 제목으로 실시한 이 설문조사는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판화가, 평론가, 큐레이터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며 21세기 영상시대에 디지털미디어의 확산으로 전통판화의 개념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판화의 역할과 한계에 관해 국제적인 관심과 이해를 도모하려는 것이라 취지를 밝혔다. 이 설문조사에서 제시한 ‘오리지널판화’란 1960년 비엔나에서 열린 <국제미술인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Artists)>에서 규정되고 1963년 유네스코지부 <국제조형미술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 des Arts Plastiques)>에서 공표한 ‘오리지널판화의 정의’에 부합되는 판화를 지시한다. 사무국에서 설문조사의 결과를 정리한 통계자료를 보면 100여명의 응답자들은 비엔나 규정이 명시한 오리지널판화의 정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가 63%, ‘들어본 적이 있다’가 25%로 응답해 87%의 높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 규정이 자국에서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가 42%, ‘부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가 55%로 답해 97%의 높은 비율을 보였으며, ‘앞으로도 유효하게 통용되어야 된다’는 입장에도 83%의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통용 46%, 부분적 통용 37%). 이 통계표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판화계에서는 여전히 오리지널판화의 필요성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리지널판화의 필요성에 대한 지지와는 별도로 시대적 변화의 추이에 따라 <국제조형미술협회>가 1963년 제시한 오리지널판화의 정의는 부분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중론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서 디지털이미지와 뉴미디어 이미지가 판화의 범주에 수용되고 있는 추세(제한적 수용 55%, 적극적 수용 24%)이며 이에 따라 전통적인 ‘판’의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33%)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정보산업사회의 총아로 등장한 디지털미디어가 판화의 범주로 수용되면서 판화에서 ‘판’의 개념이 ‘프로그램’을 통괄하는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

<국제조형미술협회>가 공표한 ‘오리지널판화의 정의’는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 비엔나에서 열린 제3회 <국제미술인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Artists)>에서 합의된 내용을 판화가, 공방관계자, 미술거래상 및 관계기관과 협의를 거쳐 공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엔나 규정’으로도 불리우는 이 정의에 따르면 오리지널판화란 “작가의 싸인이 명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체 찍은 매수와 함께 일련번호가 명기”된 판화작품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직접 목판을 깎는다든가 석판위에서 혹은 그 밖의 판위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해당하며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작품은 복제품(reproduction)으로 간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작가의 싸인과 에디션 넘버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오리지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국제화가조각가판화가위원회(United Kingdom National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ainters, Sculptors and Gravers)>가 비엔나 규정에 추가, 보완한 항목에서도 밝히고 있듯 “작품을 판화기법을 이용하여 원본과 매우 가깝게 혹은 그대로 모사해 찍은 것”이나 “사진을 이용하여 혹은 그와 유사한 기계적인 방법을 이용해 복제한 것”도 오리지널 판화로 분류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엔나 규정'에는 “복제품의 경우 오리지널판화와 확연히 구분지어야만 한다”는 항목을 삽입해 작품상에 이러한 사실을 명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에디션이 끝난 판은 원판이 돌이든 혹은 목판이든 에디션이 끝났음을 명확하게 보일 수 있는 표시로 판에 손상을 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적고 있는 점도 특이한 사항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1960년 <국제미술인회의>에서 합의하고 1963년 <국제조형미술협회>가 공표한 비엔나 규정이 명시하고 있는 오리지널 판화란 ‘작가가 직접 판작업을 실행하고 서명과 에디션 넘버를 명기한 판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을 모두 복제품(reproduction)으로 분류한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는 비엔나 규정의 기본내용을 보완하여 ‘오리지널판화에 관한 규정’을 공표했다. 1997년 <한국미술협회>와 공동심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발표한 규정의 특징은 오리지널 판화가 아닌 판화의 범주를 세분화 한 점에 있다. 즉. 비엔나 규정이 오리지널 판화가 아닌 모든 작품을 복제품으로 분류한데 반해 서울 규정은 오리지널이 아닌 판화를 ‘사후판화(Posthumous Edition)’, ‘복제판화(Reproduction Print’, ‘복제품(reproduction)’으로 세분한 것이다. 사후판화란 말 그대로 작가가 사망한 이후에 유족 혹은 관리자의 책임아래 찍어낸 판화다. 복제판화란 “원작품을 작가의 승인하에 본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해 판화의 기법으로 제작하고 찍은 것”이며 복제품이란 “색분해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인쇄기법으로 원작품을 복제한 것” 또는 “원작품을 본인이 아닌 제3자에 의해 판화의 기법으로 제작하고 찍은 것”으로 되어 있다. 복제판화와 복제품의 차이는 원작품을 복제함에 있어 ‘판화’기법과 ‘색분해 등의 방법을 이용한 인쇄’기법의 구분, 또는 원작품을 판화기법으로 찍어내기 위한 작가의 승인 여부에 두고 있다.

4. 복제시대의 오리지널 개념

이번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국내외의 미술계에서는 오리지널 판화의 필요성은 높지만 오리지널 판화의 정의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판화의 범주를 디지털이미지나 사진 등을 포괄하는 차원으로 확대하면서도 판화의 고유성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다소 모순적인 면이 있다. 판화는 복제의 예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장르며 복제된 작품에 오리지널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예술에 오리지널의 개념을 적용시키게 된 이유는 판화를 둘러싼 복제의 개념이 회화예술에 있어서 모방론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리지널 판화의 필요성은 판화예술의 장르적 고유성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범주를 확대함으로서 동시대의 변화하는 환경을 끌어안으려는 태도 역시 나름의 당위성을 지닌다.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복제시대의 현실에서 판화는 존중되어야 하고 그 범주를 확대 시키면서 복제의 형식을 취하는 모든 기법과 형식을 끌어안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협회와 시장의 차원에서 이미 디지털 프린트와 사진이 판화의 영역으로 수용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진 또는 디지털 인쇄기법을 결합한 판화도 창의적 형식논리의 차원에서 오리지널 판화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아직도 판화계의 일각에서는 디지털 프린트 또는 기계적인 복제품은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영국국제소형판화공모전, 렉섬국제판화전 등과 같이 전통기술과 신기술이 결합하여 제작된 판화를 수용한 판화미술제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제시대에 판화예술이 지닌 고유성과 특성을 살리는 일에 대해 연구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판화예술이 디지털 복제시대가 파생하는 실상과 가상, 원본과 복제 등의 담론을 자극할 대표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판화는 ‘판으로 찍어낸 그림’이라는 태생적 한계성을 갖는 장르라는 점을 인정하고 판화의 정통성은 고수하고 보호하되, 사진과 디지털 프린트 등의 기법을 이용한 작품은 확산된 판법의 형식논리 차원에서 수용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5. 에필로그

디지털 복제시대의 판화에 대한 논쟁은 판화의 태생적 한계를 따져 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이 교차되는 지점에 설정된 생각의 축이 이동함에 따라 오리지널 혹은 복제의 개념이 변할 수 있지만 ‘복제성’이라는 판화의 속성은 특정 개체가 지닌 유전자처럼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디지털 복제시대에서 판화의 원본성은 복제성과 다르지 않은 개념이 되었다. 판화란 원래 복제성이라는 특성 위에 구축된 것이나 그 복제성 위에 원본성의 개념을 덮어씌움으로서 두 개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호한 경계선상에서도 복제성과 원본성(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구분해 줄 근거는 명확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의 형식논리로서 복제성과 소비의 메커니즘으로서 오리지널 개념이 판화의 실체를 해석하는 두개의 독립적 잣대로 인정할 때 이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형식논리로 진단한 오리지널리티란 창작의 의도성에 무게를 둔 복제성을 의미하며 이 경우 확산된 디지털 프린트와 사진 등이 판화개념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의 메커니즘으로 진단한 오리지널리티란 상품적 가치에 무게를 둔 복제성으로서 사실 오리지널리티라는 허상으로 축성된 복제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판화에 있어 오리지널의 개념은 창작의 형식논리로서 존중되어야 하며 복제성이라는 유전자를 조작해 판화를 완전히 다른 종으로 변모시키지 않은 한 확대되어 나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논의들의 목표가 판화의 미래를 어둡게 하지 않는데 있다면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환경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확산된 판화개념은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끈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가령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의 역할이 판화의 전통과 접속하면서도 현재 진행되는 복제시대의 논의들을 받아드린다면 제한적으로, 즉 창작의 형식논리라는 측면에서, 복제성의 결과물들인 디지털프린트와 사진 그리고 인쇄기법 등을 판화의 범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때 복제성의 조건으로 제시된 판의 개념은 모니터와 필름 그리고 프로그램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소비의 메커니즘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져온 오리지널 판화의 경우 그 개념적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명문화된 규정을 통해 시장의 질서를 잡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비엔나 선언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오리지널 판화가 작가의 주도하에 제판과 프린팅이 이루어지고 결과물인 판화 작품에 싸인과 에디션 넘버를 명시한 작품에 적용되는 개념’이라는 선언은 존중되어야 한다. 작가는 이러한 규정에 충실해 작품제작에 만전을 기하고 화상과 컬랙터는 이러한 작품에 믿음을 갖고 안정된 소비활동을 벌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제1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국제판화심포지엄 발제문, (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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