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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모 / 추상풍경의 유희

김영호

김익모는 최근 물감을 휘갈긴 그림 한점을 그리고 ‘신몽유도원도(新夢遊桃園圖)’라는 제명을 붙였다. 높이 162cm에다 폭이 392cm에 달하는 대작으로서, 몇 년 전부터 새롭게 시작한 <즐거운 풍경> 연작의 하나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대형 화면 앞에서 작가가 실행했을 적극적 그림 행위가 연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행위 대한 작가의 의도가 재치 있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몽유도원도란 조선 세종 때에 안견이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린 산수화로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경을 거닌 이야기를 받아 옮긴 그림이다. 불행스럽게도 해외에 유출되어 원화를 쉽게 접할 수 없지만 이상세계를 동경하는 지식인들의 심경을 나타낸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익모가 자신의 그림에 몽유도원도를 제명으로 선택한 것은 그저 우연일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남도 일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으로서 벚꽃이나 배꽃 농원에서 얻은 감흥의 소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작가의 표현적 터치나 대중문화의 기호들로서 하트나 풍선 그리고 숫자와 부호 등은 안견의 화론과 연결고리를 찾기 힘들다. 그의 연작들은 주제의 서술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에 있어 캔버스란 그저 그림 행위의 즐거움을 위해 선택된 도구일 뿐이다. 주변에서는 판화가로서 20여년 가까이 체험했던 형식의 굴레와 기법의 한계로부터 과감히 일탈하려는 자유의지에서 온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김익모의 ‘신몽유도원도’야 말로 작가의 작품 연작 <즐거운 풍경>을 둘러싼 작가의 태도와 형식을 그대로 대변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작품은 작가의 조형적 노정에 하나의 미학적 표준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본다. 비단 작가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에서도 작품해석에 따르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줄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즉 태도와 형식 그리고 해석의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태도와 관련해 보면 ‘신몽유도원도’는 이중환상을 즐기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것은 추상과 구체 사이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자 이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작가는 안견의 풍경을 상상으로 끌어들임으로서 자신이 펼쳐놓은 추상적 이미지에 새로운 의미소들을 합성시킨다. 몽유도원도는 물감덩어리와 기호들이 난무하는 김익모의 그림을 비현실과 환상을 체험하는 놀이터로 변주시킨다. 작가는 안견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과거의 표현 형식이나 전통적 화론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그림을 한국 미술사의 문맥으로 단숨에 삽입시키고 있다.

둘째, 작품을 둘러싼 형식논리에 관한 것이다. 김익모의 ‘신몽유도원도’는 세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붉은 평면 바탕과 그 위에 두껍게 얹혀진 거친 물감 그리고 그 위에 배치된 기호적 도상들이 그것이다. 세 요소들의 중첩은 화면에 거대한 공간감을 부여하며 아울러 작품 제작의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성을 나타내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문제는 몽유도원도의 형식논리와 비교되는 고리들을 만들어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보면 여백으로 남겨둔 좌측 상부의 하늘을 바탕으로 정면시각을 이용한 평원과 부감법(俯瞰法)을 이용해 내려다본 고원 등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영역 구분에 의해 화면은 장대한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아울러 수직으로 내려뻗은 암각들은 김익모의 작업에서 스퀴즈로 밀어낸 물감의 수직적 구조와 비교되는 분위기를 보인다. 그 위에 흘러내리는 물감의 드리핑 효과나 혼합된 색채 역시 구름과 나무와 빛을 통한 환상적 이미지를 표현한 안견의 조형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관객의 입장에서 시도하는 해석상의 문제다. 작가가 표상하는 작품의 의미는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특히 화면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문맥을 따르는 김익모의 작품은 대상 주제에 대한 서술적 묘사의 방식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트나 풍선 그리고 숫자나 집 등의 도상적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화면은 서술적 의미가 아닌 기호적 의미들이 생겨나며 일상적 현실을 반영하는 팝아트의 분위기를 발생시키는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몽유도원도의 도입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즐거운 풍경> 연작을 그리는 김익모의 근작들은 작가의 자유의지를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자유란 규범과 분리되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체계 속에 융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통적 판화의 형식과 규범의 지배 속에서 벗어나 김익모가 얻은 자유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의 강렬한 색채대비와 거친 붓터치 그리고 뿌리고 밀어내고 긁어내는 과정에서 돌출되는 재료의 물성과 그 위에 배치된 팝적 기호들로 표상되고 있다. 이제 작가는 그 자유로움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지켜줄 미학적 표준을 갖출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의 ‘신몽유도원도’는 이러한 그의 요구에 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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