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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호 / 진열장 박물관(Showcase Museum)

김영호

박물관은 기억의 저장고다. 동ㆍ식물에서 광물에 이르는 오브제들에 담긴 시간을 박제화 시키는 장소다. 진열장에 놓인 중생대의 파충류처럼 박물관에 안치된 사물들은 잃어버린 과거를 끌어안은 채 침묵한다. 그런데 박물관의 기능은 침묵하는 오브제들의 저장고 역할에서 끝나지 않는다. 박물관은 축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물은 박물관에 들여옴으로서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어떤 오브제가 가치 있는 것은 박물관이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문주호의 작품은 박물관의 개념을 차용하는데서 시작된다. ‘기억의 저장고’로서 그리고 ‘축성의 공간’으로서 박물관을 의미생산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시도하는 전략은 역설적인 면모를 보인다. 지극히 일상적인 오브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박물관 장치를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잘 것 없는 오브제인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축성의 행위를 가함으로서 그것을 기호학적 문맥 안으로 끌어드리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설치방식이란 다름 아닌 진열장이다. 화면을 진열장으로 연출해 그 안에 배열된 플라스틱 컵에 새로운 이름을 불러주자는 것이다. 물론 이 단순해 보이는 작업에는 작가의 치밀한 전략과 실행기술이 요구된다.




문주호가 오브제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기법은 진열, 껍질, 파편, 차용, 복제 따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작품 제작과 해석의 키워드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온다. 선반 형태의 화면에 진열된 일회용 플라스틱 컵들은 그 자체로가 아니라 석고로 떠낸 복제물로 제시되며 부서진 달걀의 껍질처럼 파편화된 형태를 취함으로서 의미의 층을 다원화하고 있다. 이 때 작가가 차용하는 의미화의 메커니즘이 바로 진열장의 박물학이다. 진열장은 가치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저장하여 보호하는 장치다. 문주호의 박물관은 평범한 오브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의 확산을 통해 동시대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발언을 시도하려는데 있다.

문주호가 오브제를 통해 시도하는 발언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는 일처럼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 그 의미는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박물관학의 문맥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주호의 작품은 선반과 그 위에 배열된 플라스틱 컵 사이에 관계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술대 위에서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을 연출해 낸 어느 초현실주의 시인의 싯귀처럼 낯선 상황을 만들어 냄으로서 관객의 의식을 제삼의 차원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선반에 진열된 플라스틱 컵은 기능이 상실된 오브제가 되며 은유와 상징의 차원으로 그 스스로를 변모시킨다.

문주호의 컵은 상실과 파괴의 메타포로 다가온다. 석고로 캐스팅되어 반복 생산된 컵의 형상은 허구의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 가상적 이미지가 실체를 대체하고 복제물이 원본의 가치를 상실시키는 시대적 상황이 작가가 제시하는 오브제들 사이에서 피어난다. 이렇듯 문주호의 오브제를 둘러싼 박물관 장치는 적극적인 비워내기를 통해 다른 코드로 전환된 의미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값싸고 쓸모없는 복제물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저장된 기억과 그것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이를 통해 동시대의 문화적 코드에 대한 진단을 시도하는 것이다. 문주호는 이를 위해 미키마우스나 수퍼맨 따위의 대중적 캐릭터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량생산과 소비의 사회를 나타내는 문화적 코드들은 진열된 오브제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다.

현대미술의 향방은 복합 미디어의 사용과 그에 따른 의미의 중층구조로 대변될 특성을 보인다. 과거에 생겨나고 중단되었던 기법과 내용들이 다시 차용되고, 미술사의 문맥에서 과거와 현재가 혼용되는 현상도 당대미술이 가진 특성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경계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되어 그 몫은 해석자, 즉 관객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안정과 불안정, 실상과 허상, 단일성과 복수성, 진실과 허구 등의 간극이 와해된 현실로 접어들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 이제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박물학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문주호의 진열장 박물관의 작품형식은 이러한 시대성에 반응하며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이 최근 국제 아트페어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혼성적이고 다의적인 박물학의 의미 구조가 국경을 넘어 보편화 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으로 세계의 문제는 나의 문제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환경의 우리와 나의 의식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다. 문주호의 진열장 박물관 작업은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성을 표상하고 있으며 그의 향후가 주목되는 것이다.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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