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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 / 고암의 콜라주와 문자추상

김영호

여백과 소통의 미학

프롤로그

1962년 5월 18일. 파리 7구의 릴가 17번지(17 rue de Lille, Paris 7)에 자리 잡은 폴 파케티 화랑(Galerie Paul Facchetti)에서 고암의 개인전이 열렸다. 폴 파케티는 이태리에서 출생해 프랑스로 이주해온 사진작가였으며, 1951년 화랑의 문을 연 이래 당대에 실험되던 다양한 경향의 추상미술을 지지해 왔고 잭슨 폴록을 프랑스에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전위적 화랑의 틀을 갖춘 인물이었다.1) 그는 평론가 미셸 타피에(Michel Tapié)를 화랑의 아트디렉터로 영입하고 1952년 앵포르멜 운동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역사적인 전시회를 개최케 함으로서 화랑의 위상을 세웠다.2) 한편, 화랑이 자리 잡은 세느강 남측의 라탱 지역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각국에서 몰려든 지식인과 문인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카페들이 즐비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비추어 고암이 파리에서 가진 첫 개인전은 향후 그의 예술적 노정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62년 6월 20일까지 한달 넘게 지속된 고암의 전시회에는 1960년 이후에 제작된 근작 17점이 소개되었다. 당시 제작된 도록을 보면 출품작들의 제목은 모두 ‘구성(Composition)’으로, 기법은 모두 콜라주(Collage)로 명기되어 있다. 특이한 사항은 출품작 중에는 파리의 컬렉션이 수집한 2점을 포함해 뉴욕, 브뤼셀, 취리히 그리고 베를린 지역의 컬렉션에 소장된 작품들이 각각 한 점씩 전시되었다는 것이다.3) 이는 대형사진판으로 특별히 제작된 전시도록과 더불어 고암의 파리 데뷔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전시회의 서문을 쓴 평론가는 자크 라세뉴(Jacque Lassaigne)였는데 그는 당시 국제평론가협회(AICA) 프랑스 지회장이었고, 고암을 파리에 초청하고 폴 파케티에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자크 라세뉴는 후에 파리시립근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 폴 파케티는 1912년 이태리에서 출생해 가족과 더불어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후에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1951년 자신의 스튜디오를 갤러리로 바꾸어 프랑스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작가들을 지지했다. 1970년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1980년대에는 뉴욕에 각각 갤러리를 추가로 열면서 활동영역을 확대했다.

2) 미셀 타피에(1909-1987)는 1952년 폴 파케티 화랑에서 ‘앵포르멜의 의미(Signifiants de linformel)’전을 기획하면서 앵포르멜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1년 파리의 니나 도세 화랑(Galerie Nina Dausset)에서 ‘비구상회화의 극단적 경향들(Tendances extrêmes de la peinture non figurative)’를 열면서 앵포르멜 운동의 서곡을 알렸다. ‘대립된 격정(Vehemences confrontées)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프랑스(조르주 마튜, 카미유 브리앙), 독일(볼스, 한스 아르퉁), 캐나다(장폴 리오펠), 미국(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등 다국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3) 고암은 1957년부터 1962년 사이에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에서 활발한 전시활동을 전개했다. 뉴욕, 피츠버그(카네기)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참가했으며 워싱턴, 프랑크푸르트, 쾰른, 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타인 소장 작품이 전시된 것은 이 시기에 작품 매매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폴 파케티 화랑에서의 개인전은 환갑을 앞둔 고암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파리 진출 후 현지에서 가진 첫 개인전이라는 점 외에도 고암의 향후 예술노정에 중요한 좌표가 될 콜라주 작품을 현지 대중에게 선보인 전시였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이 개인전4) 은 한국인으로서 파리의 유수화랑과 전속계약 맺은 상황에서 개최한 전시였다는 점도 특이사항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5) 무엇보다도 이 개인전의 백미는 동서의 문화적 거리를 해소하고 예술적 융합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한 전시였다는데 있다. 그 가능성은 동양의 서체가 지닌 형상적 언어구조와 앵포르멜이 지향하는 추상적 형식논리와 결합된 실험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었다.

1960년을 전후한 당시 파리에는 학구열에 불타는 동양의 청년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었다. 또한 앵포르멜 미술의 전성기 이후 쇠락해 가는 파리 화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요인이 필요한 정황이었다.6) 이미 국내 화단과 대학에서 동양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고암의 경우는 파리 화단에 동서의 문화교류를 실천할 인자를 지닌 인물로 소개되었다. 자크 라세뉴는 서문을 통해 ‘고암은 자신이 습득한 모든 지식을 부인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는 성숙되고 노련하며 완성된 화가로서 파리에 체류하는 몇 년 동안 이전의 양식이나 이곳의 양식과도 닮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음’을 알렸다. 그에 따르면 고암이 내놓은 콜라주들은 ‘동양화의 전통적 제 경향들을 섭렵한 거장(maître)’이 체득한 오랜 경험의 산물이며 ‘극동의 정묘함(raffinements)과 서양의 새로운 비전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현지 비평가들의 고암의 작업에 대한 관심은 콜라주에 의해 표현된 동양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평론가 미쉘 라공(Michel Ragon)이 “그의 콜라주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극동의 비젼을 보여준다”라고 적은 주간지 <아르(Arts)>의 전시평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7)

폴 파케티 화랑에서의 개인전 이후 고암의 콜라주는 문자추상의 형식을 수용하면서 동시대적 미술경향과 또 한 차례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주지하듯이 문자추상은 당대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독일 등지에서 시도되던 다양한 추상어법의 하나로서 자리 잡은 칼리그라프(Calligraphe)와 연계를 지니고 있었다.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에서 고암은 다양한 질료를 사용한 콜라주 기법에 한글의 서체를 근간으로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면서 유럽화단에서 그의 특이한 이름 석자 (Ung-no Lee)는 널리 회자되기 시작했다.

고암에 있어 콜라주는 유럽진출과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기법이었다. 따라서 고암의 콜라주 작품의 조형적 성과와 미학 원리들을 살펴보는 일은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동시대의 실험적 경향들과 비교를 통해 동서미술교류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일도 소홀할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고암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연구는 2000년-2005년 서울 평창동의 이응노미술관 시절과, 2007년 대전시가 만년동에 이응노미술관을 신축하고 학예실이 운영되면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고암의 콜라주에 대한 연구문과 관련 자료들은 2001년에 열린 기획전 <60년대 이응노 콜라주전>을 통해 정리된 바 있다.8) 따라서 이 글은 고암의 콜라주와 문자추상에 나타난 형식논리를 추적하는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




4) 고암은 1958년 도불한 후 일년간을 독일에서 체류하고 1960년 초 다시 파리로 돌아와 정착했다. 독일 체류시 그는 프랑크푸르트, 쾰른, 본에서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부인 박인경 여사와 같이 한 2인전이다.

5) 고암은 파케티 화랑과 1961년에서 1964년까지 5년간 전속계약을 맺었다.

6) 전후 파리는 앵포르멜 운동이 다양한 변용이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으나 전쟁을 피해 뉴욕 등 외지로 빠져 나간 작가들에 의해 누수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로 유입해 들어온 외국인 화가들에 대한 국가적 보호는 당연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고암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할 것이다.

7) 미쉘 라공, <아르(Arts)> N° 870, 1962년 5월 23일-29일 전시회 소식


고암의 콜라주 - ‘종이로 그린 그림’

고암이 폴 파케티 화랑의 첫 개인전에 출품한 콜라주는 파리 체류를 시작한 후 3년 남짓의 짧은 기간에 제작된 것들이지만 시기에 따라 재료와 형식적 측면에서 다소간의 차이를 보인다. 우선 1960년 콜라주에 사용된 종이는 작가가 체류하던 세브르(Sèvres)와 파리에서 주워 모은 잡지의 컬러면 페이지를 잘게 찢어 붙인 것이지만, 이듬해인 1961년부터는 종이가 한지로 전격 대체된 작품이 주를 이루게 된다. 한편, 형식적 측면에서도 1960년의 콜라주가 종이가 지닌 물성 자체를 강조하는 가운데 전면회화(all over)의 화면구조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면, 1961년의 것들은 선과 점의 흐름을 구현함으로서 비정형적 에너지와 리듬을 표상한 작품들이 눈에 띠게 늘어난다. 1962년 이후부터는 콜라주 기법에 서체적 형상을 얹힌 이른바 문자추상의 형식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암의 콜라주는 짧은 기간동안 다양하게 실험되었고 자신의 어법이 완성된 이후에도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재료와 형식상의 독자적인 실험은 계속되었다.

주지하듯이 콜라주는 20세기 미술사의 향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혁명적 기법이었다. 1912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입체파 화가들에 의해 처음 시도되어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거치며 세계 각국으로 확대되었고, 전후에 이르러 누보레알리즘 같은 실험적 미술운동의 원조가 되었다. 이른바 브라크와 피카소에 의해 개발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가 슈비터즈와 에른스트에 의해 주도된 다양한 콜라주로 진화하고 이차대전 이후에는 레이몽 앵즈(Raymond Hains)가 주도한 데콜라주(Décollage)09)나 산업폐기물이나 악기 등을 다양한 지지체 위에 쌓아 올린 아르망(Arman)의 아쌍블라주(Assemblage)로 이어지는 계보를 지닌다. 결국 파피에 콜레는 전통적 회화가 지닌 그리기에 반해 ‘제시하기’라는 반예술적 어법으로 무장된 오브제 미술의 원천이 되었다.

고암이 차용한 콜라주는 이미 현대적 고전이 되어버린 기법이었다. 더욱이 파피에 콜레의 원산지인 파리의 대중들에게 고암의 기법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고암의 입장에서도 유럽에 체류하는 몇 년 동안 현지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통해 전시된 다양하고 실험적인 오브제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10)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고암은 자신이 차용한 콜라주 기법에 새로운 의미를 담을 그 어떤 형식논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거장으로서 동양화의 일가를 이룬 고암에 있어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창성을 예술적 목표로 삼아 반세기를 실험적 노정을 걸어온 고암의 시각에서 파피에 콜레는 새로운 표현을 위해 선택한 하나의 기법일 뿐이었다. 그에 있어 콜라주는 ‘종이로 그린 그림’11) 이었으며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사용해 오던 한지와 수묵에서 입체적 볼륨과 물성의 새로운 면을 추가적으로 발견해 내었던 것이다. 고암은 한지와 수묵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부조적 볼륨으로 물질화시킴으로서 그 질료속에 내재되어 있던 공(空)과 충(充) 그리고 여백(餘白)의 의미소들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12) 고암이 “종이조각을 붙였다 다시 떼어내기도 하고, 겹겹이 붙인 종이들을 긁어내어 밑에 있는 종이들이 드러나게도 하고, 또 그 위에 먹이나 다른 안료로 채색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13) 한 것은 종이의 입체감과 질감의 강조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형실험은 파피에 콜레의 평면적 화면구성과 해체된 리얼리티를 대체하려는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고, 익명의 손에 의해 찢긴 포스터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한 작가들의 데콜라주 기법과도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8) 김영나 교수의 ‘이응노의 콜라주- 파케티 화랑전과 그 이후’ <60년대 이응노 콜라주전>, 2001년 고암미술관 전시도록 서문을 참조할 것.

9) 1949년부터 레이몽 앵즈와 자크 빌르글레 등은 익명의 손에 의해 찢겨진 거리의 포스터를 예술작품으로 채집해 전시하는 실험적 미술을 전개되었는데 데콜라주는 이들이 사용한 기법을 지칭하는 용어다. 아피쉬스트(Affichist)로 불리우는 이들은 1959년에 설립된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해 시내 화랑에 작품을 출품했고, 1960년에 이르면 누보레알리스트를 결성해 멤버로 활약한다.


고암은 상습에서 벗어나 실험을 위한 단초로서 콜라주를 선택했다. ‘이질적인 발상과 재료로서 화면 위에 전개되는 이 ’동양적인 환상‘에 파리사람들을 우선 눈길을 돌렸다.’14) 자크 라세뉴는 고암의 콜라주에 나타나는 동양적인 환상을 특별한 상징적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라세뉴는 당시의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를 ‘움직이는 벌집’에 비유하면서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가 증식하여 부풀고 부식하는 3단계를 모두 거치듯 (...) 태양 같은 위대한 리듬과 경이로움과 찬란함이 뒤얽힌 거대한 미궁을 창조한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그의 작품은 “지금껏 보아온 가장 독창적이고 수준 높은 작품들 중의 하나”라고 극찬하였다.15)

고암의 작품에 대한 자크 라세뉴의 비평은 콜라주의 질료적 특성과, 선과 점의 흐름을 통한 비정형적 에너지를 표상하기 시작한 1961년의 경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캔버스에 붙여진 종이조각의 재료적 특성과, 화면 위를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비정형적 포름에서 어떤 카오스적 미궁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부서지기 쉬워 보이나 실상은 단단하며, 겉모습은 울퉁불퉁하지만 실제로는 매끄럽고, 농밀한 동시에 투명한 성질을 함께 지닌”16) 세계였고 그 재료들은 유기적 형태들과 결합하여 정교한 꽃이나 벌집 혹은 태양의 이미지로 재창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크 라세뉴의 시각은 고암의 콜라주가 예전의 양식이나 이곳의 양식과도 닮지 않은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음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치며 고암의 콜라주는 재료와 형식상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스위스 취리히 소재 폴 파케티 화랑에서 가진 고암의 1970년 개인전에 대한 현지 언론의 보도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들이 나온다. 우선 고암의 작품을 ‘벽에 거는 양탄자’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17) 전시장 공간에 부드럽게 늘어져 있는 대형 콜라주들은 ‘화면에 붙여진 모직조각이나 면섬유 또는 삼조각 등은 하나의 조화로운 층을 이루면서 자연성에 도달하고 있다’며 그것은 벽에 거는 양탄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고암의 문자추상 콜라주는 고대적 칼리그람(Calligrammes)으로부터 온 성과이지만 소재의 짜임새와 구성의 리듬과 역동성에서 삶의 어떤 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평하고 있다. 이제 고암의 콜라주 작품은 단순한 종이조형을 넘어 다양한 의미와 교리와 장식성을 지닌 대상으로 확대 해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0) 고암은 1960년 1월 9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서독화단의 발전상’이라는 글에는 카셀도큐멘타에 출품한 다양한 콜라주 기법과 재료의 실험에 대한 감명을 적고 있다.

11) 박인경 여사는 회고의 글 ‘그때를 회상하며’에서 파케티 화랑에서의 전람회 당시 관객들의 대화에 중에 “콜라주라기 보다 종이로 그린 그림이다”라는 말이 오랫동안 귀에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앞의 2001년 고암미술관 전시도록)

12) “동양인에 있어 공과 충의 일치하는 사상이 있다면 고암에게는 여백이라는 숨쉬는 생명이 있다”, 박인경, 위의 글

13) 김영나, 앞의 글

14) 이경성, ‘불굴의 예술정신-고암 이응로의 예술’, <고암 이응로, 삶과 예술>, 얼과 알, 2000, pp.60-69(p.68)

15) 자크 라세뉴, UNG-NO-LEE, 파리 폴 파케티 화랑 개인전 전시도록 서문, 1962

16) 자크 라세뉴, 위의 글


고암의 문자추상 - ‘서체에서 문학성을 제거한 순수 조형형태’

폴 파케티 화랑에서의 개인전 이후 문자추상 콜라주는 고암의 대표적 경향이 되었다. ‘한자의 서체에서 그의 문학성을 빼버린 순수 조형형태로 탈피시킨’18) 고암의 문자추상은 콜라주 기법을 통해 작가의 트레드 마크로 정착되어갔다. 서체에서 문학성을 제거한다는 말의 의미는 추상으로 귀착된 서구미술사의 문맥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그림에서 외적 대상의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서 그림을 이루는 지지체와 구조 그리고 물성에 관심을 갖게 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원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역사가 외적 대상을 점차 제거함으로서 추상미술을 결과케 했다면 문자추상은 문자가 지닌 서술적 구조와 그 의미를 제거함으로서 만들어낸 추상미술 실험의 한 줄기였다. 또한 고암의 문자추상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후 유럽과 아메리카로 이미 확대되던 칼리그라프(Calligraphe)와 연계를 지니고 있었다.

주지하듯 칼리그라프는 서정적 추상미술의 한 경향으로서 전후 프랑스와 미국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 근간은 동양 특히 중국의 서예와 연관성을 지니며 묵선(墨線)의 형태와 그 신비주의적 정신성을 회화적 어법으로 연계해 표현해 내는데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조르쥬 마튜(Georges Mathieu)와 한스 아르퉁(Hans Hartung) 그리고 피에르 술라주(Pierre Doulages) 같은 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마크 토비(Mark Tobey)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흑백의 대담한 대비와 여백의 존중 그리고 조절된 속도의 선을 어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던 이들 대부분은 동양의 서예가들과 교류를 가지며 동양의 선불교(禪佛敎) 사상에 흥미를 보였다. 가령 조르주 마튜와 프란츠 클라인은 일본의 서예가들과 교류를 가졌고, 마크 토비는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선사에 머물며 서예와 명상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도교와 선교사상을 경험하고 탐구했던 마크 토비를 제외하고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동양사상과 철학에 대한 관심은 피상적인 것이었다. 프란츠 클라인의 경우 자신의 검정 붓터치의 선적 형태를 서체의 영향으로 거론하는 것에 반박하면서 동양미술과의 관련성을 부인하였다.’19)



17) 신 취리히 신문(Neue Zuicher Zeitung) 1970년 12월 9일자와 디 타트(Die Tat) 1970년 12월 12일자에 각각 전시회 기사가 실렸다.

18) 이경성, 앞의 글, p.61

미국과 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청년작가들이 파리를 넘나들던 1960년 당시에 고암의 문자추상은 국제적으로 파급되던 서체적 경향의 작가들과 비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미지역에서 불어오던 동양사상에 대한 현지인들의 환상과 신비주의적 관심은 고암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고암이 1964년 설립한 파리동양미술학교(L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거쳐 간 현지인 학생수가 2천명을 넘는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고암을 넘어 동양의 서화(書畵)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대변해 주고 있다. 고암은 파리에 정착한 동양인으로서 일본인 후지타 츠쿠하루(Fujita Tsuguharu)와 중국의 자오우키(Zao Wou Ki)처럼 동양미술의 전도사가 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고암의 문자추상 콜라주는 동양의 서체추상을 동양의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그의 문자추상 작업에는 이전의 콜라주에서 보였던 물성 중심의 시각과 비정형적 대상을 선묘의 에너지로 번안해 내는 앵포르멜의 표준적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1960년과 1961년의 작업이 앵포르멜적 요인을 수용하고 있었다면, 1962년 이후의 콜라주 작업에서는 이를 넘어 ‘서예적 추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고암의 문자추상은 서술적 의미를 가진 문자기호가 아니라 문자 자체가 의미가 되는 추상이었다. 이러한 조형어법은 사실 1950년경부터 칼리그라프 방식으로 접어든 조르주 마튜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20) 그러나 마튜의 작품은 제스추어를 기반으로 한 추상표현주의의 행위적 속성이 강조된 반면 고암의 경우는 서예예술의 정통적 정신과 사상을 회화적 언어로 번안해 내는데 있었다.

1960년대를 관통하면서 문자추상은 고암 세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고암의 문자추상은 한지를 유일하게 오려붙인 콜라주 기법뿐만 아니라 한지에 수묵담채를 겸해 사용했으며 점차 타피스트리(Tapestry)21)와 판화 그리고 입체조형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제작되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재료에 있어서도 종이뿐만 아니라 솜이나 양털에서 융단이나 마포에 이르기 까지 폭 넓게 수용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이르면 고암의 문자추상은 또 하나의 실험적 경향인 군상(Foule)22) 에 의해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19) 김현화, <20세기 미술사- 추상미술의 창조와 발전>, 한길아트, 1999, pp.226-227

20) 조르주 마튜는 그림을 기호이고 문자로 보았고 기호 그 자체의 생명력을 중시했으며 기호가 바로 기의(記意)가 되는 회화의 순수기호를 원했다. 한스 아르퉁 역시 동양 서체에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며 의미를 가진 기호가 아니라 기호 자체가 의미가 되는 기호를 만들어 내려 했다, 김현화, 앞의 책, pp.301-305

21) 고암은 1975년 프랑스 망통에서 열린 제1회 프랑스 타피스리 비엔날레에 출품했으며, 이듬해에는 영국 런던공예센터에서 열린 제2회 국제미니어쳐 텍스타일전에 출품하는 등 타피스트리에도 관심을 많이 보였다. 1982년에는 파리 모빌리에 국립미술관에서 고암의 타피스트리 도안 3점을 구입했다.

22) 고암의 군상은 ‘인간’ 혹은 ‘무화(舞畵)’ 시리즈로 불리기도 한다. 군상이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은 1980년 5월 광주사태 이후부터였다. 윤범모, ‘고암 이응노- 묵죽화에서 통일무까지’, <고암 이응로, 삶과 예술>, 얼과 알, 2000, pp.12-59(p.44)
고암 예술의 특성 - 여백과 소통의 미학

‘고암이 파리체류를 시작할 무렵에 처음 시도되었던 초기의 콜라주는 전래적 기법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앵포르멜의 영향 속에서 이미지의 파괴이며 추상적 공간실험으로 정리될 수 있다.’ 23) 1962년 이후에는 회화적 도상으로서 문자를 콜라주적 형식으로 번안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된다. 후에 도안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자추상은 콜라주의 기법을 넘어 회화적 기법으로 실현되기도 했으며 융단 표면의 털을 가위로 깎아내며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구멍을 뚫어 안과 밖의 경계를 완화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자추상의 전개양상을 종합해 보면 고암의 예술에 나타나는 일관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여백과 소통의 미학’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고암의 콜라주에 나타나는 여백의 형식논리는 바탕과 질료 사이에 설정된 틈을 통해 드러난다. 1960년대 초반 종이의 질료적 물성을 강조한 콜라주 작업의 경우, 화면은 전면회화의 속성을 지니지만 바탕과 부착된 종이 사이에는 언제나 세밀하고도 다채로운 공간으로서 여백이 제시되어 있다. 한지를 찢어낸 후 구겨 붙이거나 풀에 적셔 올린 바탕에는 회화에서 실현할 수 없는 삼차원적 여백이 세밀하게 숨쉬게 되었던 것이다. 그 여백이란 저부조적 공간이 자리한 화면에 비움과 채움의 속성을 융합시키는 요인이었다. 한편 여백의 형식논리는 화면에 표상된 선묘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1961년의 작품에 등장하는 선들은 수묵화의 유동적 선묘와 그 번지기 효과를 떠오르게 한다. 자크 라센느가 발견한 ‘벌집과도 같은 경이로운 리듬과 미궁의 에너지’는 바로 화면에 기운생동을 일으키는 선묘가 지닌 울림의 시작적 표상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동양화의 거장으로서 체득한 서예의 기법과 정신에서 기인한 결과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고암의 콜라주 작업은 프랑소아 플뤼샤르(François Pluchart) 같은 현지 평론가들에게 ‘서양의 회화를 풍요롭게 한 새로운 비젼’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일간지 <콩바(Combat)>에 기고한 전시평을 통해 ‘이응노는 우리의 언어로는 영혼의 상태(Etat dame), 혹은 꽉 차있음이 곧 비어있음인 상태로서의 공(Vide)을 회복하는 가운데 서양미술에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다.’24) 라 적고 있다. 고암의 콜라주에 표상된 여백은 이렇게 공(空)과 충(充)이 합일된 철학적 개념으로 정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암예술을 특징짓는 두 번째 형식논리로서 ‘소통의 미학’이란 화면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형적 원리이자, 그림과 관객 사이를 이어주는 정신적 교류의 원리인 감흥의 미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평면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 화면이 지닌 울림과 여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암은 ‘변용된 파피에 콜레 기법’을 통해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실험했다. 나아가 고암의 실험은 완벽하게 짜여진 지지체로서 캔버스의 틀을 벗어버린 걸개그림을 통해 실험되었다. 또한 올이 성근 부직포를 화면으로 사용하거나 콜라주한 것은 이러한 캔버스의 막힌 공간을 체질적으로 소외시키려는 의도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걸개그림의 표면을 구멍 내어 겉과 속이 상통하도록 했다. 마치 한옥의 방 사이에 드리워진 대발이 안과 밖의 공간을 소통시키는 것처럼 일부 작품들은 문자를 제외한 화면의 여백을 칼로 뚫어냄으로서 소통의 감흥을 꾀하고 있다. 그의 걸개그림은 공간을 차단하는 막이 아니라 소통의 감흥을 야기시키는 조형적 장치가 되었다. 고암이 일구어낸 소통의 조형 원리는 해석을 위한 미학적 원리로 정착되면서 급기야 동양과 서양을 잇는 보편적 언어로 확대되었다.

고암은 이렇듯 동양사상에 근거하면서도 현지에서 체득한 기법과 형식을 받아드려 새로운 융합적 논리와 감흥의 세계를 창안해 내었다. 고암은 1973년 3월 2일 동아일보에 <창작과 모방>이란 제하의 기고문에서 ‘나의 예술사업은 1960년 이후 종이 붙이기(파피에 콜레)나 상형문자를 바탕으로 한 독창성의 발견과 예술화에 대한 집념의 소산’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독창성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사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위해 고암은 숱한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변모하면서 다양한 탐구와 실험정신을 실천했다.



23) 유재길, ‘고암 이응로의 문자추상 작품세계’,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 얼과 알, 2000, pp.253-260(p.256)

24) 프랑소아 플뤼샤르, ‘아펠(Appel)과 이응로- 어떤 불일치’, <콩바(Combat)>, 1962년 5월 23일자


에필로그

20세기 벽두인 1904년에 세상으로 나와 1989년 86세를 일기로 파리의 페르 라쉐즈(Père Lachaise) 공원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고암의 한평생은 격변기 세태가 드리운 무거운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 조선의 몰락 이후 일제 식민지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몸소 겪으며 이국 만리 프랑스로 진출했으나 분단현실의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망각과 소요, 배신과 사랑, 방랑과 정착, 성공과 좌절 사이에서 그의 삶은 혁명가의 것이 되었다. 필자가 프랑스 유학을 위해 파리에 도착하던 1986년 고암은 현지 유학생들에게 베일에 쌓인 미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언했던 고암은 단지 치열한 삶과 창조적 열정에 몸을 맡긴 한 예술가로 우리들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는 전통적 사군자에서 현대적 추상화에 이르기 까지 20세기 현대미술의 흐름과 같이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콜라주 외에도 타피스트리, 조각, 판화, 도자기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고 왕성한 창작활동에 일생을 투신했다. 고암은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선택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러한 고암의 행적은 남북통일을 위한 선구적 행보로서의 통렬함에 앞서 분단민족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고암은 가고 그의 예술은 남아 여백과 소통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그 가치는 비단 예술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 일상과 삶이 요구하는 사상으로 다가온다. 고암 이응노가 개척한 여백과 소통의 미학은 실존적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결실이다. 그것은 척박해가는 현실에 여유를 불어넣는 에너지인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세우는 초석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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