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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향 / 파꽃환상

김영호

파꽃이 바람에 흩날릴 때 내 영혼의 울림도 하늘에 흩날리리라 - 최향

화가가 자신이 선택한 화재(畫材)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은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최향의 경우는 꽃에 자아를 투사한 예에 속하며 이 만남과 동화의 과정은 그의 작품에 환상적 분위기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10여 년 전 어느 봄 들판을 가득채운 파꽃의 군락에서 뜻밖의 감흥을 받은 이래 작가는 이 미물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투신해 왔다고 한다. 오래된 벗처럼 파꽃에 말을 걸고 그 외관과 생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일체감은 파꽃에 자신의 존재를 투영하면서 얻게 된 하나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최향에 있어 파꽃을 그리는 행위란 자연의 섭리를 표상하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의 씨앗이 뿌리내려 자라고 꽃으로 사멸(死滅)함으로서 다시 새로운 생명이 되는 순환의 고리를 인식하는 일이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다면 최향에 있어서 파꽃은 연약한 생명의 꽃이며 거대한 순환의 꽃이자 치열한 삶의 꽃이 된다. 생노병사로 요약된 자연의 법칙을 상징하는 사색의 꽃이다. 이렇듯 예술의 이름으로 축성된 파꽃은 그에게 수많은 의미로 다가서며 스스로를 상징으로 채워놓았다.

화가 최향이 파꽃을 그리는 방식은 개성적이다. 그는 꽃의 이미지를 조형적 언어로 나타내기 위해 붓질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된 표현기법은 튜브에서 직접 짜낸 물감을 나이프 끝에 올려 화면에 찍기를 반복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파꽃의 이미지는 독특한 물성과 질감을 지니게 된다. 캔버스 표면으로 촘촘히 찍혀 돌출된 물감은 마치 잘익은 열대과일의 표면처럼 볼륨감을 나타낸다. 손끝에 닿으면 부서질 것 같은 물감의 돌기(突起)들은 시각에 호소하면서도 촉각적인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작업이 ‘그리기’의 차원을 넘어 ‘찍어내기’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전래적 회화와는 다른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최향의 파꽃 그림은 반복적 행위가 파생시킨 이미지다. 나이프로 물감을 눌러 찍어내는 반복적 행위가 그의 캔버스 표면에 리듬감을 만들고 시선을 긴장케 한다. 캔버스 표면과 나이프 사이에서 태어난 물감의 층은 멀리 떠있는 달의 이미지와 더불어 어느덧 환상적 형태의 풍경이 된다. 그것은 반복적 누름 행위가 남긴 비늘이며 시간과 더불어 응고된 물감은 그 반복적 행위의 기억을 끌어안고 있다. 결국 최향의 그림은 캔버스에 얹혀진 무수한 반점들이 응고되어 형성된 부조적 회화의 형식을 개척하고 있다.

화가 최향의 그림 행위는 땅을 일구는 정원사의 심상과 다르지 않다. 아니면 씨줄과 날줄의 역학을 통해 직물을 직조하는 여인의 손놀림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작업실로 출근해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의 순간까지 진행되는 반복의 행위 속에서 파꽃은 더 이상 꽃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회화의 구성적 결실로 조직된다.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 노동을 통해 변주된 파꽃의 이미지는 다양한 형태의 공간을 창조해 낸다. 최향의 파꽃 그림은 스스로 그림의 틀을 벗어남으로 해서 드디어 새로운 환상의 영역으로 전이(轉移) 되었다.
최향의 파꽃은 화려하면서도 정제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물감을 찍어 올리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단순한 작업방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에는 다양한 색채가 병치되며 얻은 풍요로움이 있다. 호사(豪奢) 속의 단아함은 작가의 작업이 품고 있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파꽃 그림이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화려한 원색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원형을 기본으로 미세한 형태의 변화와 평면적 공간에 의한 구성적 요소가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형능력은 그가 오래전부터 그려온 꽃의 이미지와 순수 조형적 어법으로 펼쳐놓았던 추상 이미지의 경영으로부터 온 성과로 보인다.

화가 최향의 그림은 파꽃을 화재로 삼고 있으나 축성의 공간인 캔버스 위에 표상됨으로서 색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사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파꽃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게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최향의 그림은 시와 같다. 생명과 자연을 노래하고 푸른 몽환의 정원을 가꾸며, 고독한 삶의 얼개를 끝없이 자극하는 서정시이다. 우리는 그의 이색적인 화법과 색채와 행위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본다. 낯익은 것 같으면서도 본 적이 없는 세계, 일상적이면서도 비밀스런 세계가 그의 그림에 숨쉬는 세계다. (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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