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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 / 의사(擬似) 아이콘을 통해 세상 들여다보기

김영호

현대적 우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우상(icon)을 마음속에 새기게 된다. 특정 가수나 배우에서 정치인, 사상가, 혁명가 그리고 예술가와 운동선수에 이르기까지 우상의 범주는 다양하다. 그런데 따져볼 것은 우상이란 사람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경험은 대개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그리고 영화 등의 ‘대중 미디어를 통해’ 제공된다는 점이다. 마릴린 먼로 열광자들 대부분은 그녀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대중 정보사회로 접어든 1960년대 이후 미디어는 사람들의 경험을 지배하고 우상을 생산해내는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미디어의 넘쳐나는 힘은 새로운 예술의 태동과 전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디오아트, 디지털아트뿐만 아니라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 개념미술과 같은 현대미술 경향은 당대를 풍미했던 대중 미디어의 몸을 빌려 탄생한 경우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예술가들은 미디어가 야기한 시각 환경의 변화 혹은 위기에 대응하여 다양한 성찰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도판1)
화가 강형구는 우상의 생산과 해석의 방식을 새롭게 수정하며 화단에 급속히 부상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우상들은 일견 대중 미디어의 산물로서 반 고흐나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이 마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같은 팝 아이콘이다. 대중문화 시대의 우상들을 작품의 소재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팝아트의 황제로 알려진 앤디 워홀과 자주 비교된다. (도판2) 또한 사진 매체를 원본으로 이용해 대상을 정밀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의 작가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형구가 ‘손으로 그려내는’ 우상의 이미지는 판화적 전사 기법을 이용한 워홀의 작업과 근본이 다르며, 그의 손에 들어온 사진 이미지는 캔버스에 옮겨지는 과정에서 표정의 왜곡과 형태의 변형이 치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객관적 묘사를 시도하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작업들과도 차별화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결국 강형구가 그려내는 우상은 팝 시대의 아이콘을 넘어 작가의 관점으로 합성되거나 조작된 허구적 우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는 보는 이의 시선을 흥분시키고 ‘무방비상태로 나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바르트) 어떤 기운이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전해지는 이러한 감흥은 그가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캐리커처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된다. 대상을 닮지 않게 그리면서도 그 인물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조형어법은 강형구의 작품이 지닌 큰 특성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허구를 재현해내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로 대체하려는 강형구의 우상들은 현대 디지털 미디어의 초상이기도 하다.

화가의 노정
강형구는 73학번으로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재학 당시 그는 국내 화단에 고개를 들기 시작했던 극사실적 경향의 기법에 매료되어 지폐나 동전 따위의 다양한 사물들을 묘사하거나 프로젝터를 이용한 영상작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아카데미와 모던으로 양분된 당대의 화단 분위기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몸담았던 농약회사에서의 직장생활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오랜 성찰의 기간이었다. 그는 1988년부터 동숭동 대학로에 나우 갤러리를 열어 행위미술과 설치미술을 비롯한 현대미술의 경향들을 소개하면서 미술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1991년 강형구는 갤러리를 접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 동안그린 작품을 모아 2001년 첫 개인전을 조선일보 갤러리와 예술의 전당 그리고 삼성플라자 갤러리에 동시에 개최하면서 의욕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매년 개인전을 열었는데 2002년 세종문화회관 전관에 내놓은 120호~200호의 대작 자화상 60점은 작가의 이미지를 화단에 알리는 동시에 ‘안면초상’이 하나의 대표적 경향으로 부상하는 데 기여했다.
이듬해인 2003년, 강형구는 캐리커처 그림과 점토작업 600여 점을 제작하면서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열정을 과시했다. 캐리커처는 화가로서 강형구의 사회적 성향을 잘 반영하는 경향이자 대중문화에 바탕을 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근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캐리커처를 포함한 글 모음집 『이슈포인트』(2001)를 발간했고 다수의 잡지와 미술전문지에 캐리커처를 곁들인 고정 칼럼을 연재해왔다. 그러나 캐리커처는 그가 걸어가야 할 중심 영역이 아니었다. 전시를 마친 이후 강형구는 당대의 유명인사들을 소재로 한 안면초상 연작을 200호의 대형 캔버스에 그리는 데 다시 전념했으며, 2007년 국내의 대표적 화랑의 하나인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안면초상 분야의 대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그는 국외의 옥션을 통해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하는데 홍콩 크리스티에 출품된 강렬한 눈빛의 반 고흐 그림은 그를 국제무대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도판3, 4)

자화상
강형구의 이름 석자가 화단에 회자되기 시작한 계기는 2002년에 열린 ≪자화상전≫ 이후라 할 수 있다. 자화상은 작가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산물이지만 그 효과는 대중들의 관심을 작가에게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전시를 계기로 그의 대형 자화상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경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스프레이 기법이나 대형 화면 따위의 유사 조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양식으로 코드화되기 어려운 독자적인 면들로 채워져 있었다. 강형구의 자화상은 강렬한 눈빛과 세밀하면서도 호방한 선묘의 기운으로 인물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안면 외형의 단순한 서술을 넘어 독립된 존재성을 확보하면서 조선시대의 문인화가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는 정신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다. (도판5)

강형구의 자화상에서 체감되는 감흥은 전적으로 작가의 조형능력에 기인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얼굴에 시간을 불어넣어 노화된 모습으로 표현하거나 때로는 분노와 비애의 감정을 띤 연기자의 모습으로 연출하며 나아가 무거운 데스마스크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때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유사한 모습의 아이콘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신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강형구가 화면에 연출한 자신의 얼굴은 관객들에게 자화상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개체들의 삶을 드러내는 보편적 존재의 얼굴로 해석되었다. (도판6, 7)

강형구의 자화상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관객들의 반응은 요란하다. 관객을 향해 열린 눈과 안면에 새겨진 주름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삶의 노정을 실감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형구는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 표현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과 치밀한 연구를 시도해왔다. 가령 관객과의 대질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거대 화면을 도입하고 자화상의 시선은 대부분 정면을 향하게 했다. 또한 하이퍼리얼리즘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건조한 표현방식인 사진 전사나 인쇄기법을 멀리하고 손의 체험적 노동을 통해 대형 화면을 감각으로 마무리해 나간다. 방독 마스크를 쓰고 양손에 도구를 든 채 거대 화면과 수없이 접촉하는 작가의 모습은 철가면과 무기로 무장한 검투사를 연상케 한다. 그 전투의 결과로 탄생된 인물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나 침묵의 눈은 보는 이들의 다양한 질문에 열정으로 응답하고 있다.

캐리커처
강형구의 안면초상에서 느껴지는 강한 감동은 화가로서 개인의 조형능력과 특수한 사회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중 캐리커처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전기했듯이 캐리커처는 작가로서 강형구의 작품 형식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일 뿐 아니라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의 작품에 담긴 의미들을 해설하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극사실적 회화의 어법에 인물의 특성을 강조해 변형시키는 조형능력이 융합되면서 독자적 화풍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캐리커처는 안면근육이나 주름의 생성위치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과 대상 재현적 소묘의 능력이 겸비되었을 때 제대로 그려지는 경향이다. 강형구의 캐리커처는 평면뿐만 아니라 점토를 이용한 입체로도 제작되었다. 캐리커처에 숨겨진 유쾌한 일탈의 서정은 강형구의 도발적이고 비판적 성향과 잘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강형구에게 캐리커처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향성을 지닌 미술형식으로 다루어진다. 우선 그의 평면 캐리커처는 선묘와 색면 그리고 명암이 각각 중심이 된 세 개의 경향으로 구분된다. 선묘 중심의 캐리커처는 대상 이미지의 윤곽을 나이프로 도려내듯 선명하게 강조한 것이며, 색면 중심의 캐리커처는 드로잉을 한 뒤 채색하거나 채색종이를 오려붙여 완성한 것이다. 또한 명암 중심의 캐리커처는 소묘에서 사용하는 음영의 효과를 통해 형태의 볼륨감을 강조한 것이다. 이들 다양한 경향의 캐리커처들 모두는 대상 인물이 지닌 멋이나 품위 또는 위선이나 음모를 드러내고 있어 이를 통해 시국을 풍자하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편 입체 캐리커처는 조소 작품이 지닌 삼차원적 형태를 통해 평면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한 실재감을 보여준다. 물질적 실재감과 변형된 형태의 허구성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가상적 실재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조각대 위에 조명을 받고 설치된 등신대의 입체 캐리커처는 프랑스 작가 오노레 도미에의 미니어처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도판8, 9)

강형구의 캐리커처는 시사와 풍자 그리고 해학의 표상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형구의 캐리커처가 지닌 특성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그려내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가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작가가 시도하는 수사방식에 따라 다양한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강형구의 캐리커처는 향후 자신의 안면초상에 특수한 그만의 색채를 만들어내는 근간이 되었다. (도판10)

의사 아이콘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 강형구가 2001년 첫 개인전에 소개한 작품들을 보면 그의 안면초상은 당대 정치계의 거두들인 스탈린, 호치민, 덩샤오핑 등의 얼굴을 극사실적 화풍으로 그린 대작들이었다. 극사실 회화는 1980년대 이후 이미 당대 한국 화단의 주류를 이루는 하나의 경향이 되어 있었다. 아울러 일련의 작가들은 미국에서 유입된 하이퍼리얼리즘과 대비되는 색깔을 찾기 위한 노력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 당시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구미지역의 경향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소명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뒤늦게 이 물결에 합류한 강형구 역시 그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일탈을 위해 대형 화면에 당대를 대표하는 우상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그 이미지들은 변형하기 위한 시도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형구는 자신이 극사실 기법을 동원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에서 존재치 않는 허구도, 사진으로 찍힐 수 없는 비현실도 실감나게 그려질 수 있다는 매력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의 작업이 허구적 대상의 실현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 이를 위해 그는 당대의 우상들과 자신의 얼굴을 소재로 삼아 다양한 변형의 작업을 시도했다. 강형구는 허구적 대상을 실현하는 매력에 힘입어 사진기 발명 이전의 과거를 살았던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인물들을 사진적 이미지로 실현해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반 고흐의 얼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형구의 초상화를 감상하는 데는 사진적 해석의 과정이 전제된다. 피사체와 사진 이미지 사이의 과학적 일치가 그 해석의 근간을 이루는 요인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 적용된 사진적 해석이란 역설적으로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님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존재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사진의 원리에 대한 회화적 배신이 있다. 강형구의 작업은 비디오 화면이나 잡지 등의 매체에서 사진을 채취하면서 시작되지만 작업 과정에서 채취된 사진을 변형시켜 회화작품으로 재생산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은 원본과도 다른 이른바 해석된 초상으로 완성된다.

우상 시리즈에서 강형구가 선택하는 소재는 왜 대중적 인물인가? 그것은 물론 대중들의 취향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이때 대중이란 동시대의 현실을 말하며 그 시대가 만들어내는 유행이나 이념을 말한다. 정치인들의 캐릭터는 동시대의 현실과 그 현실을 살았던 대중들의 삶을 대변하며 연예인 마릴린 먼로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기호로 읽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강형구는 그들의 실체를 변형 혹은 왜곡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인물로 변주시키며, 나이를 같이 먹어가는 인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와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사는 존재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허구와 가상의 미학
강형구의 안면초상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조형적 원리는 다양한 시각에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의사현실, 왜상기법, 감정이입, 노화의 가변성, 그리고 허구리얼리즘 등으로 설명하려 한다.

의사현실(pseudoreality): 강형구는 있는 사물을 사진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그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그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고백한다. 사진처럼 그리면서도 사진적인 그림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태도는 가상현실 혹은 합성리얼리즘 등으로 명명되고 있는 현대 시각문화의 키워드들과 맥을 같이한다. 왜 그의 초상이 리얼리즘의 영역에 속하는가? 인물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사회상을 표현하는 데 지향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형구의 초상은 카메라의 눈에 순간으로 포착된 인물의 형상을 그리는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강형구의 초상은 정지된 순간의 특수 이미지가 아니라 유기적 시간을 거치며 형성된 원형 이미지가 된다. 그의 인물상은 변화하는 현상의 시간을 초월한 현실의 상이다. (도판11, 12)

왜상기법(anamorphosis): 강형구는 인물의 형상을 왜곡시키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사물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그리는 방식은 격자무늬의 변형에 의한 수학적 계산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그의 경우는 인물의 안면을 아래 혹은 위로 압축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왜상기법에 의해 변형된 인물은 마치 볼록거울에 비친 상을 볼 때 생기는 미묘한 시각체험을 선사한다. 또한 표현 주체와 그려진 이미지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내면서 그의 초상이 허상적 구조로 짜여진 그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도판13, 14)

감정이입: 강형구의 안면초상은 체감 소재로서 어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거대화면 속에 얼굴을 확대하고 땀구멍과 주름 그리고 털을 하나하나 그려내는 그의 작업은 결국 수많은 표정의 안면과 영혼의 창문인 눈을 부각시켜 심리적 충격을 전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의 대형 초상 앞에 선 대중들은 걸리버를 바라보는 난쟁이 나라의 백성처럼 느껴질 것이다. 코가 산이 되고 털이 숲이 되고 눈이 샘이 되는 그런 체험은 결국 인간의 신체에 관심을 갖는 대중들이 그림과 소통하게 되는 감정이입의 효과를 갖게 된다. (도판15)

노화(aging)의 가변성: 강형구가 그리는 특정 인물 시리즈는 가변적이다. 자신의 초상이나 마릴린 먼로의 얼굴은 노화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를 본다. 바르트가 사진을 피사체의 죽음으로 규정한 것은 사진이 시간의 순간을 정지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지나버린 시간의 껍질 그것이 사진이다. 강형구는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사진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혼돈시킨다. 미래의 순간을 현재의 공간으로 끌어내린 그의 인물초상은 결국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를 대변하고 있다. 강형구의 손에 의해 노화를 거듭하는 마릴린 먼로는 우리들과 동일한 공간 속에 그녀를 살게 한다. 강형구의 가변적 얼굴은 유기적 존재로서 끝없이 변화하는 얼굴에 대한 발언이다.

허구적 리얼리즘: 강형구의 초상은 허구와 가상으로 무장되어 있다. ‘현실에 존재치 않은 인물이나 사진으로 재현할 수 없는 인물 역시도 실감나게 그려질 수 있다’는 사실은 강형구에게 더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특권이며 유희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런 허구의 리얼리즘은 역으로 한 장의 사진이 그 인물의 전형적 이미지로 남아 역사화되는 정보사회의 허구를 고발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허구 이미지의 생산을 통해 전형화된 허구의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은 또한 가상과 현실 사이에 가득 차 흐르는 모순과 역설의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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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공백기를 거쳐 1988년부터 동숭동 대학로에 나우갤러리를 열어 미술계에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2001년 확대된 얼굴을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고 2002년에는 ‘자화상’ 연작을 발표하면서 안면초상이 하나의 독립된 경향으로 국내 화단에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인 2003년, 강형구는 ≪캐리커처전≫을 열었고, 캐리커처 모음집 『이슈포인트』(2001)를 발간했으며 다수의 잡지와 미술전문지에 고정 칼럼을 연재해왔다. 2007년 국내의 대표적 화랑의 하나인 아라리오 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은 이래 국내외의 미술시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영호
제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도불,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하면서 파리1대학(소르본)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운영위원, FIAC 《한국의해》 커미셔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시총감독,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 커미셔너, 현대미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광주비엔날레 이사,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는『뒤샹, 나를 말한다』, 저서로는 『미술시사비평』 등이 있다.

1. 강형구, Deung,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07
2. 강형구, Hepburn, 알루미늄에 유채, 120x240cm, 2009 p.37
3. 강형구, Vincent van Gogh in Blue, 캔버스에 유채, 259×388cm, 2006
4. 강형구, Da Vinch,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08
5. 강형구, Self-portrait,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1998
6. 강형구, Self-portrait, 캔버스에 유채, 194×130cm, 1997
7. 강형구, Self-portrait, 캔버스에 유채, 259×194cm, 2007
8. 강형구, 캐리커처 소묘 중 택일
9. 강형구, 캐리커처 입체 중 택일
10. 강형구, 캐리커처 색면 중 택일
11. 강형구, Lincoln in the book, 복합 미디어, 210×310×110cm, 2009
12. 강형구, Van Gogh in the book, 복합 미디어, 210×310×110cm, 2009
13. 강형구, Self-portrait, 알루미늄에 유채, 120×240cm, 2009
14. 강형구, Monroe, 알루미늄에 유채 240×480cm, 2009
15. 강형구, Woman, 알루미늄에 유채, 240×120c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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