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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 허상과 실재의 경계에서 본 오브제

김영호

일루전의 문제
한국 극사실회화의 대표 주자 중 한사람으로 알려진 고영훈은 허상과 실재의 간극을 통찰하는 데 40년 가까이 투신해왔다. 그의 작품세계는 환영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의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시지각적 물음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대상의 형태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는 차원에서 고영훈의 작품 경향은 리얼리즘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일루전의 문제는 특정 시대를 풍미했던 미술 경향의 미학적 전유물이 아니라 수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당대의 시각 문화에 의해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다. 따라서 한국의 극사실회화는 한국 실정에 맞는 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체계와 표현방식을 지닌 미술로 정리되어야 하고, 또 그 가능성에 대한 연구도 지속되어야 한다. 그 가능성을 추출해 부양할 수 있는 인자는 바로 허상과 실재라는 두 개의 요소이며, 두 요소의 상관적 구조와 그 지각형식을 개발하는 것이 주된 과제라고 생각된다.

일루전의 문제는 시각예술이 지닌 본성과도 연계되는 질문이자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는 인식체계와도 밀접하게 연계된다.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실재인가? 실재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담은 캔버스는 또 다른 차원의 실재인가? 허상과 실재는 동일한 의미생산의 구조를 지닌 것이 아닌가? 실재의 허상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고영훈의 작업은 단순한 극사실주의의 기법이나 형식의 문제에 국한된 차원을 넘어 형상, 나아가 회화의 본성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익명의 오브제
고영훈은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3년부터 대상의 외형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적 경향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그가 선택한 소재는 군화였고, 이듬해에는 코카콜라와 배낭 그리고 코트 등의 사물을 100호 크기의 화폭에 담았다. 당시 작업들은 단순히 눈에 비치는 바를 그리는 대상 재현적 묘사를 넘어 다양한 실험적인 태도의 산물이었다. 가령 군화는 ‘던롭(DUNLOP)’이라는 로고가 새겨진 밑창을 중심에 배치한 후 그 주변으로 가죽을 박제된 동물의 표피처럼 펼쳐 놓았으며, 코카콜라의 이미지는 팝아트의 전면적 구조와 개체 이미지의 강조를 동시에 조합한 것이었다. 배낭과 코트는 배경을 생략함으로써 사물의 존재감 혹은 물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눈앞에 제시된 오브제의 외형에 대한 관심과 오브제의 물성 그리고 오브제를 캔버스에 전치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구조적 실험이 학생시절의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선택한 오브제는 그저 주변에서 우연히 발견된 사물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을 명확히 드러내는 사물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문화와 군사용품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반영하는 동시에, 1970년대 군부독재의 사회상에 대한 발언이기도 했다. 해체되고 박제화된 군화나 배낭 그리고 코트는 클로즈업된 코카콜라 이미지와 더불어 숨겨진 거대한 힘을 상징하는 익명적 기호들에 다름 아니었다.(도판1, 2, 3, 4)

1970년대 중반,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 사이에는 국전의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극사실적 경향의 형상미술을 추구하기 시작한 이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은 교통 표지판, 포스터, 신발, 옷 등 일상적 소재들을 실재감 있게 표현했고 실물에 가깝게 묘사하면서 새로운 사실주의를 지향했다. 한편 이들의 선배로서 국전 내부에서 전통적 재현주의를 넘어 새로운 형상성을 내세운 작품을 제작한 작가들도 다수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과녁, 보도블록, 철길에서 인물과 정물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새로운 구도와 기법으로 재현해 한국 극사실 회화의 태동에 기여했다.

그러나 고영훈은 천성적으로 사변적 기질을 지닌 작가였다. 선동과 행동이 아닌 논리와 직관의 사고로 사물을 인식하려는 태도는 그의 작품세계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 군사정권에 대한 작가의 비평적 관점도 현실 참여의 성향을 지닌 작가들의 직설적 표현과는 다른 언어로 표상되었다. 또한 동시대에 미국으로부터 밀려온 팝아트나 하이퍼리얼리즘의 사진적 재현방식이나 현상적 세계관과도 거리가 있었다. 고영훈이 학생 시절에 습득한 예술적 태도는 동시대의 사회적 현실에 근거하고 있었으나 유아론적인 성찰로 전이된 일종의 초현실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현실에 근거해 그것을 뛰어넘은 초현실의 세계는 환영과 실재 사이를 오가는 독자적인 화풍으로 정착해나가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성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돌 그림 <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를 통해 실현되었다.

돌의 일루전을 찾아 ― ‘This is a Stone’
1974년 고영훈은 <이것은 돌입니다>를 제2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면서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이 일종의 충격이었던 이유는 190×400센티미터라는 캔버스의 규모도 그렇지만 당대 모더니즘 미술의 집산지임을 자처하며 태동한 《앙데팡당》전이 구상적 경향의 작품에 자리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영훈의 작품이 동시대의 주류인 아방가르드적 색채를 띤 경향으로서 인정되었음을 의미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고영훈은 한국 극사실회화의 선두 주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전시를 보았던 『아트 인터내셔널(Art International)』 동경 주재 특파원이었던 조셉 러브(Josep Love)는 ‘한국 전위미술의 근원’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고영훈의 작품이 전체적인 전시회의 성격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에는 색이 거의 없으며, 세련성이나 세부적인 것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한국적 감수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무관심과 미완성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은 고영훈의 극사실회화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성을 대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판5, 6)

한편, 고영훈의 <이것은 돌입니다> 시리즈는《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경향에 포함되고 있었으나 ‘초사실주의에 접근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거대 화면에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는 형상으로 자리 잡은 채 이름 모를 감동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조셉 러브는 그의 작품이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대별되는 한국적 감수성의 핵심을 보존하고 있음을 갈파했다. 그는 고영훈의 작품과 하이퍼리얼리즘의 차별성을 “일상적 산업제품이 아닌 자연물이며, 공간 착시의 상황에 놓으려는 시도도 없고,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모방하여 평면화되지도 않은 점, 그리고 주된 관심은 배경이나 판타지나 형이 아닌 텍스추어에 있다는 점”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언급한 텍스추어는 1970년대 한국 전위미술이 보여준 경향성을 대변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었으나 고영훈의 작품에 적용할 경우 이는 캔버스의 바탕이 아닌 암석의 결을 이루는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와 삶에 대한 성찰 - 스톤 북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차례의 변화를 보인다. 이른바 <스톤 북> 시리즈가 그것인데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책의 표면에 돌을 얹혀 놓음으로서 서술적 구조를 취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심으로 당시의 작업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내 앞에 놓여진 돌과 내 손가락 사이의 싸늘한 공간을 느끼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돌멩이에서 시간을 느낀다.” 화가로서 고영훈에게 돌멩이는 공간과 시간의 존재를 알리는 전령이었다. 나아가 그의 전령이 전해주는 공간과 시간은 신문과 책의 도입으로 역사와 문명의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인쇄물의 표면에 자리한 돌멩이는 인위적 가공이 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존재하지만 타임머신처럼 역사의 편린들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구촌의 시간과 공간을 장식했던 사건들을 현재로 이동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과 기아 그리고 식민에 이르는 다양한 사건들은 고영훈이 제시한 돌멩이를 통해 부유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거쳐 그의 <스톤 북>은 ‘존재의 역사’를 알리는 하나의 소통 방식이 되었다.(도판7)

고영훈의 <스톤 북> 시리즈는 돌과 책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혼돈시키는 방향으로 실험되었다. 이른바 허상과 실재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관심은 실물 오브제로서 책장을 캔버스에 콜라주하고 그 위에 돌멩이를 일루전으로 등장시키는 기법으로 발전되었다. 엄밀히 말해 대부분의 경우 그의 돌멩이는 허상이며 화면의 바탕에 콜라주된 책장들은 실재이다. 1980년대를 관통하며 <스톤 북> 시리즈는 무수한 형상으로 변주되어 제작되었고 고영훈을 극사실회화의 주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만들었다. 1988년에 이르러서는 배경의 책장은 한 권의 책 형태로 표현되었고, 그 위에 부유하는 몇 개의 돌멩이 이미지와 더불어 일루전적 완결성이 한층 견고해졌다. 책은 두께를 지니며 표지와 포장은 천으로 감싸져 풍부한 질감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 위에 HUMAN, BEING과 같은 문자기호나 낙서를 넣기도 했다. (도판8, 9)

고영훈에게 실재와 환영의 충돌은 오브제 개념의 도입으로 한층 풍부해졌다. 전시회를 통해 그는 돌멩이가 그려진 실물로서 책을 전시했고, 주워 온 돌의 표면에 돌의 무늬를 가필하기도 했으며, 책의 모양을 닮은 입체 구조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돌을 깎아낸 단면에 글자를 새기면서 실재와 허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유지시키기 시작했다. 주지하듯 오브제란 ‘눈앞에 제시된 어떤 대상’으로서 미술의 영역에서 쓰일 때 ‘인간의 인식구조 안에 영입된 사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마르셀 뒤샹에서 아르테 포베라를 표방하는 작가들에 의한 오브제의 모험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고영훈의 책과 돌멩이 그리고 다양한 입체물 등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는 것이다. 고영훈의 경우 오브제에 대한 의미생산의 형식은 바로 일루전의 기법과 실재 사물의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충돌시킴으로서 파생되는 효과에 기인하고 있다. 고영훈은 자신의 작업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판10)
“양극의 대립에서 역설적으로 발생되는 긴장된 조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1989년부터는 새의 깃털이 등장하면서 의미구조가 두 개 이상의 복합적 단위로 확대되었다. 책과 돌 그리고 깃털의 관계는 뒤이어 장갑, 작업복, 시계추, 타자기, 칼, 숟가락, 수통, 삽, 시계, 냄비, 깡통, 주전자 등의 오브제 이미지로 다변화되었다. 또한 화면의 구조도 반복과 대비 그리고 삽화, 집적, 그리고 서체의 도입 등의 방식을 통해 오브제의 의미를 다양하게 변주시켰다. 이들 오브제 하나하나는 마치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극적 대립과 긴장을 통해 역설적이면서도 결국은 연출가가 의도한 바대로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1990년대를 관통하면서 고영훈의 그려진 오브제는 더 이상 오브제가 아니라 동시대의 시간과 공간을 반영하는 의미의 기호들이 되었다. 극 중의 알파치노가 자연인으로서의 알파치노가 아닌 것처럼 고영훈의 돌멩이는 더 이상 자연물로서 돌멩이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그가 선택한 다양한 오브제들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고영훈의 극사실회화는 이렇듯 자신의 고유한 언어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

존재와 개념의 통합
2000년대에 들어 고영훈이 선택한 일루전회화의 주제는 자연물로 한걸음 더 확장되었다. 작약, 모란, 호박꽃과 나비들이 서책의 바탕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전통 도자 항아리 시리즈도 거대한 크기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행보에 대한 종결을 예고하는 시도로 평가되었다. 평론가 김복영은 이를 물신(物神)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물신에 대한 응시는 이미 지난 90년대 이후, 돌과 함께 주요 모티프로 등장시킨 서책, 동물의 잔해, 생활고품들, 옛 무기류, 근대 산업의 폐기물에 이르는 잡다하리만큼 많은 오브제들과 복제그림들을 병존시키면서 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십수 년에 걸친 사물들과의 친숙한 조우에서 사물들을 그의 의식 속에 내재화하는 초기 물신화 단계가 이루어졌고, 이어서 외재적 사물들과 무(巫)의 경지에서 퓨전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김복영은 이러한 변화를 “애니미즘의 제례를 위한 일루전의 첫 시범”으로 규정하고 “살아 있는 것들과 신적인 것에 내재하는 영혼을 불러내어 현존하는 사물들에다 각인시키고자 한다”고 설명한다. “일루전으로 복제된 항아리가 용과 봉황과 달의 영혼이 거하는 물신이 되고, 목련과 호박 넝쿨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휘감고 있는 서책은 더 이상 옛 시절의 서책이 아니라, 물신의 몸으로서 서책이 되고 있다.” (김복영, ‘복제된 물신, 일루전의 새방향: 고영훈의 근작들’, 가나아트센터 개인전 도록서문, 2006) (도판11, 12)

이상에서 보듯 고영훈의 화력은 극사실적 회화의 문맥에서 일루전의 문제를 치열하게 성찰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변화는 돌의 일루전에서 서책과 돌의 대면으로 그리고 다양한 일상적 오브제로 주제가 확대되었고, 새천년에 들어선 이후 자연 오브제와 전통적 항아리로 귀착되었다. 이러한 주제의 변화를 관통하는 그의 일관된 논법은 일루전에 대한 탐구였다. 실재와 환영 사이의 충돌과 융합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관계를 전도시킴으로써 실재와 환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고영훈의 항아리는 실재의 항아리도 환영으로서 항아리도 아닌 어떤 존재가 되었다. 평면에 자리 잡은 일루전이라는 점에서 실재가 아닌 환영이며, 캔버스에 그려진 일루전적 존재라는 점에서 실재가 된다. 일루전적 실재는 시뮬라시옹의 담론처럼 역할과 기능이 전도된 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가 상정하는 허상의 달항아리는 실재 달항아리의 대용물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차원의 정신과 유용성을 지닌 존재로서 현존한다. 이미지와 실재가 혼돈의 과정을 거쳐 융합된 차원으로 이해되는 순간에서 우리는 고영훈의 예술세계가 지닌 가치를 읽어낼 수 있다. (도판13)

작품 형성의 배경과 미학적 원리
고영훈의 작품세계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는 출생지의 자연환경과 천성으로 타고난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제주도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까지 거친 바다와 화산암의 접점에서 소년기를 보내면서 독특한 시공간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수평선 너머의 미지와 그로부터 밀려오는 대기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고향에 대한 애정은 1976년 홍익대학교 졸업 후 제주 대호다방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것에서 확인된다. 1982년 육지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현실과 존재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추가 극사실적 경향의 작품으로 표현되는 가운데, 파리에서의 알랭 브롱델의 만남과 그의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은 그의 시야를 외국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 인도트리엔날레와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대표 작가로 참가한 것도 실험적 탐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고영훈의 예술이 해외 미술사조와 연계해 다루어 질 때 우선 떠오르는 경향이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라는 제하의 파이프 그림은 고영훈의 <이것은 돌입니다>라는 제하의 돌 그림과 비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사실적으로 그려 넣고 파이프임을 부정했을 때 그의 발언은 일루전일 뿐인 그림의 본질을 폭로하고, 나아가 회화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편견으로부터 해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영훈의 경우 돌의 일루전을 앞에 두고 돌임을 선언했다. 이는 돌의 허상과 돌의 실재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존재론적 세계로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꽃의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되듯이 돌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돌은 비로소 작가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다. 이렇게 다가온 돌은 허상이지만 허상 이미지는 명백히 실재하는 대상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넘어 현상적 인식으로의 전환을 이끌게 된다. 결국 고영훈의 허상과 실재에 대한 인식은 마그리트의 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도판14, 15)

고영훈은 이러한 차이를 표현형식에서도 적용했다. 그가 화면에 재현해 그린 오브제들은 실재 대상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점과 다르다. 가령 그의 서책은 복수 시점에 의해 파악된 대상을 종합해놓은 것이다. 또한 달항아리를 묘사할 때도 대상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위들을 정면과 후면의 구분 없이 그리고 있다. 고영훈에게 허상 이미지는 실존물로서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왜곡된 이미지이며, 이는 절대적 존재로 완성하기 위한 행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사물의 외상을 왜곡하거나 복수 시점으로 파악해 극대화함으로써 대상의 절대미를 찾으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자 결국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고영훈에게 사실화란 외적 형태의 유사성에 근거한 모방을 넘어 본질 혹은 절대에 대한 모방이라는 점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의 미학 원리와도 대별된다.

다시점과 다초점의 제작방식은 동양적 발상에서 연유한 것이며 동양의 문방도에서 보이는 역원근법의 원리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인간의 시점이 아니라 사물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으로 자리한 시점이다. 이때 오브제와 나의 관계는 인식 주체인 내가 인식 대상에게 향하는 일방향성이 아니라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가 수평적 관계로 평등한 실존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고영훈의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물신주의는 그려진 사물들로서 꽃과 항아리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지닌 실재로 자리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달은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기원의 대상이며, 꽃은 생물의 차원을 넘어 환영의 대상으로서 실재한다.

고영훈은 현대미술의 명제란 무엇을 그리고 그림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가에 답하는 일이라 한다. 이는 그림을 통해 추구하는 리얼리티란 무엇인가와 동일한 물음이다. 허상과 실재 사이를 오가는 그의 작업방식이 리얼리즘이라는 체계 안에서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 리얼리즘이란 현실과 정신 그리고 상황에 젖줄을 대고 있는 사고의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영훈의 작업은 대중적이라 할 수 있고, 관객들의 시각적 호기심과 해석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충족시켜 준다. 이러한 즐거움이 대중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이미 환영의 실재가 그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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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
제주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74년 제2회 《앙테팡당》전을 통해 극사실적 경향의 돌 작품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제6회 인토트리엔날레와 제42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하면서 이 경향의 대표적 작가로 부상했다. 1985~1993년에 서울 두손갤러리와 파리 알랭브롱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소개했고,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가나화랑의 전속이 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미술기자상을, 1991년에는 토탈미술대상을 수상했다. 바젤아트페어, 시카고아트페어 등과 크리스티, 소더비 등의 미술시장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

김영호
제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도불,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하면서 파리1대학(소르본)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운영위원, FIAC 《한국의해》 커미셔너,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전시총감독,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 커미셔너, 현대미술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광주비엔날레 이사,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는『뒤샹, 나를 말한다』, 저서로는 『미술시사비평』 등이 있다.


1. 고영훈, <군화>, 161×130cm, 캔버스에 유채, 1973
2. 고영훈 <코카콜라>, 161×130cm, 캔버스에 유채, 1974
3. 고영훈, <코트>, 160×120cm, 캔버스에 유채, 1974
4. 고영훈, <배낭>
5. 고영훈, , 190×400cm, 캔버스에 유채, 1974, 숭실대학교 소장
6. 고영훈, , 130×161cm, 캔버스에 유채, 1978
7. 고영훈, , 60×44cm, 신문에 아크릴릭, 1982
8. 고영훈, , 73×107cm, 종이에 아크릴릭, 1987
9. 고영훈, , 60×96cm, 돌 위에 새김, 1988
10. 고영훈, , 118×166.5cm, 천과 종이에 아크릴릭, 1988
11. 고영훈, <한국사>, 210×301cm, 천에 아크릴릭, 1991
12. 고영훈, , 185×518cm, 천과 종이에 아크릴릭, 1992
13. 고영훈, <생명-달항아리>, 162×128cm, 플라스터와 종이에 유채, 2002
14. 고영훈, <자연법-봄1>, 101×198cm, 종이에 아크릴릭, 2005
15. 고영훈, <목신-목동자상>, 228×1139cm, 플라스터와 종이에 유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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