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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 / 치유미술을 향하여

김영호

한오 / 치유미술을 향하여


“제게 그림 그리기는 우선 제 자신을 치유하는 가장 친숙하고 좋은 방법이고,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제가 가졌던 느낌이 일부나마 전달돼 그들의 마음과 정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작가노트)

미술의 프론티어 정신을 표방하며 함께 몰려다니던 1980년대 중반의 기억을 뒤로하고 25년 만에 만난 한명호는 그림을 자기 치유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화두를 꺼냈다. 김포의 녹지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 들어선 나를 반겨 포옹하며 그는 1993년 이래 한동안 화단과 인연을 끊고 지냈으며 이름도 한오로 바꿨고 독학으로 동양학을 공부하며 치료사로서 활동해 왔음을 털어놓았다. 한동안 자신도 몹쓸 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었고 이제 완전히 치유 되었으며 이후 한 지체부자유 소녀를 수양딸로 삼아 치료하고 있는데 이제 거의 정상인에 가깝다고 내게 소개한다.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서 과연 사반세기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열혈 청년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섬세하고 내향적인 눈빛에 이상주의자의 호방함이 함께 어우러진 특이한 모습의 청년이었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작업실을 둘러보니 벽마다 세워진 그림들은 나이프로 두껍게 밀어올린 물감과 거친 터치로 일관된 녹색의 향연이다. 창 너머 야산에 펼쳐진 정오의 빛을 건네받은 이미지들은 실내를 화원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나는 잠시 혼돈에 빠졌다. 이전에 그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던 방황과 도전 그리고 실존적 성향의 기운은 간데없고 그의 화실은 평온한 화초 이미지를 담은 서정적 풍경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표현주의자의 창조적 충동이 거세된 것일까? 아니면 역설적이게도 그림은 그의 방황과 도전으로 점철된 삶을 순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을 그에게 서두르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10년은 나 역시 한국화단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고 다시 흐른 15년이 커다란 공백으로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치유적 효과는 오래전부터 전해온 화두다. 비극이 영혼을 순화하고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를 해소한다는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미술치료에 자양분을 공급해 왔다. 미술은 심상의 표현이자 시각 이미지로 구현되는 활동이다. 그것은 또한 소통의 방식이며 무엇보다 창조본능의 발산이라는 점이 치유효과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미술치료는 생각 이상으로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그 대상은 정신장애뿐만 아니라 신체장애까지 포함되며, 그림의 치유효과란 약물처럼 효능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장애 개선의 진행상태를 체크하는 도구로 그림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복합성으로 인해 한오가 언급한 미술치유의 정체는 아직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한오의 경우 그림 그리기가 ‘자신을 치유하는 가장 친숙하고 좋은 방법’이라는 고백은 그 스스로가 치유의 주체이자 동시에 치유의 대상이라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이는 결국 그의 그림을 해석하는 원리도 치유의 문제와 연관해 다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화두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치유의 문제가 오늘날 미술작품의 창작과 비평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 활동을 재개한 2009년 이래 한오가 천착한 소재는 숲이며 첫 개인전의 전시공간을 나무그림으로 채워놓았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백호, 황소, 말, 닭 따위의 짐승과 인간이 등장하고 이번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꽃의 이미지로 일관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 세속적이면서 범상해 보이는 소재의 대부분은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터부시 되어버린지 오래된 것들이다. 그러나 미술사의 시효가 지나버린 소재를 선택하게 된 작가의 논리에는 놀랍게도 그 특유의 공격적 전략이 숨겨져 있다. 가령 그가 작품 제목으로 설정한 ‘투우(透牛)’의 투자는 ‘통할 투’로서 대상의 외관을 뛰어넘어 본질과 통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차용된 것이다.

수많은 화가들의 손에 의해 그려지고 이발소에서 주점에 이르는 장소에 걸려 소비되어 온 범속한 소재를 다시 끌어들인 것은 무겁고 장대한 소재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단의 전략이다. 그에 있어 숲이나 꽃은 물이나 공기와 다르지 않으며 짐승과 인간 역시 불이나 흙과 다르지 않게 범속하지만 모두 자연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한오의 작품에서 소재주의란 애초부터 적용될 수 없다. 그는 특정 소재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서 화면에 소재를 부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오는 초목수인(草木獸人)의 외관을 넘어선 어떤 세계를 표상하려 한다. 그 세계는 세잔느가 액상프로방스의 평범한 풍경을 소재로 삼아 추구했던 자연의 질서이거나 가변적 형상 너머에 숨겨진 항구적 본질의 영역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철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 세계란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이 항시 변화하는 현상계를 초월해 만물의 근원으로 제시한 이데아와 맥을 연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한오의 작품에 등장하는 백호는 플라톤의 정원을 거니는 생명의 이미지이며, 황소나 말 그리고 닭 역시 표피적 현상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절대를 지향하는 영적 에너지를 드러낸다. 그 ‘생명의 이미지’나 ‘영적 에너지’의 실체는 신의 속성이 그런 것처럼 실체를 파악하기 불가능한 대상이지만 예술적 행위와 형식에 의해 구현될 수 있다. 미술은 이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형식으로 현현해 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본질과 영적 에너지에 상통하려는 한오의 노력은 대단히 회화적이다. 그는 전통적 손의 노동을 통해 칠하고 긁어내고 그리는 행위에 충실하며, 그의 화면으로 초대한 초목이나 짐승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제삼의 이미지로 변주 시키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농부가 밭을 일구는 노동의 기술이 생산적인 효과를 발생시키듯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결국 한오에 있어 미술치유의 문제는 사물의 본질 직관과 표현 행위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된 작품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난다. 그 과정에 대한 연구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한오의 작품세계에 대한 비평적 연구의 단초가 될 것이다. 아울러 치유의 주체로서 한오가 실행하고 있다는 치료의 기술과 동양학의 원리 그리고 그가 그림을 재개한 후 겪어온 치유의 체험담도 그의 그림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개인전에 출품된 그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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