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현수 / 빛의 구조와 정신을 찾아

김영호

박현수는 빛을 색으로 변주하는 회화예술의 전통적 형식을 새롭게 실험해오고 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숨쉬는 어떤 이미지를 추상적 기호와 공간 조형으로 표상해 내는 것이다. 단조로운 형태의 색면에 표상된 세밀한 빛의 구조는 명상적이고 신비로운 감흥을 자아내면서 정신적 차원의 영역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그리고 작가는 기호와 공간으로 구현된 정신성의 존재가 자신의 추구해야 할 회화예술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빛과 색 그리고 정신이 지속하는 순환 사이클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자각하는 것이다.

빛의 표상 방식은 회화예술이 지켜온 오래된 과제였다. 중세 종교건축을 장식했던 스테인글래스에서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광선의 분해와 방사 현상에서 사물의 형태와 색채의 리듬을 파악했던 레이오니즘(Rayonnisme)에서 물리적 빛을 조형의 매체로 이용한 라이트아트(Light Art)에 이르기 까지 빛은 선적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신으로서 빛은 언제나 물질로서 색의 변주에 힘입어 시간과 공간을 드러내면서 미술에 다양한 경향의 양식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박현수의 경우 빛의 영감은 여행 중에 경험한 기억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의 미국 체류시절에 들렀던 그랜드케니언의 거대한 암벽에 비친 빛의 파노라마에서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빛이 끄집어내는 광대한 절벽의 결들은 시생대의 화석들을 노출시키면서 시공간을 움켜쥐는 듯한 전율로 몸을 떨게 했을 것이다. 비행중인 여객기의 창문너머로 펼쳐진 새벽의 여명처럼, 아니면 우주공간을 신비로 물들인 황혼처럼 무한공간으로 흡입하는 빛의 파노라마는 광휘를 넘어선 감흥의 원천이었다.

작가의 실험은 빛이 아닌 빛의 표상형식에서 개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빛의 표상형식이란 블랙홀과 같은 토운의 색면을 설정하고 그 안에 무수한 종류의 추상적 기호를 새겨 넣음으로서 자신의 어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업 순서를 보면 우선 빈 캔버스 전체에 유채 물감을 드리핑 기법으로 뿌려 화려한 바탕을 조성하고 건조시킴으로서 초벌작업을 마무리 한다. 그 후 작가는 화면 전체를 분할된 색면으로 뒤덮고 그 색면이 마르기 전에 고무칼을 이용해 물감을 깎아내며 추상적 기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무칼의 흔적을 따라 떠오르는 화려한 색상의 기호들은 새로운 비주얼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깎여 파인 기호들은 캔버스의 표면 아래층에 숨겨진 화려한 색들을 발본해 눈을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영롱한 빛의 효과는 그의 기호들에게 정신적 환희를 제공하는 원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빛의 정신성이다. 박현수의 작품에서 파생되는 명상적이고 신비로운 공간감이 만들어내는 효과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박현수의 작품은 빛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의 표상방식인 빛의 구조를 통해 비물질적인 아우라를 야기시킨다.

박현수가 연출해내는 빛의 아우라는 마치 우주공간을 점하고 있는 은하계의 환상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몇몇의 시리즈에서는 종교적 향기를 뿜어내는 청동향로의 환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은하계나 종교적 향기의 감미로움을 물론 색의 표상으로부터 야기된 것이고 색의 표상이란 곧 구조화된 빛을 뜻하는 것이고 보면 그의 개성은 단순히 서술적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시각을 빨아들이는 듯한 블루와 레드의 색면 위에 조성된 빛의 구조는 어느덧 언어를 넘어 감각의 영역으로 보는이를 이끈다.

박현수의 작품은 서로 다른 주제에 의해 차별적으로 표상된다. 우리는 그의 작업이 서양회화의 물질주의적 회화사의 노정에 기반하면서도 동양적인 명상과 신비주의 전통에 끈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재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추상표현주의의 드리핑에서 색면추상에 이르는 미술의 형식이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표상형식에 흐르는 서정은 기와 울림으로 충만 되어 있다. 한마디로 박현수의 작품은 서양의 형식에 깊은 동양적 서정을 융합시킨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현수가 시도하는 빛의 표상작업은 다양한 시리즈로 나타난다. 필자는 2008년 진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을 계기로 정리한 서문에서 그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네 개의 시리즈로 분류한 바 있다. 작가가 ‘C’로 표현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해 <리듬>, <서어클>, <바디> 시리즈가 그것이다.

우선 <커뮤니케이션> 시리즈는 화면 전체를 작가 특유의 작은 기호들로 채워 배열해 놓은 작업이다. 다양한 컬러를 드리핑 기법으로 처리해 건조시킨 뒤 화면 전체를 하나 혹은 몇개의 색면으로 다시 덧칠하여 물감이 마르기 전에 기호적 형상으로 긁어내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고무칼로 긁어내어 바탕을 다시 나타내게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크래치 기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복잡한 구조를 띠게 되지만 박현수의 작업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법으로 양식화 되고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리듬> 시리즈는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빛의 공간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이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성이 돋보이는 시리즈이며 원형 창문은 앞선 스크래치 기법으로 바탕의 무지개 빛 색면을 드러내게 하였으며 원의 내부 공간은 수평적 구조를 지닌 다양한 색채의 빛으로 채워져 있다. 리듬 시리즈 역시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고 있는데 그 특성은 빛과 색채를 통해 시각적 음감을 드려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세 번째로 <서어클> 시리즈는 말 그대로 원형 혹은 타원형으로 설정된 색면을 배경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호들을 무중력 공간에 부유하는 유물의 파면들처럼 배치한 작품이다. 배경 이미지는 그 위에 표상된 기호 이미지를 받쳐주는 바탕으로 보이기도 하며 정신의 그림자 이거나 핵의 구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어클> 시리즈의 표상방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고무칼로 벗겨낸 기호의 표면이 발산하는 무지개 빛 컬러는 마치 금관이나 향로 등의 전통적 금속공예 유물의 아름다움을 연상케 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바디> 시리즈는 말 그대로 몸의 실루엣을 암시하는 색면을 설정하고 그 표면에 작가 특유의 색환을 배치한 것이다. 이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추상적 패턴에 구체적인 사물을 암시적으로나마 배치시키려는 의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리즈는 어쩌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벗어나 통합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관점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추상이 가지는 비현실성을 극복하는 한편 예술과 삶의 리얼리티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여겨진다.

이상과 같이 박현수의 작품에서 표상되는 빛의 구조와 정신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그 형식은 스크레치 기법에 의한 색면의 화려함을 공통분모로 삼아 일관성을 보인다. 기호가 지닌 이중적인 의미구조를 빗대어 설명하자면 그의 작업은 기표(Signifiant)로서 드리핑, 드로잉, 배열, 반복, 패턴 따위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것이 품은 기의(Signifié)들은 빛, 공간, 그림자, 정신, 풍경, 자연 그리고 핵 따위의 의미들로 대별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일관성과 형식적 실험의 다양성은 박현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이며 그의 작업에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요인이라 생각된다.


-------------------------

박현수는 광주에서 태어나 중앙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1997년 미국으로 건너가 순수회화 분야에 오랜 전통을 지닌 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다시 마쳤으며, 졸업 후 미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다 2007년 귀국하여 현재 한국에 지반을 두고 미국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국내외에서 1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출처 : 미술평단, “30인의 작가 30개의 시선”,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11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