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정미- 자연과 조각 사이

박영택

매번 새로우면서도 너무 오래된 자연은 인간의 손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結晶들을 안긴다. 감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자연은 작가들의 손을 무디고 곤혹스럽게 한다. 조각가의 훈련되고 단련된 손이라도 자연 앞에서는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마냥 궁핍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손은 풀 한포기, 돌 하나, 과일 한 알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절망과 안타까움은 결국 자연의 피부에 붙어나간다. 자연이 만들어낸 생명체를 짐짓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자연을 모방하다 그 자연으로부터 이탈해 인공의 사물로 들어간 현대미술의 궤적 아래서도 자연은 여전히 모든 미술활동의 중심에서 소외된 적이 없다. 인간은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자연계 안에서 여전히 창조의 의미를 헤아릴 것이다.




김정미의 작업실은 자연 속에 있다. 자연의 일부로 편입해 들어가 그 언저리 어느 곳에 앉아 눈이 부시게 하얀 대리석을 쪼아 자연을 모방한다. 아니 자연을 해석하고 물어본다. 혹은 자연 앞에서 깨닫고 느끼고 그래서 부풀어 오른 감정과 생각의 편린을 기록한다. 작가의 작업은 자연 속에서 살다가 문득 떠오른 단상, 자연스레 삶의 반경에서 건져 올린 인상, 주변 환경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긴 그림자 같은 것이다. 작업의 과정과 시간, 노동 또한 자연이 생명체를 잉태하고 거두어가는 과정과 동일시된다. 작가는 조금씩 돌의 내부로 들어가 과일의 충만한, 단단한 구형을 매만지고 잎사귀 하나씩을 틔우고 깊고 까마득한 물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자연의 저쪽은 너무 깊어 가늠하기 어렵고 그것이 빚어낸 형태는 너무 완벽해 매순간 절망을 안기지만 동시에 경이로움과 신비, 영성적인 느낌을 안기기도 한다. 모든 인공의 것들이 감각과 욕망, 사유를 관리하는 시대에 여전히 자연에서 숭고함과 감동을 만나고 헤아리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물질과 사물화의 과정에서 거리를 두는 일이자 오랜 시간동안 그것과 함께 살아온 인류의 지혜와 마음을 새삼 추체험 해보는 일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있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보다는 발견해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술은 인간이 활동이지만 그 궁극의 목표는 자연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다. 동양에서 예술이란 결국 자연이 지닌 지극한 조화와 불변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조형화하는 일이자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형상을 인위에서 출발해 무위의 경지로 옮겨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모순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모순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자리한다. 자연을 닮고자 열망했던 것이 고대 동양인의 삶이자 예술이었기에 사람들은 돌과 물, 식물을 완상하고 이를 반복해 형상화하면서 자기 생을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현된 예술은 자연과 구분 없이 자존한다. 좋은 예술이란 풀처럼, 물처럼, 돌처럼 자리하고 바람처럼 기꺼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술이란 소멸의 지점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작가가 작업실/자연에서 한 일은 결국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미를 안타깝게 더듬는 일이다. 그것은 촉각적으로 자연을 쓰다듬고 애무하고 어루만져 그 형상에 기생하는 것, 그 형상을 빌어 시적인 문장을 조각화 하는 일이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을 살아낸 경험들이 고스란히 작업으로 부화되었다. 작가는 커다란 자두 4알과 나뭇잎, 수면에 퍼지는 동심원을 돌로 재현했다. 생명체가 순백의 돌로 응고되어있다. 이 식물과 물은 총체적인 자연의 이미지에 해당할 것이다. 수 억 년의 시간을 내장하고 있는 돌의 내부가 절개되면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과정 같기도 하다. 돌은 아늑한 시간의 주름과 그가 겪어낸 자연의 변화를 안으로 단단하게 응축했다. 과일 역시 동일하다. 이 자두는 모든 식물, 과일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그것은 작고 단단하며 완벽한 형상을 갖추었다. 여리고 달콤한 속살을 부드러운 껍질로 완강하게 두른 과일은 작은 씨앗이 부풀어 올라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이자 자기 생명의 복제수단을 보호하며 그 생명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장식(파레르곤)으로 풍만하다. 과일의 달콤한 살과 부드러운 향기, 아름다운 외형은 식물의 자기번식을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과일을 거두고 가꾸고 번식한다. 새들 또한 과실을 쪼아 먹어 그 씨앗을 사방으로 퍼트린다. 새가 인식하는 색은 붉은 색조뿐이라 과일들은 대부분 새를 유인하는 그 색으로 자신을 알린다. 자두 한 알에도 우주자연의 신기한 섭리가 가득하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그 자두에서 관능과 미의 핵심을 엿본다. 부드러운 형태, 움푹 패인 꼭지, 유두처럼 봉곳하게 솟은 부위, 섬세하게 갈라진 틈 등은 다분히 에로틱하고 성애적이기도 하다. 아울러 여성으로서의 자기 실존의 이미지를 그 대상에 은밀하게 투사한다.

또 다른 작업은 사각형의 대리석 표면이 조심스레 융기하면서 잎사귀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돌의 피부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잎과도 같다. 방향을 달리해 드리워진 잎은 잎맥을 손금처럼 보여주며 자기 생애를 증거한다. 높이를 달리해 부감된 잎사귀로 인해 그늘이 져서 그 하나의 잎들의 실존적 무게와 존재감이 극화된다. 또는 사각형의 박스형의 모서리에 드리워져 있어 나무에서 분리된 잎들이 기꺼이 대지 속으로 소멸되기 직전의 처연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사각형의 박스는 조각의 존재론적 조건을 밀어젖힌 현대조각이 도달한 최후의 지점인데 그 자리에서 다시 나뭇잎 하나가 올려져있음은 서구조각사에 대한 작가의 모종의 인식, 조각관을 은연중 그 ‘에지’(edge)위에서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또한 납작한 대리석 표면 위로 동심원이 퍼져있는 이미지는 돌의 물성에 일루젼을 얹혀놓아 하나의 풍경으로 대면시키는 작업이다. 수평의 시선 아래 바닥과 일치하는 이 풍경은 보는 이들을 저 안쪽으로 유인하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물의 내부와 질료성의 액체 내부가 모든 것을 삼키고 여운처럼 파문을 표면 위에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작가가 물에서 배운 침묵과 관용, 포용과 이해의 정도를 암시한다. 이것은 동시에 내밀한 심리적인 잔상, 개인적인 경험이나 환영의 상징이 되고 있다.

식물과 물, 돌은 작가를 둘러싼 환경이자 자연스레 눈에 들어와 가슴에 스민 대상들이다. 그것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자연은 여러 계절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뜨거운 여름날과 거센 비, 혹독한 추위와 눈들이 마구 덤빈 작업실에서 작가는 그 자연과 힘겹고 정겨운 삶을 보냈고 그런 흔적들이 자연스레 이번 작업으로 나왔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작가의 일상의 반영이자 자연과 조각 사이에서 빚어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