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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숙-민화, 반복과 차이

박영택

민화의 모든 도상들은 가장 인간적인 욕망의 구현을 소망하고자 했던 소박한 상징들이다. 그 속에는 전통사회의 일상적 삶의 공간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평생을 안락하게 보내고자 했던 생의 열망이 촘촘히 깃들어 있다. 일종의 유토피아, 파라다이스가 그 안에 온전히 서식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미술은 인간적인 소망과 기원, 이미지를 통한 보이지 않는 모종의 힘에 대한 열망 등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미술이 본질적으로 소통에의 욕망이자 수단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오늘날 이곳의 작가들에게 그 민화는 고갈되지 않는 샘, 작업에 대한 영감과 새로운 해석을 무한하게 안겨주는 보고에 다름 아니다. 여러 의미에서 민화는 오늘날 또 다시 새롭게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열린 텍스트가 되었다. 단순히 도상의 장식적 차용이나 한국적 작업의 당위로 삼는데 머물지 말고 그 본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오늘날 미술의 결핍을 극복하고 전통미술의 진정한 모색이란 의미에서 다시 읽어야 할 그런 텍스트란 인식이 싹트고 있다는 생각이다.





알다시피 민화는 조선 시대에 궁중과 사대부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생활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벽사기복의 소망을 담아내기 위해 제작되었던 실용적인 그림을 지칭한다. 민화는 감상위주의 정통회화와는 달리 당시 이 땅에 살았던 옛사람들의 생활관과 미의식이 진솔하게 반영되어있고 무엇보다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림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고대적 신앙, 한국의 기층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모든 민화를 일관하는 기본 사상은 바로 ‘현세복락주의’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생명지속’과 ‘안락과 풍요의 유지’가 그것이다. 따라서 민화는 고대인들이 믿었던 각종 동식물들이 우상으로 등장하며 그 신들의 신화가 기본적인 언어로 통용되어 구성된 그림이다. 장수, 다산무병, 부부금슬, 부귀, 출세 등을 갖다 주는 신들을 전부 모심으로써 현세의 복을 모조리 누린다는 생각에 따라 사슴, 학, 해, 거북, 소나무, 불로초, 바위, 물, 산, 구름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열망하는 그림이자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의 적극적인 시각화다. 그런데 바로 그런 민화가 지금 새삼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현경숙은 전통 민화를 반복, 재현하는 한편 이를 바탕 삼아 새로운 문맥과 배열 아래 민화를 환생시키는데 관심이 있다. 원본을 충실히 모사하는 작업을 한축으로 하고 이후 그 도상들의 배치를 자유롭게 풀어 자신의 이야기 구조 안으로 통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민화의 도상, 의미의 기호들을 가지고 자신의 생의 기원을 문장화한다. 작가가 기술한 텍스트는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그들도 선인들처럼 이 풍진 세상에 무병장수와 복락을 누리고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다. 캔버스에 아크릴릭으로 그려진 산과 바위, 파도와 연꽃 그리고 물고기 등이 서로 얽혀서 모종의 장면을 연출해주는 한편 여전히 그 도상들은 전통사회를 살았던 이들의 이미지를 빌어 소망했던 주술성 또한 환기시켜주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그 도상들은 자의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낯선 풍경을 만들어 보인다. 정해진 규범에서 벗어난 민화, 이질적인 재료에 의해 그려진 기이한 민화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분명 민화가 지닌 소박하고 미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고 그 도상의 의미화 역시 저버리지 않고 있다. 현경숙은 민화에서 즐겨 쓰이는 도상들을 해체하고 다시 편집해서 독특한 판타지 풍경을 전개한다. 특히 주목되는 작품은 광활한 공간 저 안쪽으로 기암을 두른 산이 위치해있고 하단에는 요란한 파도가 꿈틀거리는데 그 사이로 태양처럼, 달처럼 부풀어 오른 연꽃이 부유하는 그림이다. 마치 사이버 공간을 무대로 전통 민화의 도상들이 춤추듯, 방황하듯 혹은 정처없이 떠도는 듯한 이 연출은 오늘날 민화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은유 같기도 하고 동시대 디지털 문화 속에서 해석된 민화를 보는 듯 하다. 나로서는 이러한 설정이 좀더 적극성을 띈다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특히 연꽃의 처리와 묘사가 관능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연꽃은 여러 의미망을 두른 기호이지만 동시에 여성적인 상징으로도 팽창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현경숙의 그림은 전체적인 구성과 이미지를 민화의 형식에서 차용해 온 작업이다. 이른바 민화의 형식이 그림의 한 영역으로 들어와 약간의 변주가 이루어진 경우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민화를 독립된 회화적 이미지로 추출해내고 그 주술적 이미지와 색채세계가 유지되면서도 그것이 순수한 조형의 체계 안으로 수렴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작가가 재구성하는 민화는 무엇보다도 민화가 지닌 본래의 의미와 뜻/소망을 동시대의 미술언어 안에서 여전히 소통되는 그 무엇으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근자에 젊은 작가들은 민화라는 텍스트를 흥미롭게 재구성, 다시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과다한 고민대신 원본(전통)의 자유로운 참조와 이에 대한 독창적 변역을 과감하게 구사하고 있는 것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태도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화 혹은 전통이미지라는 텍스트들은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그에 따라 이 복수적 텍스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들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된다. 그에 따라 당대인들의 간절한 생의 염원을 드러냈던 조선시대의 민화는 젊은 작가들에 의해 현대인들의 삶과 욕망에 대한 표상으로 재구성된다. 우리 문화 속에 내장되어 온 시각적 텍스트들이 당대 텍스트들과 마구 뒤섞이면서 작품은 다차원의 공간으로 재영토화 하고 그 의미는 무수하게 복수화 되어 산개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어느 지점에 현경숙의 작업 또한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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