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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언론사, 방송사들 현란한 선전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

박영택

[커버스토리]‘한탕’ 노리는 블록버스터 전시
대형 언론사, 방송사들 현란한 선전에 비해 볼거리는 빈약

2008 01/08 뉴스메이커 757호


방학 때가 되면 어김없이 국공립미술관에서 외국의 명화 전시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이른바 대박을 터트리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그 ‘한탕’을 노리고 마련한 전시(블록버스터 전시)들이 줄을 잇는 것이다. 물론 ‘다다익선’이라 하여 없는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전시는 현란한 선전과 호들갑스러운 광고에 비해 볼거리가 빈약해서 실망을 안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사실 그 전시들은 한결같이 대형 언론사나 방송사가 주최하거나 후원하는 것이다. 홍보가 결정적이기에 그렇다. 언론사들이 전시를 통해 장사를 하고자 하는 것이 흉볼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전시의 상당수가 미술관 측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마련한 기획 전시라기보다 전문기획사의 장삿속과 언론사의 이윤창출에만 의존해서 급조되거나 패키지 차원에서 받아들여온 전시로 채워진다는 것이 아쉽다. 미술관 측은 다만 대여전시장으로 전락했고 입장료 수익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만족하고 있다.

물론 전시의 질이 높거나 볼거리가 풍부하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 못해서 보고 나오면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대부분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내 기억에는 대부분 전시가 그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유명 작가의 이름을 거론한 전시인데도 가서 보면 기껏해야 소품 몇 점만 초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들로 채운 경우가 그것이다. 회화나 조각 대신 판화나 드로잉이 대부분이거나 더러 복제품인지 오리지널 작품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물론 외국 유명 작가의 진품을 상당수 빌려온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해가 간다. 엄청난 비용이 들 뿐 아니라 우리의 미술관 내부시설이 그런 작품을 수용하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선뜻 좋은 작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술관측 대여전시장으로 전락

그러나 서양의 유명 작품들을 전시하는 일은 갈수록 늘어나고 대형화하고 있다. 이전에는 기껏해야 피카소(그것도 대부분 판화)나 샤갈, 달리 정도였다면 근래에는 마그리트, 렘브란트와 모네, 워홀, 고흐 그리고 바로크 회화와 네덜란드 회화, 인상파 화가 등으로 폭도 넓혀가고 작가군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많이 알려진 작가의 지명도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이런 작가들의 진품을 이 땅에서 직접 본다는 것도 커다란 진척이라면 진척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대는 상당수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외국의 유명 미술관을 순례하고 그에 대한 정보도 비교적 익히 알고 있는 형편에 비하면 그 작가들이 너무 고정적이고 틀에 박혀 있다는 인상이다.

전시를 기획하는 측에서는 장사가 되려면 우선 그 이름, 명망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명망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반인들에게 미술이란 학창 시절 일주일에 한 시간뿐인 미술시간, 그리고 얇은 미술교과서에서 만났던 작가와 작품들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상식이 평생을 간다. 일생을 통해 미술에 대한 상식과 이해를 넓히거나 체험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전시장에 간다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서 최초의 사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평생 전시장을 가보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전시장 체험은 그렇다 치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작가 역시 학창시절 미술 교과서에 등장한 이들이 거의 전부다. 김홍도나 정선에 앞서 언급되고 각인된 이들이 바로 다 빈치, 피카소, 샤갈, 고흐와 인상파 화가들이다. 이것은 서양미술사만 공부하고 익혀야했던 우리 미술 수업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교과서에 등장한 화가의 전시를 해야 장사가 된다.

전시장은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이름을 확인하러 가는 일이 되었다. 전시장을 찾는 것은 기존의 명망성을 확인하기 위해, 미술의 상식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그 증거 자료를 위해, 나도 고흐를 보았고 피카소를 봤으며 샤갈까지 봤다는 식으로만 강제된다. 마치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이름난 풍경, 장소 앞에서 악착스레 기념사진을 촬영하고자 하는 욕망과 다를 바 없다.

전시장에 간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상식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게 아니라 일종의 모험을 하러 가는 일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눈과 감각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동일한 육체지만 그토록 저이의 육체와 나의 육체가 다르고 다른 만큼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러 가는 일이다. 저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 느낄 수 있고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놀라움을 접하러 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시라고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다만 고흐가 왔고 샤갈이 왔으며 칸딘스키가 왔으니 늦기 전에 빨리 와서 확인하라는 명령 같은 말들이 떠돈다. 미술 교과서에서만 보아온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라고 재촉한다. 돈을 들여 확인증을 발급받으라고 한다. 지금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의 상당수가 그 확인증을 파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기획사와 언론사 들이 미술관이란 장소와 공간을 이용해서 말이다.

교과서에 등장한 화가만 장사돼


전시를 본다는 것은 직접 작품 앞에 서서 온 몸의 감각밸브를 죄다 열고 반응하고 기다리며 읽고 느끼고 생각에 잠겨야 하는 일이다. 전적으로 자신과 작품이 만나서 파생되는 사건이 작품을 보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마음의 여유로움과 풍만한 감성으로 찰랑거리는 몸이 유지되어야 한다. 놀러가듯이, 모험을 하듯이 다니는 일이며 빽빽이 꽂힌 책 사이로 미끄러지면서 보고 싶은 책을 골라 읽는 도서관의 스릴과 공들여 문장과 문장을 횡단하는 즐거운 독서와 어느 순간 숨이 멈춰서 적막과 충격이 관통하는 체험이 동시에 교직하는 그런 경험이 전시 관람이다. 동시에 무수히 많은 작품을 보고 그 작품 앞에서 미술에 대한 혹은 우리네 인생과 연루한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보는 전시 관람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공부고 경험의 장이다.

외국의 유명 작가 작품을 자주 선보이고 논의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전시는 이곳에서, 현재의 미술과 관련되어 계속 새롭게 환생되는 문맥 안에서 의미를 지녀야 한다. 의미를 만들고 담론을 만들고 전시를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풍성한 의견들이 개진되어야 한다. 그것을 만드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많은 전시는 미술관을 배제한 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윤을 거둬들여 수익을 맞추어야 하는 기획사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이 불우하다. 그들에게 전시의 의미와 담론의 창출은 다만 성가시고 버거운 일일 뿐이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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