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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선-진정한 삶의 자유를 찾는 사진

박영택

있는 그대로를 찍어내는 간결한 스트레이트 사진과 엄정한 시선, 그리고 다소 까다로운 조사와 섭외를 거쳐 이루어지는 사진적 과정, 그로인해 구축되는 아카이브적 사진세계는 김옥선의 사진적 특성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여성의 몸과 공간, 가족관계와 집, 국내에서 국제결혼 커플들이 겪는 문화적 혹은 남녀간의 성차에서 오는 갈등 및 동성애 커플, 젠더문제와 정체성, 주체 그리고 한국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사는 외국인을 통해 정주와 표류, 이주와 방랑, 유목 등의 주제를 주로 찍고 있다. 그것은 다분히 동시대의 문제적인 이슈이자 우리 사회의 민감한 주제들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그 문제는 작가 자신의 문제의식이기도 하고 그녀 자신의 삶에서 파생된 자연스런 질문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문제이자 사회인 문제는 그렇게 중첩되고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포개져있다. 그 어딘가에 그녀의 사진이 초점을 맞춘다. 차갑고 즉물적인 응시의 시선이 누군가를 호출한다.


그녀의 첫 작업은 1996년 woman in a room시리즈다. 일상적 삶에서 갑자기 전라가 되어 직립한 여성들은 기존에 남성들에게 보여질 때 취하는 포즈와는 다른 포즈로 관자, 카메라를 본다. 정작 그 시선과 만날 때 당혹스럽고 불편한 것은 우리들이다. 기존 사진이나 회화에서 보았던 누드와는 전혀 다른 식이다. 꾸미지 않은 몸과 시선으로 정직하게. 다소는 뻔뻔하게 카메라를 본다. 그로인해 남성들이 상상하는 여성의 몸과는 다른 몸들이 전시된다. 이 나신들은 거부하기 어려운 힘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사진 속 모델들은 심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이상화된 여체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 집안에서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여성’의 몸 그대로다. 부분적으로 수술자국과 늘어지고 비대한 살/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여성들은 마치 마네의 올랭피아가 처음 선보였을 때처럼 이상적인 누드에 길들여졌던 이들에게는 혐오스럽거나 다소 끔찍하거나 너무나 당황스런 몸들일 것이다.

기존의 누드(이상적인 , 남성이 상상력에 의해 각색된 몸)들이 여성의 몸을 일상의 공간과 삶으로부터 유폐시키거나 배제시켜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들은 카메라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맨 몸을 드러내고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사실 그녀들은 누군가의 시선이 없다면 늘상 그렇게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더러 벗은 몸으로 활개치고 다닐 것이다. 그 배경은 그녀들이 사는 공간의 장소성을 보여준다. 거실과 방안, 주방 등을 등지고 서있다. 그 공간이야말로 여성들의 실존적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그녀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장소이다. 그 공간의 인테리어와 이러저러한 사물들은 고스란히 그녀의 삶의 실존을 낱낱이 증거한다. 사진 자체는 일체의 수식어를 배제한 개체의 가장 정직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모델이 된 여성을 다만 차갑게 응시한다. 이 사진은 오랫동안 예술사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체를 심미적인 대상으로 이상화하거나 현대 사회에 범람하는 광고나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성적인 대상으로서 물신화하고 있지 않다. 남성의 시선과 논리가 아닌 ‘여성의 시선’으로 찍고 있는 여성의 벌거벗은 몸, 생활하는 몸 그 자체인 것이다. 여성에게 부과되는, 남성에 의해 길들여진 여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적나라한 삶의 공간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함으로써 남성들로 하여금 이상화되거나 왜곡된 여성적 몸의 관념과 신화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시리즈가 나온다. 이 시리즈는 공간 속의 여성의 몸과 가족관계를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일정한 계층 속에 속하는 가족을 대상으로 삼은 이 사진은 제주도에서 생활하면서 파생한 작업이다.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층위에 속하는 제주대학의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가족들의 초상을, 그녀는 사진으로 찍었다. 그것은 분명 가족사진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약간의 균열이 일어난다. 작가는 ‘똑같은 계층에 속하는 그들이 어떻게 균질화 된 시각적 환경’을 이루고 살아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서 사람의 몸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인테리어 등의 공간요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이전 작업에서 엿보이던 방안에서의 누드 사진에서의 관심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작가는 비교적 유사한 계층들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그들의 의복과 차림새,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식탁과 방안, 거실의 장치와 인테리어의 구조화 및 그네들이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부려놓는 문화적 기품들이 무엇인가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마치 인류학자나 임상학자의 시선처럼 말이다. 그것은 거의 유사한 패턴 속에서 미세한 파열음을 자아낸다.

제주대학에 재직하는 교수들의 아파트 거실 풍경은 비교적 잘 정돈되어 보이고 깔끔하며 어딘지 차분하고 더러는 경직되며 다분히 모범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교수라는 직업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울 만큼 배우고 아울러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이들에게 자식을 가르치고 집안을 이끄는 것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교육적 내음이 짙게 풍긴다. 그런 면에서 일반적 가정에서 보는 정신 산란한, 조악하고 위악적인, 키치적이고 정신분열증적인 인테리어와는 조금 다르다. 그것보다는 깨끗하고 나름의 품위가 ‘미니멀’하게 서려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해 보이는 이 반복적인 공간 구조는 상투적이거나 틀잡힌 삶의 진부함을 설명하는 단서로 작동한다. 복사본이나 키치보다는 직접 그린 실제 그림들과 십자가 등이 걸려있고 잘 청소된 방안 풍경 및 ‘범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차분하게 식탁에 둘러앉아있다. 옷들도 정숙하게 차려입어 준비된 자세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들의 취미생활과 문화적 정서나 기호, 교양의 정도를 읽을 수 있고 더듬을 수 있다. 사진은 그러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들의 이러한 거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필요하고 자연스레 연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인테리어이고 풍경이자 파사드’다. 사진 속 가족들과 그들이 사는 집안 풍경은 자신들의 신분과 계층적 위계를 과시하거나 드러내는 한편 그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의식적, 무의식적 주물로 단련된 성형이라는 얘기다. 김옥선은 바로 그런 부위를 예리하게 들추어낸다. 앞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가정이란 다분히 비밀스럽고 내밀하고 가족만의 관계로 제한되는 공간이 갑자기 환한 공적 영역으로 드러나 버리고 그런 과정에서 곤혹스런 시선의 충돌이 벌어진다. 분명히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시선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의 공적인 영역으로의 느닷없는 대면으로 인해 다소간 당황스러움을 피하기 어렵다. 이들이 공들여 꾸미고 조심스레 연출한 포즈는 행복하고 자랑스런, 모범적인 가족관계임을 증거하는 지표이지만 동시에 그 지표 아래 잠복한 형언하기 어려운 가족 간의 갈등과 애증, 개별적인 사연들은 조심스레 은폐될 수 있음을 창백하게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기존의 가족사진과는 또 다른 층위에서 가정/가족의 틈을 벌여놓는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사람과 집, 공간과 계층에 대한 관심은 보다 직접적인 자기이야기로 옮겨간다. 알다시피 김옥선은 외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현재 제주도에 살고 있다. 그녀는 외국인 남편과의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자신과 동일한 입장에서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커플들을 찾아나섰다. 이른바 시리즈는 흔히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란 수식어와 함께 이상하고 야룻한 시선으로 보는 일반 사람들의 시선을 문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국제결혼이란 것인데 사실 국제결혼이란 말 자체가 좀 우스꽝스럽다. 국내결혼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국제결혼보다는 그저 국적이 다른 남과 여가 일반적인 커플들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기 어렵다. 순수혈통과 민족주의에 대한 강렬한 신념을 이데올로기로 가지고 있는 이곳에서 외국인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여자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순수혈통을 자랑하는 한국인도 알고 보면 30여 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착잡한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김옥선은 본인이 직접 겪은 타자의 시선과 소외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동일한 계층으로 전이한다. 외국인과 결혼해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초상을 찍은 것이다. 사실 이 작업은 작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국제결혼이 안고 있는 차이들은 소위 말하는 문화적인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것인가? 나는 다른 커플들의 사례를 통해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제도와 편견에 맞서서 또 다른 삶을 선택한 이들이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넘어서 언어와 사고의 차이를 넘어 이룬 그들만의 결혼, 가족이라는 성城 속에서 과연 그들은 행복할까?를 질문한다. 사진 속에는 한국여성들과 결혼한 다양한 국적의 남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그만큼 다채로운 일에 종사한다. 이 커플들은 다른 문화권의 충돌에 따른 인테리어를 보여준다. 동양풍과 서양풍이 혼재되어 있고 그들만의 간편하고 편리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 조율한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다소 불안정하고 임시적인 삶의 가변성도 드러낸다. 그 공간 안에 생활하는 그들이 잠시 멈춰서있다. 자연스레 포즈를 취한 이들은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서있거나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남자들의 시선은 여자를 응시하거나 렌즈를 피해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주변인처럼 보인다. 낯설고 불편하고 어색한 차이 속에서 여전히 길들여지지 못하는 모습들이다. 다만 그들은 여자를 위해 이곳까지 온 이들이다. 여자들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다. 표정 없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즉물적인 얼굴로 위치하고 있다. 관자를 응시한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여성들의 응시의 시선은 장면 속의 주인공으로서 자신들의 상황을 서술하는 듯 하다. 그녀들은 배경으로부터 분리되어 또렷하게 다가온다. 이 사진은 그저 이들의 이름만을 표명한다. ‘현순과 킵’, ‘수연과 딘’ 식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남녀의 관계를 성명으로만 전달해준다. 이들은 행복해 보이는 것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기이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국제결혼이나 국내결혼이나 결혼이란 제도는 불가피하게 남녀의 차이에 따른 갈등과 좀처럼 메꿔지기 힘든 틈을 만들어준다. 무릇 결혼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이들 역시 일반 남녀와 마찬가지로 우연히 만나고 사랑하고 그러다가 덜컥 결혼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일반적인 부부들이 겪는 갈등에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심연 같은 협곡이 있겠지만 그것은 이들 집안의 인테리어처럼 그렇게 분열증적으로 봉합되어 갈 것이다. 동일한 차원에서 동성애 커플, 새로운 가족관계 역시 문제시한다. 그녀는 뉴욕에서 이른바 동성애 커플들을 찾아 나섰다.(You and I) 그들의 사적공간으로 들어가 그 둘을 잡아낸다. 일종의 ‘물리적 밀실 공포상황’을 드러내는 공간은 그 안에 사는 커플의 심리적 경계를 은연중 드러낸다. 대부분 동양인과 서양인 커플들이고 동양인이 카메라렌즈를 응시하고 서양인은 배제되는 식이다. 다양한 인종적, 성적, 연령적 구성을 보여주는 각 커플들은 기존의 통상적인 가족제도를 붕괴시키는데 여기서도 이 커플, 가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드리우고 있다.

작가는 최근 <함일의 배>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이 사진은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이국의 땅에서 일상의 삶을 즐기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작업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의 기존 사진적 접근 방식과 더불어 인물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사진에 대한 충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집단 또는 개인 행동양식,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자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연약함, 감각적 기쁨, 내면적 미 등에 대한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이 작업의 시작은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 한국식이름 : 함일)이라는 인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 땅을 밟고 돌아간 서양사람이다. 한국에 13년간 체류하였던 외국인으로 한국을 서양에 소개했던 첫 인물인 함일을 빌어 그로부터 350년이 흐른 현재, 한국의 외국인들은 억류되어 생활했던 함일 일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국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이들을 촬영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을 등지고 있는 이즈음에 많은 외국인들이 오히려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관심을 집중시킨 건 그들이 인생을 즐기는 곳이 다름 아닌 한국인들이 저마다 이주하고자하는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아니 삶을 즐기는 방식은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는 방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함일 일행과는 달리 자의에 의해 한국에 들어와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들의 이국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취업이나 여행을 왔다가 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에 의해 그들은 현재 한국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함 일과는 다른 의지와 애정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는 그들 자신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유목민이다. 그들은 함일과는 다른 의지와 애정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다. 그들은 우리사회에 융화하면서도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비슷한 이들을 만나 교류하고 이질적인 한국문화에 나름의 퓨전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자국 내에서의 답답한 일상을 탈출하여 이곳에서 또 다른 자신의‘배’를 만들어 또 다른 희망의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들을 사진 ‘함일의 배’라고 칭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엇을 행하다가 문득 쉬고 있거나 멈춰있다.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거나 이제 막 일/놀이/노동을 끝내고 편안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거나 안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포즈는 자신의 삶에서 나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포즈들이다. 따라서 작가는 그 사진을 통해 “그들의 꿈은 무엇이고 다이내믹 코리아가 그들을 붙잡고 있는 원더풀한 이유”(작가노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김옥선 자신도 독일인 남편과 함께 제주도에 내려와 살고 있다. 제주도를 삶의 장소로 선택하고 정박한지 어느덧 13년의 시간이 흘렀다. 함일 일행이 ‘어딘지 모를’, ‘그 어딘가’라 이름지었던 제주라는 섬에 억류당했다면 오랜 시간이 흘러 이들 커플은 자의에 의해 이 섬에 왔다. 그리고 다른 많은 외국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이 땅, 이 섬에 와서 살고 있다. 근작은 그렇게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행복과 자유를 충만하게 보여준다.
그로인해 김옥선 사진이 그동안 추구해왔던 것이 다름 아니라 제도와 편견, 인습과 틀, 보이지 않는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는 관계를 부단히 넘어서면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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