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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일- 바람으로 오는 세상

박영택

정일의 근작은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약간의 균열을 일으킨다. 근작은 자연의 정취와 기후, 날씨의 변화에 예민하게 진동하고 그러한 자연과의 교호랄까 감응에 뒤척이는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보이는 세계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적극적으로 삼투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는 항상 사물과 자연, 생명체가 등장하면서 그것이 인간과의 순환구조 속에 설정되어 왔다. 각각의 사물들은 인간과 동일하게 살아있고 약동하며 흐느끼고 부유하고 뒤척이거나 떠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기운, 호흡 혹은 영성을 지닌 존재들인 셈이다. 그는 연금술사 마냥 물감과 붓질을 통해 그 개별적인 사물들에 혼/생명과 기운을 불어넣는다.

최근작은 주로 ‘바람’과 관련 있어 보인다. 자연현상, 자연의 기후변화와 날씨 등에서 연유하는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한 그림이다. 그는 자기 몸이 지닌 감각의 밸브를 죄다 열어 놓았다. 몸이 자연과 접하고 맞닿아 파생한 것들, 미세한 기운과 호흡, 냄새 등을 만지고 기억하고 형상화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발산하는 감각적인 것을 정일의 몸은 포섭한다.
빈번하게 화면에 등장하는 정일 특유의 도상들, 그러니까 촛불, 파이프, 모자, 백자 화병, 새와 장난감 목마, 우산과 날개, 집과 탁자, 사물함과 피아노 그리고 왕자와 공주, 달과 눈, 비, 바람 등이 여전히 촘촘히 모여서 모종의 상황을 직조하고 이야기를 건넨다. 이 상징들은 일종의 단어와 같다. 그리고 수수께끼와 비밀스런 내용을 은밀히 담고 있는 독백들이다. 가끔 영문이니셜이 자리하고 있거나 단어들이 기술되기도 한다. 그것은 쓰여지는 그림, 일정한 이콘들을 갖고 문맥을 맞춰나가는 그림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단어를 조합해서 일상의 이야기, 개인적인 삶의 사연들, 생활의 정서를 기록한다. 각각의 도상들이 반복해서 접속하고 배열을 이루며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고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야기꾼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해 그 위에 아름다고 행복한 동화적 이야기를 얹혀놓는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동심어린 동화의 각색이 어른의 삶을 지배한다. 그는 그림 안에서 그 같은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여전히 몽상과 꿈, 연정이나 사랑, 동화를 아름답게 기술한다. 사랑이 불가능하고 동심과 꿈, 환상이 지워져가는 시대에,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그림그리기로 역주행한다. 영원한 유년의 왕국을, 그치지 않는 사랑의 정념을 시각화한다. 사랑이나 낭만, 동화와 아름다움 같은 단어는 너무 식상해져서 관념적이 되어버렸거나 미술에서 그 의미가 변색되어버렸다면 정일은 그 단어를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로 보인다.


흡사 마그리트와 샤갈의 그림이 혼재된 듯한 그의 그림은 몽상적이고 동화적이면서도 다분히 초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사실성을 기반으로 그려나간다. 보이는 것 안의 보이지 않는 것과 시각 너머의 감각적인 것들이 혼재한다. 색감은 무척이나 화려하고 달콤하게 모든 것을 감싸고 다채로운 색상들은 흰색의 조율 아래 촘촘히 수놓아져있다. 화면 속 모든 대상들은 중력의 법칙에서 다들 벗어나있다. 둥둥 떠다니고 흔들리고 뷰유한다.
바람이 불고 꽃들은 휘날리며 덩달아 촛불과 남녀의 마음도 흔들린다. 악기들이 울리고 여러 소리들이 울울하게 합창한다. 마치 그림책을 펼쳐보면서 짧은 이야기를 따라가는 듯한 체험이다. 이렇듯 파동치는 장면연출은 보는 이의 시각과 촉각, 후각이나 미각까지도 요구한다.

근작은 그 붓질의 유유자적함이나 필촉의 운율에서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기운생동하는 듯한, 생성하는 변화가 감지된다고나 할까. 짧고 단속적인 붓질들이 난무하거나 부드럽게 휘감기면서 심리적인 뉘앙스와 감정 상태를 고양하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빠른 필촉, 운필의 경쾌한 리듬감이나 모필의 흐름이 탄력있게 구사된다. 모든 사물들은 그 필촉에 의해 존재감을 부여받아 흔들리고 이동한다. 계절의 변화와 남녀의 감정이란 것 역시 그 붓질에 의해 가시화되어 은유화된다. 아울러 다분히 점묘적이면서도 촉각성이 강하게 전달되는 터치는 행위의 흔적이자 물감의 질료성 또한 강조하는 편이다. 그는 물감의 물성을 다채롭고 다루면서 그 성질을 관능적이고 화려하고 달콤한 모종의 서정으로 둔갑시킨다. 속도감과 함께 방향성을 감촉시키는 이 붓질들은 바람이나 꽃가루가 날리는 장면, 감정의 분출 혹은 아련하게 흩어지는 냄새와 기억의 가루들을 연상시킨다. 부드럽고 따뜻한 날씨, 햇살 그리고 꽃들이 가득하며 가끔 바람이 불거나 적조한 달밤, 간혹 비와 눈이 내리고 모든 것이 마냥, 속절없이 흩날린다. 그것은 어련하기고 하고 덧없이 보이기도 하다.


애초에 미술, 이미지는 주술이었다. 모든 형상의 비밀은, 실은 이야기에 있다. 현대미술은 그 이야기성을 부정해왔다. 이미지가 지닌 언어의 힘을 밀어둔 자리에 미술 스스로가 그 무엇이기를 갈망해온 역사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야기 없이 형상은 태어나지 않는다.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마법이고 아니마(anima)라면, 모든 이야기와 모든 형상의 핵심은 마법이다. 의미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미지 역시 보는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우리가 입을 통해 소리를 전달하는 것,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 역시 이미 그/그녀에게 마법을 거는 행위와도 같다. 인간이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술 속에서 이미지는 상징적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힘이고 마술이다.

정일은 그 이야기 그림을 지속해서 자기 회화세계 안에 거느린다. 그에게 이미지는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정신과 물질의 세계를 연관 짓는 힘이기도 하다.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말이다. 꿈이나 몽상의 세계, 기억의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적 활동은 세계 영혼과 교감하는 활동일 것이다. 정일 그림의 핵심은 바로 그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이야기성에 있어 보인다.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이야기를 특유의 화면 연출을 통해 몽상적이고 감미롭게 표현해내는데서 다소 특이한 존재성을 지닌다. 정일은 문학적 텍스트성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주류미술의 언어나 특정한 논리, 유행과는 동떨어진 자리에 자신만의 그림의 왕국이라고 불러볼 만한 화면을 가꿔온 작가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일관되게 유지시켜 주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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