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대성 / 벽에 부착된 판자집 모형

박영택

1960년대 초반에 한국 작가들이 그린 풍경화 속에는 당시 서울의 판자집들이 자주 재현되어 있었다.(김창렬1960, 이만익1964) 산동네와 판자집은 한국 전쟁 이후 서울의 보편적인 얼굴이었다. 그후 판자집과 산동네 무허가 건축물들이 정비되고 쫓겨가는 과정을 거쳐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이전과 같은 판자집을 보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나 고층아파트가 키를 다투고 올라가는 한 켠에 흉물스럽게 남겨진 판자집 혹은 누추한 집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풍경이기도 하다. 근래에 강홍구와 강상훈의 사진과 이문주, 정재호의 그림 속에서 산동네와 재개발풍경, 그리고 남루한 집/공간의 초상을 만난다. 그런가하면 ‘집’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업들이 최근 많아졌다. 그만큼 집, 거주공간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얘기다. 동시대는 집/거주공간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강박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인에게 집은 단지 거주의 공간만이 아니라 좀더 편하고 안락하고 ‘럭셔리’한 공간의 욕망으로 부풀어오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증식과 투기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저간에는 집을 소유대상으로 보는 관점, 집의 유무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등이 서려있다. 그러나 집은 유한한 인간이 일시적으로 거처하다 가는 곳이다. 노마드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집에 대한 욕망의 과포화는 조금은 낯설다.

박대성은 건축물 모형 같은 것을 만든다. 건축은 지상에 서있다. 건축은 세워져있고 동시에 무엇인가를 상징한다. 건물은 대체물이고 그것은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실제 건축물을 모방하면서도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가 만든 건축물 모형은 판자집이다.
“판자집의 형태는 세계 어느 나라마다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원인과 이유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단지 주변의 것들, 버려진 것들, 경제성을 상실한 것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나는 판자 집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한, 인간의 고된 삶, 과거의 노스텔지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 오브제의 특징(그들의 영역 속에 버려진 재료를 통해 만들어진 집, 몸(정신)으로 만들어진 집), 생태학적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판자집은 인위적 형태의 최소단계로서의 구조물이다. ”(작가노트)

그는 다름아닌 판자집을 모방한다. 버려진 재료, 합판이나 목재 조각들을 구해 판자집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실제 ‘건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집의 아니라 축소된 모형이다. 정리나 완성과는 거리가 먼 생성적인 상황을 드러내면서 합판과 나무들이 무작위로 붙여지고 첨삭되어 있다. 주변에서 구한 목재를 얼기설기 짜맞춘 것들이다. 그것들은 일정한 각도로 기울어져 벽에 부착되어 있다. 마치 벽면을 화면 삼아 합판이나 작은 목재들을 구성해 집을 그린/만든 형국이다. 중력의 법칙을 조금 덜받는 위치에서 가까스로, 악착같이 벽에 기생하는 실존의 뉘앙스같은 것들이 감촉되기도 한다. 또는 일정한 평면의 화면/나무판에 합판 등을 부착해 집을 그려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화면에 부조적, 입체적으로 가설되어 그림자를 드리우며 존재한다. 더러는 바닥에 좌대와 유사해 보이는 나무 조각들에 의해 지탱되어 일으켜세워져있다. 마치 나무 위에 판자집이 올라간 듯 하다. 작가의 이 같은 작업은 실제 판자집들의 상황을 재연한 것이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집이란 영속성과 안정감, 휴식과 외부로 부터의 보호란 덕목을 지녀야 하지만 판자집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최소한의 방어기제와 가장 경제적인 차원에서 재료를 구해 대충 만든 것, 일시적인 거처, 불안하고 힘겨운 생의 임계선같은 공간, 최후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장소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삶,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 역시 건축물이 새로 지어지고 허물어지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삶은 특정간 공간, 그 각자의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고 죽어간다.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에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듯 건축물 또한 어떠한 실용적, 미적, 상징적 기능을 하느나에 따라 갖게 되는 힘이 다르다’는 이야기도 스며들어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서있는, 존재하는공간에 대한 자의식을 표방한다.

그의 초기작은 새집의 모방에서 비롯된다. 그는 우연히 새의 몸이 지닌 물리적 한계, 그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생태적 재료의 차원에서 구축된 집을 통해 작업의 단상을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작은 건축물의 외벽이나 틈에 기생하는 작업이다. 주어진 건축물에 적응하고 중력의 법칙에서 약간 부양해서 수직의 벽에 새집/새처럼 살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들이 은연중 투여되는 그런 작업이었다. 그것은 근작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새집과 판자집의 공유성에 주목한다. 주변의 버려진 것들, 요소들을 통해 얻어진 ‘오브제로 이루어진 집’은 일종의 은유로 해석된다. 작가는 집을 “ 가장 개인적인 사회적 능력과 힘을 대변해주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외형적 형태에서도 내부와 외부의 양면적 움직임은 인간의 모습과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벽에 입체물이 걸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자리하는 순간 착시를 일으킨다. 마치 부감법으로 보는 듯 대상/오브제가 있다. 입체의 형태이지만 이차원의 평면 처럼 한 시점에서 그 형태를 볼 수 잇고 시범의 변화에 따라 다른 형태가 다가온다. 일면적인 시점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시점에 의해 몸을 드러내는 집/대상이다. 이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시선’과 ‘응시’의 차이를 의도한다고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사물/대상은 다르게 다가온다.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의미가 달라진다. 시선이란 생물학적으로 말해 두 개의 안구가 하나의 대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는 행위이다. 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시선은 눈이라는 대상의 어떤 성질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시선은 나의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눈은 단순히 보는 눈이 아니라 인식하는 눈이고 말하는 눈이다. 응시가 그런 것이다.

동시에 벽은 외부와 경계를 짓고 감추는 동시에 고립과 은둔을 뜻한다. 그것은 안과 밖을 구분하고 위치지워주는 한편 친밀과 위안을 준다. 작가는 그 벽을 “삶의 영역과 세력을 나타내는 사회적 관계, 규범, 규율과 같은 인위적인 기능으로서 힘과 권력, 그리고 삶의 현실적 상황을 드러나게 하는 요소들로서 바라보고 있다.” 또한 벽을 본다는것, 느낀다는 것은 벽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존재를 지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사회적 장소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것이 벽이다. 작가는 그저 그 안에 있을 뿐이고 그 속에서 만들어져 가고 있다. “나에게 벽이란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바탕, 현실적 요소처럼 나의 두 발을 딛고 있는 땅이며 바닥이며 더 나아가서 나의 토양의 본질을 바라보게 되었다.”(작가노트)

또환 그의 판자집은 ‘생각을 짓고 있는 상황’으로 은유된다. “물리적 힘과 조응하는 관계에서 부조리한 증축이 진행되는중간 과정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 속에서 진행된다. 작품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형태다. 어설프게 붙인 합판들은 떨어져나가거나 훼손되거나 자연의 입김, 시간의 경과 속에서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지상에 실현한 모든 주거공간은 일시적인 거주에 불과하다. 인간 역시 그러한 시간이 경과 속에서 소멸한다. 집 역시 영원성을 담지하는 곳, 장소가 아니라 소멸하는 공간이다. 존재 역시 만들어지며 소멸한다. 상황이 만들어낸다. 판자집은 상황이 만들어낸 주거공간, 일시적 거처다. 인간 역시 동일한 운명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