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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규 / 한지로 성형된 이미지

박영택

흔히 종이는 사람을 닮았다고들 말한다. 종이는 인간의 마음처럼 작은 충격에도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며 상처를 받는다. 하지만 두드릴수록 탄탄해지고 여러 장이 모일수록 더욱 질겨지며 단련을 거쳐 성숙되는데 그 모양이 마치 인간의 모습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종이는 자연의 속성과 이치를 고스란히 지닌 상징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그 종이 위에 문자와 그림이 시술되고 종이 자체를 이용해 다양한 일상적 물건을 만들어오면서 종이와 함께 해온 이력과 생애가 동양의 전통문화를 형성해왔다. 한국인의 생애는 종이에 온전히 둘러싸여 이루어졌다. 종이 자체가 지닌 색채와 질감, 또한 그 속성이 자연스레 스며들고 내재화되어 한국인의 성품을 만들고 미의식을 개안 시켜왔을 것이다. 특히나 한지는 내구성과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친근한 자연 그대로의 빛깔을 지녔고 또한 염료가 물들었을 때 느껴지는 다양한 색상의 조화가 일품이다. 분명 한국인의 정서, 한국문화와 미의식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한편 전통적인 동양화 작업이란 결국 종이의 속성을 깨닫고 체험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그를 통해 자연/세계를 새삼 헤아리는 수행으로 번진다. 재료는 단지 그림을 만들어가는 수단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인 예술의 지향점 아래 수렴되어 있었다.

채색화로 일관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그 색채를 통해 한국 전통미술의 맥락을 더듬어오던 차영규의 근작은 한지를 성형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기에서 벗어나 만들고 염색하고 태우고 부착하는 등 다양한 조형체험과 확장된 방법론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종이/한지 자체가 지닌 색상과 질감, 그 속성을 극대화한다. 한지 자체가 이미지 생성의 기원이 되고 아예 이미지와 색채를 동시에 함축한 결정적인 상황으로 극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한국 전통미술의 여러 흔적을 얹혀놓고 나아가 동양 이미지의 근원을 환생시키며 더 나아가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의 발생과정을 추체험시킨다. 작업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고 시간대와 문화적 범위가 확장되었다. 산수화와 민화, 보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한국 전통미술의 도상들이 차용되는가 하면 초기 한자이미지, 아프리카미술 및 원시미술의 흔적들이 한지로 성형된 독특한 바탕위에서 자연스럽게 융기, 서식한다. 아울러 한지를 성형하면서 만들어진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질감을 그대로 살려 그 자체로 독자한 조형 실험이 추구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특정한 논리에 입각해 한지의 물성을 강조하는 방법론적 실험에 머물거나 단일한 주제, 강박적인 전통주의 등에 묶이지 않으면서 한지를 성형한 작업의 토대 위에 다양한 모색을 동시다발적으로, 자연스레 확산시키고 있다.

작가는 한지자체 혹은 한지에 황토를 넣어 성형한다. 바탕을 만들고 화면을 설정한다. 손으로 한지를 주무르고 다독거리는 노동, 행위가 표면에 가득 안착되어 있다. 손으로 그려나간, 만들어나간 바탕은 요철효과를 지닌 촉각적인 화면이자 흡사 땅, 바위나 벽면의 질감을 유지하면서 떠오른다. 손으로 그린/만든 선들이 이미지가 되고 그 도드라져 높이를 지니고 올라온 부위가 뜨거운 열판에 닿아 시커멓게 탄 자국이 생생한 선, 윤곽을 만들어 보인다. 혹은 한지 성형위에 자연염료와 먹, 채색이 스며들고 더러 오브제가 부착되어있다. 이 비정형의 화면은 요철효과를 지닌 저부조, 촉각을 자극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벽면이 되고 땅이 되고 바위나 돌의 피부가 되기도 하고 가장 원초적인 화면이자 생생한 자연의 밑바탕, 근원을 회상시키며 자존한다. 원형과 정방형 혹은 사각형의 꼴을 지닌 화면은 자연스런 굴곡과 주름, 질감을 풍성하게 연출한다. 이미 한지 자체의 질감과 색채, 주름 등은 풍성한 회화적 효과로 자족한다. 그 바탕에 뜨거운 열, 불에 의해 부분적으로 태워지고 지져지면서 생긴 새카만 자국이 윤곽을 그려주고 형상을 슬그머니 떠올려준다. 일종의 인두화 기법처럼 보이는 한편 탁본 또한 연상시킨다.
한지 성형으로 만든 초기작은 꽃의 형상, 꽃의 여러 변주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한지로 커다란 원형의 꽃을 만들고 채색을 한 이 작업은 일종의 입체 꽃인데 원형의 화면 혹은 사각형의 화면위에 둥그런 꽃이 접시처럼 올라와 부착되어 있기도 하다. 부드럽고 야들한 꽃잎의 질감이 한지로 구현되어 환생하고 그 한지 내부로 스며든 색상이 실제 꽃의 자연스런 색채를 연상시킨다. 화면 위에 떠있는 듯한, 일정한 높이로 자존하는 이 꽃은 입체감과 실재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후 작업은 구체적인 꽃의 형태나 재현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조형으로 나간다. ‘조형놀이’란 제목을 단 작업들은 한지를 가지고 놀이한 경우다. 적극적인 유희와 자유로운 발상이 겹쳐있다. 한지로 캐스팅한 도형의 선들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직선과 곡선, 유기적인 선들이 변화롭게 선회하는 상황이다. ‘구성’시리즈도 동일한 맥락의 작업이다. 유기체적인 형상들이 화면을 채우고 그것은 저부조로서 깊이와 요철을 부여한다. 한지에 은은한 색상이 첨가되어 자연스러움과 선의 유희적인 재미를 감촉시킨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가장자리 종이의 단면들이 긴장감과 재미를 더한다. 그 조형놀이 역시 한국적인 미감과 전통의 모색과 변주에 놓여있다. 작가는 한국의 전통문양에서 발췌된 형상과 조각보, 창살문, 십장생, 흉배, 민화, 오방색, 꽃담의 이미지들을 한지 바탕 위에 은은하게 양각화 시켜 올려놓았다. 전통적인 도상을 원용하는 작업은 민화의 책걸이그림을 원용한 ‘책걸이 살펴보기’ 연작을 통해 심화된다. 책걸이 그림의 일부를 확대해서 올려놓았는데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그어나간 선/만들어진 선들이 소박하고 고졸하다. 무엇보다도 한지를 성형해 대강의 윤곽을 만들어놓은 후 뜨거운 열판으로 가열해서 요철효과로 부감된 부분이 짙은 색으로 태워지면서 만든 선의 맛이 흥미롭다. 그 선들은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위적인 솜씨나 모필에 의해 이루어진 관습적인 선에서 벗어나있다. 동시에 그 무심하게 그어진 듯한 선 주변에 한지에 열이 가해져 만들어진 색 역시 지극히 자연스럽게 발효된 색이다. 이전에 그가 정교하고 꼼꼼한 채색의 미감을 극대화한 작업에서 근작은 자연스러움과 소박함, 그리고 인위성을 지운 자리에서 피어난 색과 선의 세계에 매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강산 바라보기’ 시리즈와 몇 개의 ‘독도’ 작업은 산수화를 응용한 작업이다. 한지를 이용해 부조적으로 산수화를 만들어나간 것이고 벽면에 입체적으로 걸려 공간/풍경이 실제하는 인상을 주는데 무엇보다도 한지의 색감과 거칠고 소박한 선들이 그대로 자연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 한지로 성형한 틀, 판 자체가 산/대지를 떠올려주고 비정형의 화면에 산봉우리들이 중첩되어 솟아있는 자취가 형상화 되어 있다. 시원스런 선의 맛이 다양한 변형 아래 위치한다. 특히 한지는 좀 더 자유롭게 연출되어있는데 부분적으로 구멍이 여백처럼 나있고 뜯겨지고 잘려진 자국이 과감한 산의 형상을 일으켜 세우고 절단하면서 솟아있다. 그것은 산수화에서 산의 형태를 뜯어놓은 형국 같기도 하고 평면에 갇힌 산수를 입체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산수화의 구도와 여백 관계를 한지성형과 자연염료로 해석한 이 독특한 산수작업은 작가의 전통적인 도상과 미의식을 차용한 작업 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그와 동시에 작가는 자신의 여행체험을 작업에 끌어들이고 있는데 특히 아프리카 여행은 아프리카미술의 토속성과 원시성에 대한 매력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마사이의 일상’, ‘가나회상, 마사이마라 등이 그것이다. 흔히 원시미술은 존재 가능한 미술형식 중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이며, 가장 오염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종교적인 사상과 정신적인 경험에 의해 깊은 영감을 받은 산물들이자 기교를 부리려하지 않기 때문에 주는 힘과 매혹적인 부분이 있다. 따라서 개념적이고 논리성에 기반한 현대미술은 단순함과 원시성과 자연스러움을 선호한다. 원시미술 혹은 아프리카미술에서 초보적이면서도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힘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프리카미술 혹은 원시미술은 이미지가 지닌 주술성의 힘을 환기시킨다. 작가가 전통미술과 원시미술의 여러 흔적들을 환생시키는 궁극의 이유는 이미지가 지닌 본래의 힘,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소멸되고 사장된 그 기운, 영성과 주술성을 새삼 회복시키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간의 채색화 작업 역시 색을 통한 주술성, 영성이 그 저변에 선명하게 깔려있었다는 생각이다. 한자의 고어를 대상으로 한 작업도 동일한 맥락에 위치해있다. ‘종정문’ 시리즈와 ‘금문바라보기’ 등의 작업은 상형문자인 한자의 원형이미지들을 마치 암각화나 탁본처럼 떠내고 있다. 작가는 고대 중국의 은시대의 도상, 기호를 특별한 의상 意象에 따라 조직한 것, 즉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기호인 도상 등을 차용한다. 고대 사회의 당시 습속을 반영하고 고대 사회의 존재 양식을 일러주는 문자를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한지 성형위에 자연염료로 드러난 이미지들은 조상신과 최고통치자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는 갑골문이나 고대 중국인들이 죽은 조상들에게 고기나 술을 바칠 때 사용되던 청동기에서 발견되는 명문 銘文에서 보는 기호들이다. 상형문자가 지닌 형상과 자취가 자연스레 올려졌는데 바래고 소멸된 자취 속에서 어렴픗하게 떠오르는 선/기호들은 인류가 만든 이미지의 기원을 생생하게 감촉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인류의 보편적인 시각이미지가 지닌 모종이 신비스러운 힘, 도상의 주술성, 영성과 이미지 자체가 지닌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생명력의 공유성을 찾아나가고 이를 한지와 천연색채, 그리고 자유롭고 유희적인 조형체계 안에서 매력적으로 환생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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