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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석 / 적멸과 환생

박영택

단색으로 물든 화면이 눈에 가득하다. 강렬한 색채추상화를 보는 듯 하다. 이 깊이있는 색층은 단일하고 견고하다. 그러나 색으로만 뒤덮힌 화면 안은 무수한 흔적으로 약동한다. 촘촘한 자취, 기운들로 얼룩진 화면은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하고 그에 따라 화면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바라본 것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붉은 색으로 칠해진 화면은 마치 붉게 타오르는 불길, 화염 속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반면 파랑 색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와는 다른 차가운 느낌, 하늘이나 바다를 순간 연상시켜준다. 태극기에 그려진 빨간색(양)과 파란색(음)의 파문이 보여주는 음과 양도 떠오른다. 이른바 이원론에 입각한 역경이 그것이다. 음과 양 두 가지로 천지간의 만상을 설명하려는, 우주론 말이다. 모든 현상, 천지간에 일어나는 모든 세상사는 음과 양이라는 이원중 어딘가에 속하고, 이것들이 변화하고 중첩되어 현상을 해명하고 답을 제시해준다는 일종의 ‘바이오리듬론’인데 그것은 우주와 개인의 바이오리듬을 조화시키려는 것이다. 일단 그같은 색채의 상징성이 다가온다. 다시 화면에 근접해서 바라보면 그 피부는 오밀조밀한 작은 면들로 촘촘하다. 그것은 부정형의 형태를 지닌 체 화면 곳곳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달으며 자리했다. 그 사이로 먹물이 응고된 자취, 붓질이 지나가다 멈춰선 흔적, 여정이 선연하다. 작가의 신체리듬, 노동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 모든 과정은 바닥과 표면에서 투명하게 일어난다. 작가는 기존의 먹그림 위에 색테이프를 오려붙이는 일/놀이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 한다. 마치 아이들이 공작시간에 즐거이 놀이하듯 그 역시 퍼즐 맞추듯 즐겁고 환희에 찬 놀이를 감행했다. 장지에 먹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그에 따라 색테이프를 오려 붙이는 일이 그것이다. 그에 따라 밑그림은 지워지고 소멸되어 버린다. 자신이 그린 것을 자신이 스스로 지우고 삭제한다. 테이프로 봉하고 은폐시키는 일인데 그렇게 따라가는 여정은 밑그림과는 정확히 일치되지 못하고 조금씩 어긋나는 또 다른 모방이자 기억의 재현이다. 필연에 우연이 겹쳐서 또 다른 길을 낸다. 그렇다면 밑그림과 테이프 오려 붙이는 일의 관계는 무엇일까?
자신의 신체로 그려나가는 모필의 삶과 오브제, 도구를 이용해 잘라서 부착하는 콜라주는 다분히 상반된다. 모필의 부드럽고 자유분방함에 비해 테이프는 각지고 직선적이며 화면에 요철효과를 남긴다. 모필이 화면 안으로 삼투하는데 반해 테이프는 종이 위에 일정한 높이를 형성하면서 튀어 올라온다. 그것은 약간의 깊이를 가지며 촉각적인 화면을 만든다. 작가는 그 위에 바니쉬로 마감을 하고 또 다시 아크릴물감으로 덧칠하기를 반복해서 단색으로 다시 덮어나갔다. 여전히 먹색과 테이프는 공존한다. 이 작업은 그리고 만들면서 이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는 일의 반복이다. 결국 하나의 색 안에 모든 것들은 숨을 죽이고 가라앉아있다. 그러나 화면은 비교적 투명하게 그간의 여정, 세월, 시간과 몸의 놀림의 궤적을 보여준다. 화면은 몇 겹의 시간을 끌어안은 셈이다. 여러 층의 시간이 베어있고 깊이가 있으며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일순 소멸된다. 작가는 붉은 색으로 그것들을 화장시키듯이, 태우듯이 칠해버렸다. 그래서인지 화면은 불에 삼켜진 형상이다. 아궁이 속을 들여다 보듯이 불 속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작가는 그 작품에 적멸이란 제목을 붙여주었다. 마치 스님들의 다비식 장면이 연상된다. 화장을 해서 자신의 육체를 모조리 망실시키는 것 말이다. 붉은 색으로 마감된 화면은 색채추상이나 색면추상에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색 그 자체를 물성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수묵의 맛과 선, 채색의 깊음이 공존하고 평면과 입체/부조적인 화면이 길항하며 시각과 촉각이 조응하는 다층적인 화면, 그런 그림이다.
'붉은 색은 뭔가 불타서 사그러드는거 같고 청색은 그 후에 오는 어떤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것도 같았다'(작가노트)

작가의 화면은 청색과 적색으로 양분된 세계를 한 자리에 부려놓아 적멸과 그 적멸 이후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것이 삶이고 목숨이고 생애다. 이 끝없는 순환은 영원하다. 시간을 하염없이 지워나가는 행위이자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일, 철저하게 무작위적인 칠하기, 긋기이다. 그와 동시에 그리고 오려붙이면서 문득 우연히 만들어나가는 제작과정에 작가는 철저히 순응한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놀이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업하는 일의 순수한 즐거움과 유희, 지극한 노동, 우연과 필연 그 사이에 절묘하게 놓인 예술이란 행위를 매번 새롭게 질문하는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반추되는 그런 작업이다. 이 점이 그간 이영석 작업의 핵심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월간 아트인컬쳐-이영석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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