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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 친숙하면서도 낯선 정물

박영택

서구에서 화상이 출현한 시기는 대략 1870년대이다. 마네와 인상주의를 통해 바야흐로 전통화화와 결별하면서 새로운 미술운동, 이른바 모더니즘이 전개되는 시간대와 겹쳐지고 있음을 본다. 이전에 미술은 왕이나 귀족과 같은 특권계급들의 전유물이었고 이들이 사실상 강력한 미술 후원자로서 이미지를 독점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 지배계급의 이념과 그들의 권력을 이미지로 증거 하는 일, 당대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종교, 신화)를 도상화하는 것이 전통미술이었기에 이미지를 필요로 하고 그 이미지를 빌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이들에게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화상의 출현은 이제 이미지/미술이 특권 지배계급이나 종교권력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향한 시장경제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화상은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모든 이들의 미적 취향과 기호, 안목에 호소하거나 자본과 이윤의 법칙에 따라 미술을 투자가치나 의미있는 정신적 산물로 취급한다. 동시에 새로운 미술/상품의 출현을 알리고 그 의미를 선전하고 그것이 지닌 가치를 측정, 판단하는 이들이 되었다. 천재적 개인 그리고 정신적 상품이 된 미술과 서구모더니즘은 그러한 눈 밝은 화상들에 의해 추동되어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볼라르, 컨바일러나 레오 카스텔리 등은 전설이 된 화상들이다. 그들은 단지 화상이 아니라 시대를 선도해나가며 미술의 흐름을 이끈 미술비평가와 미술사가, 전시기획자, 미술애호가에 다름아니었다.

김영석은 오랫동안 ‘마니프’를 만들고 진행시켜온 화상, 기획자이다. 동시대 미술 현장의 중심에서 늘상 새로운 미술, 작가의 출현을 바라보고 경제적 가치, 투자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선별해오는가 하면 작금의 미술 흐름과 이슈에 관심을 기울여오던 그가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 화상이 여는 전시회란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누구보다도 많은 그림을 보아왔고 작가들의 작업 스타일과 방법론, 덧붙여 미술시장에 대해 풍성한 지식을 갖고 있을 그가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하다. 그는 이제 화상이 아니라 작가이고자 한다. 조금은 낯설겠지만 이제 미술인들은 화가로서의 김영석이란 존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의 화랑에서 접한, 그가 그린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 다 정물화에 속하지만 하나는 극사실적인 구상화로 정물을 수평의 테이블 위에 병렬시켜 정치하게 묘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골프공 같은 작은 동그라미로 가득찬 배경의 중심에 커다란 백자항아리가 들어찬 그림이다. 일반적인 정물화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정물을 이루고 있는 것의 하나 혹은 백자항아리 부분이 세부묘사가 지워진 체 물질덩어리로만 윤곽을 채우고 부착되듯 칠해져있다. 그로인해 무척 낯설게 다가온다. 강하고 선명한 물성을 보여주는 이 단색/미색의 흔적은 그려진 그림 속에서 부재한 사물을 보여주는 한편 모노톤의 추상으로, 물성으로 이루어진 저부조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 부분을 ‘사유하는 조형언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정물화를 보고 즐기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적인 구도에 차분한 적멸감을 안기며 부동의 사물로 응고된 병과 과일은 비교적 흔하게 접하는 정물화 구상이다. 이른바 구자승이나 김재학류의 그림이 떠오른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우선 그 치밀한 묘사력에 우선 놀랐다. 얼핏봐서는 앞서 언급한 작가들의 작품이라고 해도 속아 넘어갈 정도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루젼을 극대화한 그림 속에 구멍 같은 공간을 마련해놨다. 그것은 납작한 캔버스의 평면성에 일치하는 단호하게 마감된 평면의 색 면이다. 기존 정물화의 소재/사물들을 근간으로 이를 정밀하게 재현하다가 다시 그 어느 부분을 구조적인 색 면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릇이나 병 등 정물화 속의 사물 중 하나가 갑자기 공간에서 사라져버린 듯한 묘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투명인간 아니 투명정물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는 구상과 추상, 실재와 허상, 존재와 부재, 있음과 없음이 공존한다. 그림 안에 만들어진 블랙홀 같은 기이한 빈 부분, 여백은 붓질로 그려진 다른 부분들과 달리 테이프 작업과 나이프에 의해 일정한 두께로 균질하게 밀어 올려진 부조로 올라와 있다. 테이프를 붙이고 그 속에 유화물감을 넣어서 나이프로 단호하게 밀어낸, 일종의 상감기법 작업이다. 이 밀기/채우기는 상당한 시간과 공력이 들어가는 고된 작업이다. 그것은 단순함 속에 깃든 단단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한편 금속처럼 매끈하고 균일한 질감을 통해 극적인 느낌을 전해주면서도 차가운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영역이다. 지워진/ 그려진 부분이자 없으면서 있는 부분이다.

전형적인 정물화의 구도를 충실히 따르며 와인 병과 꽃과 식물들이 수직과 수평의 구도 속에 엄정하게, 긴장감 있게 자리하고 있고 배경은 단일한 색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구상과 비구상이 공존하고 무생물(병)과 생물(과일), 수직과 수평, 감성과 이성, 그리기와 나이프로 밀기/채우기(일종의 상감기법), 사실적인 재현과 실루엣 등 상반된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기존 정물화와는 조금 다른 정물화다. 그것은 친숙함과 낯설음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진동한다. 특히나 실제 모습과 더불어 새롭게 부여된 무형의 존재(실루엣)를 동시에 인지하게 한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성과 암시적이고 은유적인 접근 방식이 공존하면서 숨쉰다. 여기서는 보여주지 않고 감추고 지우고, 말소한 부분이 보는 이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역이 된다. 이 색 면으로 이루어진 빈 부분은 (물론 물질, 물감으로 채워진)화면 바깥의 지시대상을 참조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부분은 외부대상, 사물을 재현한 것이지만 이 부분은 그려진 사물 중 하나를 참조한 것이다. 그림을 참조로 한 것이지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지시대상을 참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현적 모방에 저항하고 구상화이면서도 그 안에서 구상화를 내파한다.
나로서는 정물화보다 백자항아리만을 전면에 커다랗게 그린 그림이 보다 인상적이었다. 물론 백자항아리는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소재이자 여러 작가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식상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일찍이 김환기의 달항아리 그림이나 강익중, 고영훈, 석철주의 회화 및 구본창의 사진 등에서 우리는 백자항아리의 조형적 해석을 숱하게 보아왔다. 김영석은 바탕에 동전, 계란(알)과 유사한 원형의 형상을 일정하게 배열해놓고 그 위에 백자항아리를 올려놓았다. 이 도자기 역시 앞서 정물화의 실루엣 부분처럼 일정한 높이를 지닌 체 부조적으로 튀어 올라와있다. 오랜 공정 끝에 완성된 단단한 바탕 면(최소 5번 이상의 칠에 의해 마감된 바탕)에 무수한 ‘땡땡이’가 그려져 있는데 작가는 이를 자신의 하루하루를 떠올리며 그렸다고 한다. 그것은 반복되는 시간, 하루, 삶 그리고 하나의 생명체가 환생한다는 의미도 깃들어 있단다. 오랜 공정 끝에 바탕이 완성되면 중심에 항아리를 올려놓는다. 특수 제작한 커다란 나이프로 힘을 가해 쓸어내리듯, 밀어내듯 지나가면 물감이 밀리고 쓸린 자취가 굳어서 속도감과 감각적인 부위/살을 촉각화, 질량화한다. 그것은 붓의 효과와는 다른 감각과 표면의 힘, 물질감을 보여준다. 작가는 말하기를 도공이 도자기를 빚으면서 손끝으로 직접 경험했었을 흙의 자연스런 쓸림현상을 연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균등한 힘의 배분과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세계다. 그 과정에서 우연적인 흔적, 기미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어른거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부위는 재현도 아니고 전적으로 물성, 질료성으로만 채워진 것도 아니다. 백자의 형상과 그 표면을 연상시켜주고 실제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백자표면을 묘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물질로 채워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부위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물(物) 그 자체다. 역시 상감기법처럼 마감된 실루엣으로서의 백자부위는 그려진 것도 그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 모호한 상황성을 연출한다. 텅 빈 듯한 그러나 무엇인가가 아른거리는 영역, 특히나 그 실루엣만으로도 보는 이들은 누구나 백자를 떠올리고 그 색상과 표면, 질감과 백자가 상징하는 여러 의미망들을 부산하게 떠올릴 것이다.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 기억과 경험세계를 허용하고 유인해내고 있다. 그러니까 작품이 닫힌 구조가 아니라 열린구조로,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 비결정적인 세계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관자의 눈을 마냥 빨아들이는 그림이 아니라 수용하면서도 잠시 멈추고 머뭇거리게 만들면서 그림을 생각하게 하는 관객참여적인 혹은 관자의 개입을 허용하는 그런 그림이기도 하다. 아울러 작가는 한국적 미의 대표격이자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상징계를 끌어들여 독특한 조형방법론으로 보여주는 한편 유화물감과 나이프 사용을 통해 상감기법의 응용과 동양적인 여백이나 전통적인 조형세계의 편린을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의 내부 역시 이원적인 요소들끼리 길항하고 상호대립적인 부분들이 충돌하면서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듯이 그림을 보는 이들 역시 자신의 시선을 그 사이 어디선가 위치시키면서 지속적인 사유의 운동을 요구한다. 단일한 공간이 아닌 다차원적 공간과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물화를 통해 회화의 속성과 정물화장르의 특질, 동. 서양회화의 상호 차이 등을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그려진 환영과 부정할 수 없는 물질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고 시각에 호소하는 그림과 촉각에 기대는 그림이 상호길항한다. 그것은 망막에 호소하면서도 동시에 촉각을 유인한다.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더듬고 싶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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