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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 / 빈풍경 혹은 반풍경

박영택

이것은 풍경사진일까? 새까맣거나 깊이 있는 검은 색톤이 심연처럼 혹은 무어라 규정하기 곤혹스러운 흑백의 섬세한 뉘앙스로 절여진 사진/인화지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어느 공간이 펼쳐져있다. 매우 높은 위치에서 혹은 바닥에 붙어서 원거리로 포착한 공간은 특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체 돌연 멈춰있다. 가시적이면서도 어딘지 눈 대신에 다른 감각기관 내지 상상력을 요청하는 사진이다. 그것은 풍경에 대한 일반적인 코드에서 벗어나 있고 풍경사진의 익숙한 재현적 시스템에서 한 발 물러서 있다. 빈풍경, 반풍경 같다는 생각이다. 분명 특정한 장소성을 보여주지만 그 대상을 심미적으로 재현하거나 특정 공간에 대한 메시지를 들려주지 않는다. 보여주면서도 뭘 보여주고 있는지 애매하다. 그러니까 시각으로 접하지만 시각 너머로 무엇인가가 스물거리면서 다가오는 기이한 사진이다. 눈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 또는 정작 가시적 세계에서 벗어난 비가시적 세계를 꿈꾸고 떠올리게 해주는 사진이다. 망막이 아니라 다른 감각기관 내지 감각적 소여를 통해 몽상에 젖어들게 하는, 상당히 감성적인 부위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이의 기억에 의존해 마냥 부풀어 오른다.

흑백 모노톤으로 절여진 이 사진은 일반적인 풍경, 지루하고 적막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만을 창백하게 보여준다. 숲과 나무가 있는 공원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여 부산했었을 운동장, 텅 빈 운동장을 보여준다. 물론 특정 장소에 대한 어떠한 표식도 증발시킨 체 말이다. 사람의 자취는 부재하고 그저 모종의 상황이 벌어졌었을 것 같은 기미를 상상케 한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고 남겨진 공간은 그곳에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려준다. 그들의 몸놀림, 튀어 오르는 공의 탄성으로 인해 공기를 찢었을 소리, 자연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아울러 비릿한 풀내음, 땀냄새 등도 안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보다 어딘지 강렬하고 아스라한 잔상을 상처처럼 안긴다. 사람들의 음성과 이런저런 소리들, 바람소리와 새소리, 어디선가 끊이지 않는 소음들과 냄새를 정신적 활력을 통해 감지케 해준다. 근대에 들어 오디오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은 온갖 소리에 귀를 내주었다. 모든 공간은 소리로 채워져 있다. 싫든 좋든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산다. 소리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자연계의 소리란 그 소리를 듣는 순간만 존재한다. 그러나 오디오는 그 소리를 저장하고 지속해서 소리를 틀어준다. 시간 속에서 살다 가는 음은 영구한 삶을 부여받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로인해 침묵은 지워지고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 속에 귀를 저당잡혔다. 사람들은 고독과 멀어졌고 자연스레 자신의 내면과도 떨어져나갔다. 이미지는 본래 소리가 배제되어 있긴 하지만 전병철의 이 사진은 세계/풍경의 소리를 죄다 지우고 근원적인 고독으로 보는 이의 눈과 귀, 마음을 흡입해낸다. 자신이 내면을 통해 세계를 다시 보게 한다. 소리를 상상하게 하고 다른 감각기관의 밸브를 죄다 열어놓게 해준다. 그런가하면 고요하고 적조한 풍경은 어딘지 쓸쓸하고 공허해 보이는 한편 잠시 살다 가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남아 누군가의 육체를 받아주기를 거듭할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것 같다.
작가는 별다른 드라마 없이 마냥 정적인 순간의 상황을 잠시 응고시켜 놓았다. 특정 시간은 멈추고 고요하게 잦아들어 사라지기 직전이다. 소리와 움직임이 지워진 이 현실계는 순간 납작한 2차원의 세계가 되어 인화지의 피부에 밀착, 들러붙어버렸다. 납작하게 밀착된 현실계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평평한 화면, 그 허구적 공간안으로 들어와 스며들어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힘든 장면이다. 시각으로 확인하기 어렵게 원경으로 포착한 장소는 보는 이를 그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뜨리고 유배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속한 세계가 저 멀리로 물러앉아 점점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찰나적으로 보여주는 듯 해서 사뭇 애상하다.

작가는 그토록 평범한 주변의 일상 풍경이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 하는 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는 매일 접하는 현실 안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나려 한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의 어떤 찰나의 순간을 건져 올려 찍는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해주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드는 순간을 사진으로 재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찰나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그러나 이 특별한 순간이라고 작가가 여긴 것은 사진으로 고정되는 순간 다시 평범한 현실의 풍경, 일상이 되어버렸다. 일상과 일상 너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느낌이 사진 속에서 공존한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늘상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안에 감춰진, 그것이 두르고 있는 독특한 순간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은 그것을 보게 하는 이들이다.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일상속의 비일상, 현실 속의 비현실, 사물 속의 꿈, 풍경 속의 또 다른 세계가 이어져있고 결국 모든 것은 저 마다의 통로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현실계에서 이상을 만나고 꿈꾸고 숨겨진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사진은 그 발견을 기록한다.
현실과 공존하는 비일상/비현실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다. 현실과 비현실은 한 몸으로 섞여있다. 실재하는 현실과 그와 겹쳐진 묘한 감정과 느낌, 기억과 몽상이 서로 얽혀서 만드는 것이 현실계다. 작가의 사진은 꿈과 현실이 구분없이 뒤섞인 장면을 환각처럼 안긴다. 실상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진은 인증의 자료이거나 주어진 대상세계를 기록하는데 멈추지 않고 그로부터 더 나아간다. 평범한 일상 속에 찾아오는 현실적인 특별한 순간을 호명하고 이를 인화지 표면으로 불러들인다. 그것은 무슨 초혼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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