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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상 / 수평을 보여주는 수직의 못

박영택

수평성
옆으로 길게, 수평으로 펼쳐진 화면은 옆으로 펼쳐진 장면을 받아낸다. 그것은 바다, 숲, 그리고 옆으로 써나간 필기체 문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회임한다. 수직의 세계에 반한 이 수평은 시선을 좌우로 연장시키고 몰고나간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신체의 움직임을 허용하고 화면을 정면성의 법칙에 따라 한 번에 포착하게 하기 보다는 천천히 더듬고 훑어나가게 한다. 깊이로 파들어가지 않고 옆으로, 옆으로 느리게 이동시키거나 배회하게 한다. 작가는 자작나무로 이루어진 합판을 사용한다. 우선 나무의 결을 지우면서 그 위로 4~5번에 걸쳐 젯소를 바른다. 더러 젯소에 바인더를 섞어서 칠하기도 한다. 이후 사포로 갈아내고 가공한 후에 밑그림이 올라간다. 사진을 프린트해서 올려놓기도 한다. 밑그림과 사진은 대부분 풍경이미지다. 그것은 나무/숲이거나 바다 등이다. 수평으로 펼쳐진 막막하고 숭고함을 자아내는 자연풍경인데 더러 필기체로 쓰여진 문자/영문이 등장한다. 내용은 읽히지 않은, 따라서 글씨 자체가 지닌 조형성 자체를 주목시키는 이 작업 역시 글자들이 수평으로 드러누워있다. 바다도 누워있고 숲 역시 옆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그가 선택한 대상, 이미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구체적인 대상이라기 보다는 수평을 보여주기 위해 본래부터 수평성을 지닌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 수평성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사각의 화면에 부단히 일치하는 수평의 존재가 올라가는 형국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 수평성은 이미 90년대 후반 작업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수직에 반한 수평의 시선에서 마음의 위안과 평온함을 느끼고 있다. 대지와 바다의 선이자 주어진 화면을 적절하게 분할하고 구분하고 있는 수평선은 시선을 가라앉히고 모든 시욕망을 휴지시키는 선이다.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절대적인 선이자 모든 것을 평온하게 가라앉히고 구분과 차별을 무화시키는 선이기도 하다. 또한 캔버스나 판넬의 밑변과 일치하면서 차오르는 수평은 가장 일차적이고 근원적으로 화면에 남겨지며 시선에 안기는 선/구분일 것이다. 수직으로 박히는 못
수평으로 펼쳐진 화면위에 시술되는 이미지는 어둡고 밝은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 밑그림일 경우 제일 밝은 부위에서부터 짙은 영역에 따라 구분을 해둔다. 사진프린트일 경우도 동일하다. 이 같은 밑작업이 끝난 후에 드디어 힘을 모아 못을 격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격 행위에 해당한다. 에어 타카 같은 기구를 사용하여 못을 촘촘하게 박아 넣는 것이다. 작가는 평면에 못을 밀어 넣는다. 이 못은 테커용 핀 못으로 자잘하고 균질하며 촘촘히 박을 수 있는 못이다. 작가는 평면의 화면 앞에 직립해 서서 못으로 일격을 가한다. 그리거나 칠하는 게 아니라 박고 때리는 다분히 폭력적 행위, 상처와 공포를 동반하는 강도와 격발음이 역설적으로 지극히 평화롭고 침묵으로 절여진 풍경을 떠올려주는 아이러니, 모순이 깃들어있다. 작가는 납작한 화면의 평면성에 수직의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깊이로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못들은 일정한 지점에서 멈춘다. 못은 주어진 평면에 직립해서 박힌다. 단호한 바탕을 뚫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박힌다. 그것이 못의 운명이다. 못은 그렇게 표면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에 걸쳐있다. 못은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 증거한다. 못은 못의 신체만큼만 그 영역을 지도화한다. 그것은 단호하고 정직하다. 대개 못을 박는 것은 일상적인 삶에서 실용적인 일의 차원이다. 그러나 유봉상의 경우는 못박기의 유희이다. 그는 엄청난 양의 못을 박는다. 순간 그것은 점이 되고 점들이 모여 선과 형상을 만들어 보인다. 빛을 받는 밝은 부위에 못들이 집적되는 것이다. 못이 박히는 곳은 밝게 빛나는 영역이다. 못대가리가 밝은 부위를 점으로 지시하고 증거한다. 빛이 못으로 새겨지고 빛나는 부위가 판넬에 박힌 것이다. 그것은 못이 발기된 부위들이다.

마치 햇살이나 빛이 쏟아져서 실재하는 물질로 고정되어 버린 듯하다. 그러니까 못을 쏘아 박는 것은 그 부위에 빛을 모아주는 행위다. 빛을 받는, 밝은 부분을 찾아 못들은 이동한다. 못이 박히면서 빛을 걸어둔다.(앙리 프랑스와 드바이유) 못이 지닌 금속성의 물체, 색상, 질감이 고스란히 빛으로 치환된다. 못들이 박히고 그 위로 물감이 입혀지고 못대가리를 갈아내는 그라인더의 방향과 각도의 조절로 인한 차이, 그리고 빛을 받으면서 비로소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못이 박히면 전체적으로 착색을 가하는데 어두운 색상이 짙고 강하게 깔리면 이후 갈아내기를 통해 비로소 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못들이 빛을 발산한다. 그로인해 가시적인 존재가 드러난다. 단순해보이던 못박기가 놀라운 이미지로 환생하는 것이다.


진동하는 자연
역설적이지만 그는 수직으로 존재하는 못의 운명을 수평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직으로 밖에는 설 수 없고 존재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오직 수직으로만 증거하는 못이 결국은 수평으로 의미를 부여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평적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수직성만이 아닌 그것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음을 떠올렸을 때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못의 머리는 점으로 존재하고 하나하나의 빛으로 돌올하다. 못들이 박히고 점들이 모여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명암의 극단적 차이를 보여주면서 기이한 환영을 자아낸다. 그 못의 머리, 관자의 눈에 다가오는 최전선이 점이 되고 이 자잘한 점들은 보는 이의 거리, 각도와 시간에 따라 조명에 의해 변화무쌍하게 변화되어 간다. 시각적 진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움직이는 화면이다. 슬로우모션으로 뒤척이는 자연, 바람결에 따라 햇살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고 움직이고 호흡하는 자연의 살들이 느껴지는 결을 느린 영상으로 포착한 자연이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고 흐르며 빛의 파장을 거느리면서 돌아다닌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풍경은 이렇게 움직이고 부유하며 어딘지 불안하게 떠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다. 영상적 기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움직임, 흐름, 시간의 이동 등을 매력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이 회화는 느리고 더디고 단호한 못박기가 역으로 부드럽고 잔잔하며 서서히 움직이고 진동하는 세계의 맥박을 건져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못들이 문자가 되고 바다가 되고 숲, 나무가 되었다. 아니 빛으로 파득거리면서 어둠 속에 묻혀있던, 부재하던 망각되던 존재를 다시금 되살려낸다. 못이 문자, 바다, 나무로 환생한다. 기이한 변신이고 놀라운 전치다. 일상적 삶의 문맥에서 실용적 가치를 지니고 있던 못이 그렇게 당연시되던 사물성에서 벗어나버렸다. 그것은 그림을 이루는 물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지만 동시에 단호한 단색의 색채추상이며 동시에 그 둘이 모여서 매우 구체적인 재현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숲이나 바다, 문자는 부재하다. 다만 못들만이 촘촘하고 울울하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옆으로 부드럽게 누워서 이동해가는 문자의 행간들, 처연하게 드러누운 바다, 바람에 뒤척이는 숲이 나무들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질과 이미지 사이에서 기이하게 존재한다. 환영과 사물성 사이의 경계에 위치해있다. 물질과 형상 사이에서 애매하게 뒤척인다. 동시에 이것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 있다. 식물적 상상력
그것은 숭고함을 자아내는 자연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섬세한 손놀림(필사)과 감정과 의식을 받아내는 편지(문자)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숲과 바다에서 엽서를 보내오고 있는 듯 하다. 그의 그림/작업 하나하나가 마치 그림엽서 혹은 사진이 담긴, 그리고 한 개인의 고유한 필치로 써나간 간단한 사연을 저장한 엽서가 되어 보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문명의 대표 물질인 금속/못이 최종적으로 자연으로 귀환한다. 고요한 자연의 풍경, 심미적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서정국의 스테인레스 스틸 조작들을 잇대어 용접하고 밀어올려 대나무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혹은 김종구가 쇳가루를 깍아서 바닥에 뿌려놓고 빗자루로 쓸어 모아서 이를 CC카메라로 비추면 화면에 자연풍경이 만들어지는, 금속물질이 자연을 모방하고 실재의 자연을 떠올려주는 작업과의 공유성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사물이 생명을 흉내내는 의태에 연유한다. 여기에는 죽은 사물의 세계를 유기체화 하려는 식물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죽어있는 것, 생명이 없는 것, 차갑고 딱딱하고 견고한 것들에 온기를 불어넣어 싱싱한 자연의 삶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것은 금속성의 육체로 의사재현된 자연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여전히 자연의 모방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려주는 것은 아닌가? 예술과 자연의 구분과 차별이 없는, 둘이 슬쩍 서로의 몸을 감추고 종내는 지워져버리는 그러한 경지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미술이 그렇게 자연과 조심스레 하나가 되고 닮아가면서 종내는 구분없는 경지로 걸어들어가는, 스며드는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삶과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 의미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며, 의미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조차 나와의 교감이 없다면 죽은 무생물에 지나지 않으며 대신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 바람 한 점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말을 걸어올 때 유생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물이 갖는 생명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통로가 바로 물질적 상상력이다. 유봉상의 못 작업 역시 그러한 상상력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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