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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 자연과의 조응, 그 몸에 참여하기

박영택

정영자의 조각은 자연 대상에 대한 조형적 해석이자 자연과 교감한 내밀한 기록, 그 형상화에 속한다. 가시적 존재인 자연 세계의 이면을, 그 속살을 엿보고 이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는 원형과 유기적인 곡선, 꿈틀거리며 방사하는 빛살 같은 선들, 나뭇잎과 무당벌레 그리고 사람의 몸과 얼굴 등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문장의 단어들처럼 조합되고 연결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이 상징적 언어나 기호들은 생명, 생명력, 기운(에너지), 욕망, 아름다움, 몽상과 꿈 등을 표상한다. 이렇게 나열된 단어는 작가가 자연에서 받은 인상, 느낌을 대변한다. 동시에 그 자연을 바라보면서 품게 된 상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는 그러한 단어에 대입되는 형상을 형태화, 질료화 한다. 빛나는 스테인레스의 매끈한 표면, 꿈틀거리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곡선들, 붉은 색의 원/알, 끈적거리며 흐르는 액체성 내지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다만 유동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물질 등으로 멈춰있다. 조각적 재료/물질의 질료적 속성과 그것이 지닌 바탕, 색감 등을 주제를 드러내는 표현적 단위로 삼는 한편 차가운 금속성 물질을 흡사 식물성의 섬유질 마냥 부드럽고 유연하게 추출한한다. 그것은 작가의 부조작업에서 또렷하고 풍부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차갑고 단단한 스테인레스 스틸을 두드리고 용접해서 식물의 형상과 그 내면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힘, 생명력을 가시화한다. 그것은 자연을 모방하는 일이자 자연의 이치나 본질이 시각화, 물질화될 수 있는 길을 여는 일이다. 그것은 작가가 보고 느끼고 깨달은 형상, 이미지다. 스테인레스 스틸이 발산하는 환하게 발광하는 빛은 자연, 생명체에서 발산되는 기운 내지는 모종의 아우라에 해당한다. 작가는 그 빛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고된 노동을 통해 금속은 식물/자연에 접근한다. 불임의 금속이 유기적인 생명체를 흉내낸다. 생명체는 대부분 원형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 안으로부터 발산되는 기운이 방사형으로 부채살처럼 퍼져나가고 그것은 흡사 빛을 연상시킨다. 온통 꿈틀대고 외부로, 밖을 향해 퍼져나가는 생명력, 기운의 이미지화다. 동시에 부조는 스테인레스 스틸과 동, F.R.P로 그려져/조각되어 있다. 유동적인 액체성과 운동과 속도감을 보여주는 물질의 상황성이 극대화되어 있고 눈물,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형상이 활달하게 위치해있다. 그것은 회화적인 조각, 부조다. 작가는 성질이 다른 물질을 이용해 그 고체성과 단단함을 풀어헤치고 유연하고 기화되는 성질의 것으로 변질시킨다. 물질이 본래 지닌 성질이 슬쩍 지워진 자리에 질료들은 경계없이 서로 녹아 흐르고 섞이면서 겹친다. 이는 모든 자연계의 생명체와 대화를 나눈 흔적들인데 차가운 불임의 금속이 유기적인 생명체로 환생하면서 자아내는 풍경, 서로 다른 사물들이 초현실적으로, 몽상적으로 만나 그려낸 풍경이 매력적이다. 그것은 자연/생명체에 대한 경외와 그 속에 속한 인간 자신에 대한 단상과 겹쳐있다. 자연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람이 자연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매우 닮아있기에 그렇다. 아니 인간 역시 자연의 한 조각, 편린이다. 인간은 자연 속에 포함된 또 다른 자연인 것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에 걸쳐 자연에서 진화해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을 체험하면서 깊은 흥분과 기쁨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자연 안에 우리가 살아온, 겪어낸 생의 흔적이, 그 아득한 세월동안 축적되고 계승된 삶의 섭리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종 역시 다른 생물들과 똑같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구 표면을 뒤덮고 있는 얇디얇은 생물권에 절묘하게 적응해 왔다. 이 신비하고 기적적인 삶을 생각해보면 나와 저 자연 속 무수한 생명체는 동일한 궤적을 힘겹게 살아온 존재임을 알게 된다. 나뭇잎하나, 풀하나, 무당벌레 한 마리가 경이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이 작가는 자연을 관찰하고 바라볼 때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것과 교감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문득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초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이 생명체의 기적을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주변에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관조하고 감상하는 일상이 자연스레 작업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다가 어느 날 무당벌레를 만났으며사계절의 변화를 겪는 나뭇잎과 바람소리와 비상하는 새의 날개를 눈과 마음에 담아두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그것들이 적합한 물질을 빌어 환생한다. 초현실적인 병치와 만남으로 혹은 금속성이 식물성으로 변신하면서 말이다.

자연이 베푸는 수많은 수수한 즐거움, 예를들어 빛과 색의 유희, 대기 중 향기, 살갗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 귓전에 와 닿은 약동하며 솟아오르는 생명의 율동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이 주는 기쁨을 누리는 일은 이 작가에게는 다분히 의식적인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선택일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작품으로 재현한다. 자신이 본 것을 재창조한다. 그것은 자연을 관찰한 핵심이다. 정영자의 조각은 생명이 흐름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의 작업에 해당한다.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자연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고 한다. 보는 것과 그리는 것, 만드는 것은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로인해 더 이상 작가는 나뭇잎 한 장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나뭇잎의 삶에 직접적으로 공명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생명에 대한 경이와 함께 사물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생명의 에너지를 나의 감성의 그물망으로 건져올려낸다. 보여지는 자연의 이미지를 초현실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이미지와 접합시킨다. 자연이 만드는 유려한 곡선들, 생성하는 식물들이 쏟아내는 아름다운 곡선들 사이로 나는 그들과 함께 숨을 쉰다. 자연의 생명력이 인간의 생명력과 조우하며 서로의 세계를 넘나들며 무언가 창조해낸다. 모든 형상은 꿈틀대기 시작한다.' (작가노트)

작가는 무엇보다도 나무를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사시사철 변하는 잎의 모습과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은 매혹적이다. 그 나뭇잎을 보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떠올려보는 한편 그 위로 자연스레 인간의 생명력을 얹혀놓았다.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 같은 것이 아니라 잎사귀와 사람의 얼굴, 몸통과 나무, 나비와 새의 날개와 사람 등이 접목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몸통에서 나뭇잎이 자라고 잎맥과 숨 쉬는 모습이 오버랩되어 있다. 어느 나뭇잎 위에는 빨간 무당벌레 하나가 올려져있다. 그것은 자연, 신이 만든 아름다운 이미지, 아주 미세한 아름다움이다. 인간은 그 자연, 생명체와 대등한 존재다. 나무이자 잎사귀고 나비이자 새, 나무와 바람이 되었다. 그것들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대칭적 사유는 인간중심적인 사유구조를 슬며시 깨며 범신론적, 생태주의적 사고로 번진다. 작가의 몸이 수시로, 거듭 자연의 몸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술이란 것 역시 자연의 형식과 조응하는 몸의 형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틀이다. ‘내’가 자연을 전용,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자연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유기성 안에 살고, 우주의 미로 안에 살아있는 유기적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술은 바로 그러한 변형의 역할 속에 있다. 정영자의 조각 역시 그러한 자리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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