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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두 가족의 그림세계

박영택

인생에서 ‘만남’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가장 매혹적인 터닝포인트다. 생각해보면 삶의 결정적 순간은 그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늘 누구를 만나 자신의 영혼이 사로잡히고, 매혹되기를 꿈꾼다. 예술가의 경우, 어느 시기에 누굴 만나느냐는 그 자신을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진화를 겪게 한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예술가들에게 있어서의 ‘만남’은 결국 세기적인 스캔들이 되며, 그 예술가로 하여금 창작의 핵심으로 인도하는 근원적 힘을 부여해왔다. 이른바 뮤즈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성으로서 한 쌍을 이룬 두 사람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 부단히 매혹적일 수 있다. 동반자 관계의 끝없는 복합성에 대한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예술가 부부, 화가부부와 미술인 가족은 창작행위를 위해서는 상당히 자극적이고 매력적인 결합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는 미술인 부부와 가족구성원들이 매우 많은 편이다. 이전과 달리 오늘날은 미술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편이다. 미술인 부부, 부모들의 자식들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오히려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미술 작품은 개인의 단독 작업에 의해 창조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가족간, 부부간, 그리고 이성간의 관계 설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면, 창조적 활동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이런 구조에서 탈피되거나 탈피하지 못하는 채로 대안적인 이야기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도 흥미있다. 부부간, 혹은 가족구성원간의 공동작업에 대한 개념, 그러니까 ‘결합 속에서 성취와 자기 표현을 위한 두 사람의 투쟁’(샤리 벤스톡)을 살펴본다는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일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 쌍이란 인간의 동반자적 관계상의 여러 배열 중 하나일 따름이다. 예술가들이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산다고 할 때, 그들은 서로의 예술에 어느만큼 영향을 미치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으로서 뮤즈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일까? 화가에게 연인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존재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화가들은 연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간다.

흔히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한다. 두 개의 개성이 닮는다는 것은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쪽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에 연유됨이다. 부부로서의 생활과 예술가로서의 결합이란 이처럼 까다로운 내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둘의 창의성과 영감, 에너지의 공유가 서로에게 깊고 넓은 자극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가족간의 경우도 그럴 것이다.

올해는 하인두선생이 돌아가신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1989년 선생의 마지막 전시를 보았단 나로서도 감회가 남다르다. 병마와의 투쟁 속에서 마지막 안간힘으로 붓을 들어 그려나간 작품과 그렇게 마르고 헬쓱한 선생의 모습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흘렀다니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후 나는 어떤 인연에서인지 부인 류민자여사와 딸 하태임, 그리고 사위인 강영길의 작품을 접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인두선생부부와 그 가족들의 작품세계를 우연치않게 늘상 접해왔던 것이다. 마침 올해 20주기를 맞이하여 이 미술인 가족이 함께 전시를 마련하였다. 선생의 죽음을 기리는 한편 유족들이 여전히 선생의 길을 이렇게 따라가고 있음을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부인과 자녀, 그리고 사위가 무두 미술과 사진작업을 하고 있는 미술인 가족이다. 가족이자 도반의 관계를 새삼 각인하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이 미술인 가족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서로간의 영향관계를 엿볼 수도 있고 동시에 그로부터 얼마만큼 비껴나간 자리에 자신만의 창조적인 샘을 파고 있는 가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인두
한국전쟁 이후 서구현대미술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추상미술을 받아들인 대표적인 작가에 속하는 그의 고민은 추상미술이란 것이 서구미술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나온 산물이라는데 있었다. 서구 전통회화(사실주의)에 대한 부정과 비판의식 아래 나온 추상미술은 서구와 동일한 미술의 역사를 지니지 못한 우리의 경우 단순한 형식적 추종이나 문맥을 상실한 외양의 답습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하인두는 우리 전통미술에서 추상성, 추상적인 미술의 한 요소를 끌어내고 이를 하나의 정신세계로 포용해내는 논리를 개발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의 전통미술과 불교적 세계관에 주목했다. 한국적 추상미술에 대해 고민하던 그가 만난 것이 다름아닌 오방색과 단청, 만다라였고 이 소재를 응용해 독특한 추상작업을 선보였다. 그러니까 동양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도상, 이콘 안에 잠재된 무한한 추상성에 새삼 주목한 것이다. “추상을 하되 서구적 앵포르멜을 벗어나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이나 불교사상을 재분해 재구성하려고 했어요. 요즘 작품은 깊은 사색에서 오는 여유와 기쁨, 인간의 환희를 지향하고 있어요. 내 그림은 여러 패턴의 반복으로 이뤄지지만 항상 캔버스 복판에 구심점이 설정돼 있고 중심을 향한 축이 있습니다. 일종의 우주도(宇宙圖)라고 봐도 되지요. 태극의 형상이 우주생성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제 그림도 불교사상과 우주에 대한 여러 연상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작가노트) 그는 물감을 묽게 기름에 개어서 번지게 하거나 흘러내리게 하면서 때로는 불규칙하고 때로는 규칙적인 형태를 반복시켜냈다. 정신의 승화, 인간성의 고결함, 감정의 깊이가 담긴 생명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색 띠가 무수하게 얽혀있고 방사형으로 퍼지는 그림들은 어느 옛 절간 천정의 단청 무늬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특별한 무엇을 상징하거나 표현하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한 정신의 조화로부터 우러나오는 빛남’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류민자
류민자는 불교적 도상인 반가사유상의 얼굴이나 탑, 여인, 자연 등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하고 배열해왔다. 명료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으로 이른바 만다라적 세게관을 역시 형상화해왔다고 본다. 그런면에서 남편과의 깊은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구체적인 형상, 도상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잠긴 ‘생명의 방식’이랄까 혹은 보이지 않는 구조와 관계성에 대한 천착을 가시화하는 데 관심이 더 컸다. 특히 그녀는 자연이 보여주는 생명력의 표상에 주목하는데 작가에게 이 자연은 ‘무한한 창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자연을 통해 그 자연이 내포하고 있는 구조적 본질을 분석하고, 또 자연의 질서와 생명의 규칙, 또는 보편성 속에서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찾아 나의 삶과 일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또는 부정하기도 하면서 추상과 구상의 경계도 없는 현실과 이상을 오가며 다양한 표현방식이 내 화폭에 담아지기를 바랄뿐이다.”(작가노트)
작가는 자신이 평생 추구한 세계가 다름 아닌 생명의 규칙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 생명의 법칙은 작가가 스스로 부여한 질서라고 생각되는데 동어 반복적인 표현이나 구획을 이루어 제각각 자리를 잡은 형태들이 사실 그러한 예다. 하나의 구획을 지닌 선 안에 보색이 섞여있고 공존한다. 저마다 독립된 단위의 붓질, 선, 면이 서로 공존하고 기생하며 오롯한 얼굴, 자연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그녀는 오랫동안 표현하던 불가적 생각이나 선의 경지나 나아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세계가 그리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인간이 바라는 진리였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진리는 그림안에서, 그러니까 조형언어에서는 형태의 원형에 대한 탐구로 제시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형태의 원형이라 함은 점, 선, 면으로 귀착되는 조형요소로서의 원형이 아닌 물상의 원형 이를테면 형상이 갖는 의미체로서의 원형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이 지닌 진실을 표현하는 하나의 체계라 할 것이며, 작가가 이해하는 세계에 대한 서술방식이기도 하다. 동시에 오랫동안 사유해온 작가의 자연과. 생명관의 이미지화이다.


하태임
하태임은 화면위에 색/붓질을 연속적으로 그어나간다. 칠해나간다. 그 붓질은 하나의 선이자 색면이고 캔버스 평면을 압축해서 올려놓은 또 다른 평면/화면의 역할을 한다. 칠하고 그려나가는 동시에 지우고 덮어나간다. 여기서 색들은 그림을 그리는 자, 자기 존재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 각각의 색채/붓질은 그대로 하나의 생명체라 스스로 소리를 내고 호흡하고 살아 약동한다. 그리고 그것들끼리 어떤 모종의 관계를 만들고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보는 이들은 그 각각의 분절되어 보이는 붓질/색면을 통해 상상과 환영을 가설하도록 권유된다. 화면은 두 개의 층을 이루면서 또 다른 공간의 깊이를 열어놓는다. 화려한 색상들이 붓의 형태에서 연유한 꼴을 형상으로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불가피하게 그림의 도구에서 비롯된 형태/상이다. 이 붓질은 특정한 존재를 재현하거나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림, 그려지고 칠해지는 상황을 전달하는 기호의 역할을 한다. 동시에 그림의 신체성을 확인시킨다. 작가의 붓질/선/형태는 목표지점 없이 혹은 뚜렷한 방향없이 그저 주어진 사각형의 평면/ 화면안을 채우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 붓질은 사각의 프레임 밖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회화의 운명이고 존재론적 조건이기도 하다. 무목적적인 회화의 삶, 정처없이 떠도는 붓질의 생애는 동시대 회화의 운명에 대한 은유의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그러한 것들이 모종의 ‘통로’를 만들어주는 한편 보이는 것 이면의 또 다른 비가식존재를 상상하게 해준다.

“나의 작업의 핵심은 조화에 있다. 이 조화란 감추어진 색채와 드러난 색채들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의미하며, 화면에 병치된 붓질의 다양한 패턴을 화면에서 구조적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의 발단은 가시적인 색채가 비가시적인 어떤 인상에 다다를 수 있다는 관념을 기초로 시작되었다.”(작가노트)
하태범
하태범의 작업은 인터넷에 올라오는 여러 사건을 다룬 뉴스의 사진자료, 이미지들을 수집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에 대한 관찰과 관심에 해당한다. 그 이미지들은 대부분 전세계 분쟁지역의 이미지, 그러니까 테러와 전쟁,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잔해와 폐허 등이다. 오늘날 이 같은 참상은 단지 이미지로만 소비되고 환영처럼 지나간다. 영상매체의 비현실적 이미지로만 현실의 구체적 사건들은 소모되고 증발된다. 하태범은 그런 이미지를 수집한 후 이를 폐종이 등을 사용해 작은 모형으로 재현했다. 무채색, 혹은 회색으로 물든 이 종이모형은 사진속의 실제 장면과 닮았으면서도 기이한 차이, 틈을 발생시킨다. 온통 회색톤으로, 탈색된 장면은 특정 상황을 모방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을 가상으로 보여준다. 폭격(전쟁과 테러)과 폭력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잔해물만을 초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이 작은 조각(미니어춰)은 사진으로 촬영되어 흡사 실제인냥 위장된다. 그러나 인증의 자료인 사진 안에 들어온 장면, 상황은 사실 허구다. 작가가 이미지를 보고 만든 이미지/조각이다. 종이라는 재료가 콘크리트나 철근, 돌의 물성을 위장하고 견고함을 부드러움으로 연기하고 색의 세계를 무화하고 탈색시켜 중화하는 한편 끔찍한 장면을 꿈처럼, 몽환적으로 재현한다. 사진을 이용한 흥미로운 트릭구사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잔혹함에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눈과 마음을 텅 빈 공허와도 같은 회색톤으로, 그렇게 낯설고 전도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열길
강영길은 자연을 사진적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그동안 구름과 바다를 촬영해왔는데 최근에는 대나무를 찍고 있다. 근작은 담양의 대숲에서 촬영한 것들인데 한결같이 짙고 어둡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밤을 배경으로 대나무 한, 두 그루가 직립해있는 장면이다. 흑백사진이 지닌 절제와 깊음이 잘 드러나있다. 대나무란 동양문화권에서는 상징적인 기호체계다. 그것은 동시에 전통적 문화와 사유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작가는 대나무에 들러붙은 수많은 의미체계를 상기시키는 것보다는 대나무 자체가 지닌 생명력이랄까, 생장력 혹은 존재에 주목한다. 어둠을 배경으로 쭉쭉 솟아오르는 나무의 줄기와 매듭부분은 빛을 발산한다. 그것은 사물 내부에서 번지는 일종의 생명의 아우라와도 같다. 이 사진은 대나무란 존재를 새삼 오랫동안 응시하게 해주고 그로인해 생각하게 해준다. 대나무에 따라붙는 모든 관념과 의미를 지우고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대나무만을 보게 한다. 대나무란 존재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유년의 기억과 상흔 또한 오버랩시켜본다. 결국 그의 대나무는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대나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간에는 부정할 수 없이 동양의 자연관, 생명관에 대한 인식의 일단도 스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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