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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인아 / 실재와 부재 사이의 동물들

박영택

탁인아는 동물을 촬영했다. 강아지나 고양이, 십자매나 이구아나, 파충류 등과 같이 집에서 애완용으로 기르고 보살피는 짐승들이나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갇힌 동물들, 혹은 산이나 들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동물들은 찍은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동물들이냐 하면 이른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동물, 의사동물의 형상들이다. 이른바 지극히 사실적인 환영으로 가공된 가짜, 키치적 동물들이다. 그러니까 한우갈비집 앞에 서 있는 소, 도심 한 복판에 장식용으로 세워져 있는 코끼리나 사슴, 팬더곰, 호랑이 혹은 사슴, 그리고 대게와 돌고래, 심지어 공룡들이다. 그 한 켠으로 유원지에서 타는 오리 배도 놓여있다. 그런가하면 TV에서 방영되는 동물의 모습도 찍었다. 모니터 안에서도 여전히 동물은 존재하고, 보여지며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동물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익숙하고 일상적으로 들어와 공존한다. 그것이 실재하든 혹은 가짜로 존재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까마득한 시절부터 동물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더러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영성적 존재로 또는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그런가하면 식용과 의복, 도구와 애완용 등으로 다루어져왔을 것이다. 동물의 쓰임새는 한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그 동물의 주된 쓰임이 좀 더 강력한 차원에서 혹은 스펙타클한 지점에서 시각적 오브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전적으로 볼거리나 보는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일단 인형이나 장식용품, 조형물, 열쇠고리 등등 온갖 동물의 형상을 한, 그 캐릭터 용품들이 흘러넘친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느닷없이 동물의 형상을 한 각종 조형물들도 포진하고 있다. 복 집 건물의 외관에는 거대한 복어가 매달려있고 대게집에는 엄청 큰 대게가 부착되어 있는 식이다. 좀 의아하고 이상하다. 생각해보면 동물의 이미지를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온 역사가 인간의 역사다. 동물을 사육하고 삶의 공간에서 함께 공존해온 역사는 분명 인간이 필요로 해서이지 동물의 자발적 의지는 아닐 것이다. 동물의 형상을 마음껏 사용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동굴벽화 속의 들소나 암각화로 새겨진 고래, 고구려고분 안의 사신도, 민화 속에 등장하는 용이나 봉황, 소반을 받치는 개다리 그리고 이발소 그림 속의 돼지, 연인들이 주고 받는 곰인형, 여우목도리 등등 셀 수도 없다. 그렇게 인간은 동물들을 관리하고 편의적으로 다루고 자의적으로 활용해왔다. 동시대는 그 동물의 이미지를 마음껏 소비하는 시대다.

탁인아는 우리 삶의 이곳저곳에 어떤 특정한 목적을 지닌 체 혹은 거의 방치되어 있듯이 자리한 동물의 형상을 한 조형물을 찍었다. 그것은 상당히 큰 인형이기도 하다. 다양한 목적 속에 이 가짜 동물들은 실제를 대신한다. 비교적 정교해서 진짜로 오인할 정도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마치 설치미술처럼 도시에 서 있다. 그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보다 실감나게 증거하기 위해서 차용되거나 순수한 시각이미지로 감상하게 하기 위해, 또는 사람들이 동물을 원하는 여러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연/ 동물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불려 나왔다. 침묵 속에 부동으로 얼어버린 동물인형들은 지나다니는 인간을 무심히 바라보고 도시를 응시한다.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생명을 흉내 내고 산 존재인 듯 자리하고 있다. 무척이나 낯설고 순간 ‘언캐니’ 하다는 느낌도 든다. 어쨌든 좀 이상하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부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존재와 부재 사이, 삶과 죽음 사이, 실재와 가짜 사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있다. 그것은 경이(the marvelous)와 기이(the uncanny) 사이에 위치한다.
언캐니‘uncanny의 독일어인 ’Unheimlich‘에는 두 가지 층위의 의미가 있다. 이 단어는 한편으로는 ’가정적인, 친숙한, 다정한, 쾌활한, 편안한, 친밀함‘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숙하지 않은, 불편한, 낯선, 이질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기이함의 의미는 바로 이 두 의미론적 층위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이한 것은 현실 속에서의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형성된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단지 억압과정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소외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투사에 다름 아니다.”
프로이트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이함은 감추어진 것을 폭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섬뜩하게 변형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기이한 것은 오래되고 낯익은 어떤 것이 억압되어 정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테바는 기이함이란 ‘쾌락이 억압되는 바로 그곳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이러한 기이함의 효과는 전혀 낯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하고 자연적인 것 뒤에 감춰진 모호하고 폐쇄된 영역의 가시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때 그 환상성의 공간은 초현실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 이면에 감춰진 틈새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환상성은 낯익은 것을 낯선 것으로, 안전한 것을 불안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든다.
한편 환상 속에서 오래되고 친숙한, 그러나 불안한 욕망들은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억압된 것의 회귀’라고 불렀다. 이런 환상성은 욕망의 대리충족을 제공하고 위반을 향한 충동을 중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제도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위험과 공포, 그리고 사나운 야성, 본능이 깡그리 지워진, 박제에 다름 아닌 이 친숙한, 그러나 기이하고 환성적인 동물 형상이 일상공간에 이렇게 넘쳐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동물의 형상을 빌린 수많은 인형과 가면, 장식용품 들을 만난다. 실제와 구분 없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재현해서 도심 한 복판에 세워놓거나 선전용으로 또는 볼거리로 치장해 세워두었다. 사람들은 길을 지나가다 보고서는 흠칫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는 안도한다. 이제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귀엽고 어색하며 이상한 물건이 된다. 사실 동물은 이곳에서 저렇게 돌아다니며 살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 갇히거나 특정한 장소에 감금되어야 한다. 관리되어야 한다. 일상의 공간에 동물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동물을 자기 삶의 주변으로 항상 호출하고 호명한다. 그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때 그것은 완구나 장식용품, 인형과 스펙터클이란 볼거리로 대신해서, 무척이나 안전하게 관리되어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동물원, 사실적인 동물 장난감, 그리고 상업적 목적 아래 널리 침투되어 있는 동물의 이미지 따위는 모두 동물이 일상에서 제거되면서 나타난 것들이다. 동물원과 그것의 무대 배경 같은 장식은 실제로 동물이 완전히 주변화 된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더구나 생동감과 자발성을 지닌 동물을 친밀한 대화 파트너로 삼으려는 경향 역시도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사회의 커다란 특징이다. 갈수록 인간들간의 소통과 친밀성이 지워지는 사이에 그 틈으로 애완용 동물의 숫자는 늘어간다. 현대의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여진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그와 같은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것은 동물을 통해서 자율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세계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은연중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애완동물이거나 동물의 형상을 빈 인형들일 것이다. 애완용이 될 수 없는 동물은 등신대나 그것보다 더 커진 상태로 인형이 되어, 조형물이 되어 서있게 된다. 코끼리나 호랑이, 고래를 집안에서 기를 수는 없다. 대신 그것을 모방한 ‘짝퉁’을 일상 공간에 가설해놓는다. 이 동물의 형상은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달콤한 키치’이다. 그것은 실제 동물들과는 분명 그 모양이 다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유사성도 있다. 닮음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특정 동물의 이름으로 호명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물, 유사 동물, 인형동물에는 대상이 된 실제 동물의 본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공성이 가득하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 동물의 본성의 재현이 아니라 ‘추상화된 인공적인 이미지로서의 동물’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즐기고 사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동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동물을 안정적으로, 정서적 호소력으로 받아들인다. 위협성과 공격성이 지워지고 삭제된 체 오로지 볼거리로만 전락한 동물, 의사동물, 가짜동물, 환영들이기에 그렇다.

탁인아가 보여주는 가짜동물은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스치듯 본 풍경이다. 그만큼 흔하고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우리 주변에 그처럼 이상하고 생뚱맞은 키치들이 도처에 깔려있고, 또한 한 둘이 아니기에 시신경도 마음도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것이 산타마리아호를 흉내 낸 범선이고 식당 간판에 들러붙은 무지막지하게 큰 대게나 복어다. 그런가하면 플라스틱 야자수가 그렇고 모텔이나 웨딩홀 외벽에 설치된 유럽궁전이나 신전을 모방한 조악한 장식들이다. 온갖 키치로 뒤범벅이 되어있는 현실에서 그 동물의 모습을 빈 조형물은 별로 쎈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제하고는 다른 존재다. 동물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지만 결코 살아있는 동물은 아닌 이상한 동물이다. 보는 이의 눈을 한 순간 속여서 실제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심리적인 동요를 주다가 이내 안전하고 편안한 구경거리가 되어버린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동물을 늘 필요로 하고 주변에 가까이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 삶에서 배제해오기도 했다. 분리와 감금, 학살과 보존, 기쁨과 두려움의 극단 속에서 동물은 인간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용되어 왔었다. 그것은 동물의 사물화과정이자 사회화과정이다. 역사가 그러하듯 각 세대는 나름의 동물들을 새로이 만들어냈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이 인간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한다.

알다시피 옛날에는 동물들이 인간보다 훨씬 성스럽고 신성한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래서 오래도록 동물의 질서는 ‘참조의 질서’였다. 근대 이전까지 동물들은 인간과 함께 세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경제적이고 생산적으로 의존적 관계였다. 인간 역시 본질은 동물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생물일 뿐인 것이다. 다만 좀 특이한 동물이 인간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동물과 결정적으로 단절을 이루게 된 것은 다름아닌 데카르트로 인해서다. 그는 인간 내부에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에 대한 이원론dualism을 내재화 시켰다. 신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명히 격리시키면서 신체를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법칙에 종속시켰고, 동물에게는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이를 기계적인 모델로 격하시킨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동물들은 ‘인간의 여러 도구로, 과학적인 대상으로, 산업적인 고기로, 정신적 질환을 치유하는 대상’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로인해 동물들은 이제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 서구의 경우 급속한 경제 및 사회적 변화와 미래에 대한 확신이 넘치던 시기이자 과거사 연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확대되던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초에 이국 동물 전시의 역사에 대한 책과 글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국적인 식물, 동물, 광물을 수집하려는 욕망도 함께 꿈틀거렸다. 동물 수집의 역사는 서서히 자연을 다시 보고, 귀하게 여기며, 보호하려 하게 된 서구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제 동물들은 과학적 가치를 지닌 수집물이자, 자연의 경이로움을 연구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진다. 이 같은 목적과 함께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등장으로 인한 주말개념이나 위락시설의 출현에 힘입어 태동된 것이 바로 동물원이다. 그보다 조금 이른 18세기 말에 생겨난 현대 서커스도 동일한 맥락이다. 서커스의 조련은 동물을 변질시켜 야생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수행하게 만든다. 그와 한 쌍으로 동물원의 동물들은 자연에서의 삶을 고스란히 연기하면서도 동시에 길들여지고 통제되어 볼거리로 전락되었다.
“19세기에는 공공 동물원이 현대 식민지 지배력을 증명하는 역할을 했다. 보기 힘든 동물을 잡아온다는 것은 머나먼 이국 땅을 모두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존 버거)
그렇게 동물원은 이국적이며 먼 현실에서 온 것들로 채워져 있어서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또한 동물원은 실제 서식지에서 살기에는 너무 위험한 이 세상에서 동물들의 자연 서식지를 재현하는 장소로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상 동물원은 인간의 오락을 위한 곳이다. 동물원의 스펙터클은 ‘낯선 곳에서 온 낯선 현실을 전시’함으로써 기쁨을 창출해내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동물원을 찾는 관객은 도시 한 가운데서 사바나나 정글에 있는 모습 그대로의 동물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만히 있거나 졸고 있는 동물에게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질러 움직이고 으르렁거리게 하는 것이다. 자연, 야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동물원의 자행하는 야생 표본의 통제는 잃어버린 자연스러움을 복제한다는 목표 아래 슬쩍 감추어진다. 동물원은 마치 정말로 야성 그대로인 것처럼 구성한 몸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니까 동물원의 기능은 전시되는 동물의 신체에 권력을 행사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동물원에 가는 이유는 여전히 교육적인 목적보다는 재미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원은 감옥이면서 연구실이자 극장이다. 사실적이며 정상적인 것을 무대에 올리는 오락적이면서 교육적인 스펙터클의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동물원에서 박제된 동물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사 박물관에 고요히 안치되어 있다. 동물원이 동물들을 그렇게 전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다름아닌 미학적인 이유이다. 동물원을 찾는 일에는 이렇듯 미학적 개념이 깊게 각인되어있다. 동물원은 방문객들에게 무엇보다도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오늘날은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상적 삶의 공간으로 그 스펙터클을 시뮬레이션한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을 도심 한 복판에, 우리들 삶의 주변에 흩어놓는다. 단 위험과 야성을 모조리 제거한, 정교한 플라스틱모형으로 말이다. 알다시피 스펙터클은 실재라는 환상을 창출해내는 인위적 무대장치를 필요로 한다. 스펙터클이란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오인하게 하는 기술”(기 드보르)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스펙터클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배치한 현실일 뿐이다. 따라서 리얼리티 스펙터클의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것’, ‘낯선 것’, ‘동화될 수 없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다. 다른 것이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세계다. 맹수가 모두 길들여진 짐승으로, 나아가 플라스틱으로 모형으로 바뀌는 세계는 다른 것이 모두 닮음 꼴로 환원되는 세계다. 그것은 끔찍한 세계이자 괴물 같은 세계다. 우리는 그렇게 모조현실에 길들여진다. 모조현실을 실제로 착각한다.

탁인아가 찍은 이 동물들은 가짜 동물들이다. 그것은 모사물이다. 시뮬라크라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모사물을 지칭한다. 이 모사물simulacra들은 바로 시뮬레이션, 즉 모사과정의 산물인데,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의 이 모사물은 이제 흉내 낼 대상, 즉 원본이 없어진 모사물들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극실재를 생산한다. 즉 시뮬레이션이 사회적으로 잘 지배하고 모델이 현실적인 것에 선행하며 사회를 극실재로서 구성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호가 실재를 더욱 더 가속적으로 대체하고 있어, 실재란 없으며 실재의 환각만을 제공하는 모사물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본성대로 살아가는 동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도시 공간에 박제화 되어 있는 인공이 동물, 가짜 환영, 모조물로 대체되어 있다. 이 플라스틱 동물 형상은 어느 날 느닷없이 이 작가의 눈에 다가왔다. 작가는 그런 동물들을 이곳저곳에서 만났다. 이후 작가는 그것들을 찾아 나섰다. 친근하고 무섭고 흉칙하고 이상하고 반갑다. 복잡한 양가적 감정이 밀려든다. 작가는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둠으로써 자신이 받은 기이하고 낯선 감정을 ‘처리’한다. 작가는 우리의 현실 풍경 곳곳에 지뢰처럼 자리한 다소 이상하고 불가해한 모조물들의 현존과 실재의 부재, 자연의 상실에서 오는 괴리감을, 그 불편함을 사진으로 포착하고 잡아두는 것이다. 여기서 사진은 ‘시각적 묘사의 수사법을 통해 사물을 붙잡아’ 두는 것이 된다.
오랫동안 두려움과 불편한 동물들은 동물원의 우리 안에서 통제되고 박제화 되면서 도시적이며 부르주아적인 환경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작아져 버렸다. 사나운 호랑이나 곰, 심지어 공룡 등은 스폰지와 헝겊, 천, 라텍스, 플라스틱으로 재현되어 살아있는 존재처럼 위장하고 있다. 이제 그것들은 실제를 대신하고 대체한다. 따라서 그 의사동물이 진짜 동물이 되고 진짜 동물은 역설적으로 자취를 감추거나 사라지거나 희미해진다. 이제 동물과 인간, 자연에 대한 우리의 고정되고 단일한 믿음은 깨진다. 이 같은 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Kitch란 일반적으로 고급 예술품에 대비되는 대중문화 상품을 의미한다. 키치라는 말 속에는 “윤리적으로 부정하고, 진품이 아니며 진보의 우수리에 불과하다는 경멸적인 의미”가 섞여 있다. 키치가 등장한 19세기 말은 부르주아의 시대이고 소비 사회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소비 사회란 두말할 필요 없이 소비를 위해 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소비의 순환이 가속화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신분 과시용으로 또는 예술에 대한 욕구에서 시작됐던 키치는 여러 가지 양식과 모습으로 출현했다. 길들여진 동물들처럼 플라스틱이나 시멘트로 만든 동물, 키치들은 온순하고 착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거대하게 만들어놓은 공룡조차도 조금은 우스꽝스럽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실제 동물을 통한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법칙들이 깨지는 것을 접한다. 우리가 어떤 개인의 몸이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가 괴물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더 이상 특정 동물이 아니다. 그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탁인아의 사진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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