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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화 / 경계를 타고 넘는 판화

박영택

고태화는 얇고 투명한 종이를 공간에 가설 한다. 종이는 가공처리되어 색다란 사물로서의 질감과 촉각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 위로 몇 겹으로 차오르는 이미지가 얹혀있다. 자연풍경이나 식물의 형상, 씨앗과 줄기, 세포 등을 연상시키는 그 이미지들은 다양한 색채의 늪 속에서 다소 환상적으로 피어난다. 종이의 오브제화와 더불어 프린트된 종이는 공간을 타고 서식하는데 이는 종이/이미지가 생명체가 되어 증식과 분열을 거듭하는 형국을 보여준다.
그는 가공 처리된 종이와 그 종이위에 얹혀진 자연, 생명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더불어 이를 3차원적 공간 안에 다양하게 연출하면서 그를 통해 자신의 몸, 생명, 삶을 은유화 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재료들이 다루어지고 이미지가 선택되며 가설된다.

작가는 말하기를 자신의 몸은 항상 (생을 위해) 싸운다고 한다. 사실 우리 몸은 순간순간 살기 위해, 목숨을 영위하게 위해 부단히 움직인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동사형은 여러 내용을 함축한다. 기본적인 생물학적 욕구의 충족과 해결, 사회적 관계망에서의 자신의 위상 잡기, 무수한 사람들과의 접촉과 대응이란 과제(?)는 사실 익숙해지거나 마냥 편한 일이 아니다. 삶은 늘 불안하고 고단하며 피곤하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거나 적응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결국 자신을 외부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외부에 집어넣기 위해 힘쓰는 자신의 몸이 싸움판이라고 말한다. 흡사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제목이었던“당신의 몸은 전쟁터다.”가 연상된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살기 위해 자기 몸을 갖고 싸운다. 인간의 몸, 의식은 한없이 나약한 것 같으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는, 전쟁을 겪어나가는 상황을 은유화 하고 있다. 그 싸움터를 탐험하고 그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 재현은 시각적 인식에 기반하여 제작되는 것이기 보다는 “미세한 리듬들, 움직임, 에너지의 흐름 등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각들”을 바탕으로 제작 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대부분 몸의 세포, 신경 등 미시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한편 바위나 풀, 숲, 바다 등을 표현한 상상적 풍경화로 드러난다.

여기서 세포나 신경,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이미지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몸 내부의 풍경이다.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 자화상은 인격과 정체성을 지닌, 자아의 표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물학적으로 환원된 개인의 몸이다. 그것은 분명 내 것인 동시에 나하고는 무관한 자연법칙 아래 순환하고 진동하는 물적 구성체계라는 도저한 인식과 만난다. 도이세 그것이 확정된 결과가 자연풍경이다. 이는 자신의 몸, 의식과 자연계를 분리하거나 구분하지 않는 사고를 반영한다. 그래서인지 그 이미지들은 벽과 바닥에 기생해서 담쟁이처럼 증식한다. 정처없이 떠돌며 특정한, 하나의 완결된 몸을 지니지 못한다. 나무줄기나 세포, 혹은 포자나 혈관처럼 생긴 형태들이 부산하게 떠돌 뿐이다.

얇은 종이로 이루어진 화면은 왁스처리를 해서 견고한 독립된 사물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미지를 한지에 찍은 후 그 한 장, 한 장 마다 왁스를 녹여 반투명한 질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처리된 종이 역시 육체를, 자아를 은유화 한다. 종이는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다치기 쉬운 인간의 나약한 일상과 연약한 피부를 의미한다. 동시에 그 위에 막으로 둘러쳐진, 왁스처리는 “다시 회복하기 위해 강인함을 보이는 인간의 습성과 몸의 방어”를 뜻한다고 한다. 또한 종이를 한 장, 한 장 층을 쌓아서 만들어나가는 작업공정은 이른바 삶, 기억,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들이 쌓여가는 과정을 반영하는데, 매 순간 저 아래 지층의 인식이 마치 왁스처럼 반투명하게 새로운 인식에 투영되고, 변형되고 다시 쌓여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흡사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의 판화는 대부분 드라이 포인트, 에칭, 목판과 같은 전통적인 판화기법으로 제작된다. 한 장의 종이위에 잉크라는 층을 '핀을 맞추어' 겹쳐내는 일반적 판화 작업의 평면적이고 기계적인 공정을 끌어안으면서 그 안에서 이를 넘어서는, 이른바 내파를 감행한다. 그것은 판화의 또 다른 가능성의 모색으로 다가온다. 우선 작가는 이미지 하나하나를 각각 다른 종이에 찍어 그 종이 자체를 겹친다. 어떤 작품은 보통 5, 6겹 혹은 7, 8겹의 층을 갖는 것도 있는데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종이는 더 이상 이미지의 단순한 지지체에서 벗어나 종이의 두툼한 두께 자체로 인해 그대로 작품의 미디어가 된다. 판 하나하나가 모여 물적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다. 또한 종이를 접고 자르고 뒤집어서 겹쳐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판화가 반복적으로 만들어 낸 동일한 이미지들은 조금씩 변형되어 새로운 이미지들로 재생산된다. 동일한 틀 속에서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판화의 복제성과 반복을 의도적으로 흔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이미지들은 원형과 기둥, 주름진 천이나 거울의 표면 위로 가변적인 형상을 자유로이 거느린 체 곳곳에 출몰하고 기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정처없이 이곳저곳에서 부유한다. 마치 우리 몸이 그때그때의 특정 상황에 처해서 이에 적응하고 갈등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것들은 고정된 형상이나 완결된 구조를 지니지 못하고 다만 순간순간 우연에 의해 어떤 몸이 되었다. 어떤 상황이 되었다.

그의 판화작품은 이처럼 단순히 평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공간 전체 속에서, 공간건축적 요소와 결합되어 나간다. 반정형적이고 비고정적이다. 유기적이며 가변적이고 지속적이다. 납작한 평면인 동시에 일정한 두께를 지닌 질감, 부조적, 조각적 요소를 지닌 설치작품으로 떠돈다. 어떤 경우에는 박스의 형태로 접어지기도 하고 또는 구부러져서 말아지기도 하는 가 하면 이미 존재하는 입체물의 표면에 직접 부착되기도 하고 더러는 칼로 도려내어 진다. 자기 존재성의 명증한 증거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부단히 다른 존재, 상황과 우연적인 만남으로 인해 형성된 관계 속에서 재배열되고 재탄생된다는 메시지다.

또한 작가의 작업은 특히 조명, 빛에 민감하다. 그 빛은 작업의 중요한 요소다. 왁스가 먹여진 종이를 비추는 빛은 종이 자체의 투명함을 보여주고 그 투명함으로 인해 종이의 이미지들은 물질적 거리 및 보여지는 각도에 따라 관객의 시각 안에서 또 다른 층으로 “핀을 맞추어”겹쳐내는 것이다. 그 빛은 동시에 개별적인 존재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보여주고 관심의 배려 속에서 조망하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작가의 작업은 밖도 안도 아닌, 생물도 풍경도 아닌, 입체도 평면도 아닌 그 애매함을 동반하면서 모종의 경계에 걸쳐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그 같은 경계야말로 “ 약하지만 강해질 수 밖에 없는 시간”이자 “한계이자 출발”이라고 말한다. 경계에서 존재해야 하는 인간의 삶, 그리고 미술 역시 그러한 ‘엣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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