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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희 / 부재하는 기억의 회상

박영택

서명희의 작업은 수공의 공예적, 부조적 작업과 손맛으로 채워진 회화가 공존한다. 두 작업 모두 간결하고 압축적이다. 상당히 미니멀하다고 할까? 깔끔한 디자인적 감성과 정연한 구성이 돋보인다. 작가가 다루는 사각형의 박스형 딱지와 세일러복이란 두 이미지, 상징은 다르면서도 사실은 동질의 것으로 다가온다. 이 두 상징은 표면에 돌올하게 부풀어 올라 묘한 환영감을 불어 일으킨다. 세일러복이미지는 흰 바탕면에 슬그머니 부조적으로 올라가 있다. 그것은 부드럽게 촉각성을 자극한다. 아울러 외곽선은 그림자와 함께 은은하게 흔들리는 실루엣을 동반하면서 아득하고 아련한, 명료하지 않고 조금씩 지워지거나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기억이나 회상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그것은 명료성에 저항한다. 흔들리고 부유한다. 한때 존재했었지만 지금은 부재한, 그러나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기이한 시간대의 이미지다. 그것이 기억이다. 이 세일러복은 아마 작가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매개일 것이다. 옷이란 한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연장된 신체이자 취향, 기호, 신분, 정체성 등을 동반하는 기호이자 그 옷과 함께 했었던 모든 사연들을 간직한 매개다. 따라서 유년의 옷, 어느 한때 내가 입었던 옷이란 그 한 시절 나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핵심적 오브제다.
앨범이 간직한 그 시절의 사진 속에 내가 입었던 옷이란 무엇일까? 작가에게 이 뒷면의 세일러복이란 유니폼, 교복은 무엇이었을까? 앞면에 비해 뒷면은 보다 더 많은 사연을 품고 있어 보이고 정면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소녀의 성적 정체성과 함께 그 옷이 부여했던 금기와 질서, 규범 그리고 은밀히 그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던 시절의 사연들이 그 교복위로 넘나들었을 것이다. 교복, 유니폼이란 그렇게 금기와 위반의 욕망 사이에 있다.

반면 조각보나 방패연을 연상시키는 사각형의 딱지모양은 화면에 마치 타일처럼 부착되어 있다. 이 작품은 수공예적이고 부조, 조각적이다.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고 하나하나 손맛을 요구하는 번거롭고 집요한 작업이지만 작가는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한다. 본인에게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성껏, 중심부위로 약간 융기되도록 조율해서 조심스레 접은 통통한 사각형의 단위들은 격자형의 무늬를 만들어 보이기도 하고 방사형으로 촘촘히 화면을 채우기도 한다. 이 요철효과는 종이의 질감과 물성, 그 위에 인쇄된 문자이미지, 기호 그리고 색상, 그리고 그 위로 스며든 물감에 의해 다양한 변화를 전체적인 통일성 안에 잔잔히 심어놓고 있다. 여러 개별적 사연들이 모여 한 시간,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메시지 같다. 또한 소중하게 융기한 하나하나의 사연, 공간이 모여서 지난 시간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각형 역시 기억, 회상, 과거의 사연 등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이렇듯 고문자가 인쇄된 종이를 딱지로 접어 화면에 부착한, 일종의 저부조, 입체적이며 촉각적인 작업과 함께 소녀들이 착용하는 세일러복만이 돌올하게 그려진 회화작업은 다소 상이하면서도 공통적으로는 기억, 회상, 빛바랜 추억들과 같은 회고적 감정과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훈민정음의 문자꼴들이 인쇄된 종이와 세일러복은 전통, 개인사적인 내력을 품고 있는 상징들이다. 고문자가 인쇄된 종이나 하얀 한지는 그 종이 자체의 색감과 물질감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그 위로 부분적으로 물감을 적시고 스며들게 해서 이룬 도포효과로 아롱져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이른바 레디메이드이미지인 문자가 인쇄된 종이, 한지라는 오브제는 복수의 존재들이 집적과 결합이란 구성적 체계 속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일일이 손으로 접고 물감에 적셔서 이룬 작은 사각의 단위들이 하나의 화면을 만들고 그 하나의 평면 안에는 또 다른 작은 평면의 세계가 채워져 있다. 부분과 전체는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이 작은 단위는 개별적인 사연, 기억의 단위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사연, 아득한 시간의 흔적, 그리고 형상화될 수 없고 가시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막막한 것들을 사각형의 딱지형태와 세일러복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은 도상적 연출을 통해 사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리기와 만들기, 회화와 조각, 공예를 넘나들면서 화려한 매체연출과 집요한 노동을 통해 지난 시절을 은유화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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