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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심이 / 같으면서도 다른 자리와 시선

박영택

송심이의 근작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다. 그러나 내 기억의 갈피 속에는 그녀의 작품이 어딘가에 항상 박혀있었다. 자주 못 보아도, 작품 발표를 접하지 못해도, 그래서 순간 잊혀지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 떠오르면서, 모종의 확신 속에서 작품을 볼 기회를 기다리게 되는 그런 작가 들이 있다. 오늘날 모든 게 속도와 양, 홍보로 가늠되는 판에 저항하는 작가들도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자기의 보폭과 호흡으로 가는 사람들 말이다.

송심이의 근작은 ‘같은 자리’란 부제를 단 시리즈 작품이다. 사진작업이고 포토샵을 거친 합성사진도 있다.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경험하고 관찰하고 다시 본 것을 보여준다. 사실 본다는 것이야말로 미술의 중심 과제일 텐데 작가는 주변에서 늘상 접하던 것들을 세심하게 다시 들여다보는 데서 파생되는 여러 차이와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여기서 보는 문제는 작가의 눈과 그 연장선인 카메라 렌즈를 통해 제시된다. 보았던 것의 경험적 측면을 저장하고 기록해주는 한편 지속해서 달라지는 관점에 의한 변화상을 포착하기위해서 사진매체는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따라서 송심이에게 사진이란 그 자체로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작품의 개념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기능한다.

근작은 강과 길, 하늘과 사람(관절인형)이 소재로 등장한다.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예술의 대상이다. 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차용되었다. 작가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의 반경에서 접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해낸다. 그것은 마치 한 여행자의 기록이나 일지와도 닮았다. 혹은 수집가의 비밀스럽고 집요하며 몽상적인 수집행위를 연상시킨다. 송심이는 거창하거나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 것들, 소소하고 얼룩 같은 것들, 기미나 낌새 같은 것들, 가볍고 반짝이고 찰나적이고 허깨비 같은 것들을 응시하고 이를 건져 올린다. 눈과 사진기가 그 역할을 했다. 그녀에게 사진은 핀셋 같다.

집 주변의 안양천 수면을 응시한다거나 어느 한 자리에서 회전을 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바라본다거나 자신이 걸어 다닌 실제의 길과 그 길에서 보고 우연히 주은 돌, 그리고 그 길을 개념적으로 지시한 지도와 인공위성 사진 등을 조합한 작품, 나아가 실제 인간을 대신해 관절인형을 소재로 해서 다중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시점이나 입장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상대적인 여러 관점을 공존시키고 있다. 동시에 그것들은 생성과 소멸 속에서 부침하는 존재들이다. 순간 존재했다 사라진다. 그것만이 확실한 진리이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셈이다.

작가는 어느 날 자신의 집 주변에 위치한 안양천을 바라보았다. 수면을 반으로 가르며 어둡게 드리워진 다리의 그림자와 그 위를 떠다니는 온갖 부유물, 잔잔한 바람에 의해 흔들리며 흐르는 탁하고 흐린 강물 그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하늘 등을 조심스레 들여다보았다. 그 수면의 파장, 다리 그림자가 짓는 유사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자아내는 물의 표면을 고요하게 응시한 것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반복해서 사진으로 담았다. (‘강-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같은 자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잡은 화면은 이등분되어 진하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으로 양분된다. 얼핏 보아서는 강물을 찍은 사진인지 추상회화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점, 선, 면으로만 존재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기록성은 순간순간 시간의 소멸과 대체를 빠르게 포착하지만 동시에 덧없는 흐름을 처연하게 뒤쫓을 뿐이다.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한 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수면은 방금 전에 보았던 수면이 아니다. 동일해보이고 아무 변화 없어 보이지만 수면은 지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똑같은 강물은 있을 수 없다. 작가는 오랫동안의 응시를 통해 디테일의 변화를 발견하고 즐긴다. 늘상 간과했거나 평소에 잘 모르고 지나쳤던 장면이다. 우리가 보고 이해한다고 여겼던 사물과 대상은 사실 전적으로 오해와 편견, 무지에 의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보는 문제, 관점을 사고하게 한다. 주변의 하찮고 늘상 보는 것들을 세심하고 주의 깊게 봄으로써 그 안에 잠긴 놀라운 매력을 만나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발견하는 눈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세상과 사물은 그저 신비스럽고 경이롭다.

그와 유사한 것은 역시 안양천변의 어느 한 지점에 서서 360도 각도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건물 위쪽으로 포커스를 맞추어 상대적으로 하늘이 많이 들어오는 장면이다. 한 점에서 원형으로 선회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예기치 못한 풍경의 발견, 거칠고 습관적으로 보았을 때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면을 선사하는 경이를 만난 것이다. 저 멀리 북한산과 아파트, 건물의 상단 일부분, 깃대와 깃발, 분수의 윗부분, 가로등, 운동장의 천장, 조금씩 다른 하늘색 등등이 눈에 들어온다. 시차를 두고 각도를 옮기며 찍는 순간 동일한 대상은 하나로 포착되지 못하고 미세한 분열과 차이 속에 거듭 환생된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과연 보기는 한 것일까? 300mm망원렌즈에 의해 걸려든 풍경은 한 눈으로 어느 한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과는 너무 다르다. 그렇게 조심스레, 찬찬히 방향을 달리하면서 바라보자 재미있고 낯선 풍경들이 하나씩 경이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도 몰랐던 장면, ‘같은 자리에서 바라본 다른 자리’이다. 그것은 일시점의 독점적 자리를 해체시킨다. 분산적이고 복수적이고 다시점적이자 몸 전체가 훑어나가는 그런 감각이다. 전일적인 시점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는 언젠가 스페인에 여행을 갔었나 보다. 특정 지역을 갔다 와서는 그 지역에서 우연히 돌멩이 하나를 주워왔다. 당시 돌멩이가 놓여져 있던 땅, 바닥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그리고는 그 지역을 구글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그 항공사진을 출력했다. 그런 다음 돌멩이를 주웠던 지점을 찾아 표시를 하고 그곳에 실제 돌멩이, 오브제를 올려놓은 것이다. (‘길-다른 자리에서 바라본 같은 자리’) 부재의 자리를 사진으로 촬영해 다시 보충해주는 일이다. 돌멩이기 파인 자리를 찾아 다시 그 돌멩이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주는, 무슨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사실 지도란 개념적인 것이고 허상에 불과하다. 반면 작가는 실제의 땅을 밟았고 거닐었으며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동시에 그녀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증거하듯이 돌멩이 하나를 파서 가져왔다. 그것을 지도사진위에 올려놓았다. 실상과 허상은 그렇게 만나고 그 둘은 동등한 가치,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강, 하늘, 땅을 돌아 이제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작가는 자연과 달리 구체적인 인간을 다룰 수는 없었나 보다. 대신 관절인형을 매개로 해서 인간존재에 대한 그녀만의 시선, 관점을 드러낸다. 관절인형은 몇 겹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다중적인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 또한 인간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인간존재를 암시한다. 그림을 대신한 합성사진작업인데 몽상적이고 포현실적인 묘한 분위기를 적조하게 자아낸다. 인형들 사이로 구겨진 투명한 비닐이 부유한다. 돌이나 얼음과 같은 질감을 지닌 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으로 은은하게 발광한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마음과 무의식, 말들 혹은 저마다의 희망이나 꿈처럼 다가온다. 인물들은 본인 자신이기도 하고 타인이자 죽은 이,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다양한 인간 존재로 겹쳐있다. 아니 그 모두가 하나의 몸 안에서 바글거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몸일 것이다. 여러 사람의 관점이 자기 몸 안에서 서식한다. 꽃처럼 풀처럼 자라난다.

이처럼 근작은 결국 송심이가 보는 강, 땅, 하늘, 사람에 대한 단상들로 자욱하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깊은 응시를 통한 자연스러운 발화가 은밀하게 떠돈다. 더없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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