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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선 / 근원적인 얼굴

박영택

언제부터인가 인도와 네팔을 거쳐 티베트와 몽고, 캄보디아와 부탄 등지를 여행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유명한 관광지도 있겠지만 이른바 오지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을 불편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곳은 문명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곳, 자본의 힘과 위력이 무력해지는 공간이다. 천연의 자연 속에서 무욕과 탈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순박한 그곳 사람들을 경이적으로 만나고 오는 감동이 꽤나 큰가 보다. 고도의 소비자본주의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과 삶은 분명 반성적인 지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곳에서 강제되는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나 코드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의 위안 같은 것을 주었을까. 물질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삶의 평화를 만나고 있는 모습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낯선 풍경이 되었다. 극진한 종교와 영성이 힘으로 가득찬 공간에서 초라하고 가난하지만 맑고 밝은 웃음과 순박한 심성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신에게 의탁하며 살아가는 그 무심한 이들이 몸에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완강함을 지닌 육체에서 모종의 무서움을, 깨달음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그곳 어린아이들이 얼굴이 그럴 것이다.

영아의 얼굴은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의 평화와 고요로 볼 수 있으며 순진무구, 천진난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아직 어른의 세계에 물들지 않은 순연한 어린아이의 얼굴에서 도道를 보았다. 노자는 이를“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원목인 박樸과 같은 것”이라고도 하였다. 도가에서는 최고의 이상적 인간을 진인眞人이라 했는데 그 진인은 바로 지혜와 기교가 발달하지 않은 태초의 역사를 동경하고, 예속에 물들지 않은 순박한 어린이의 경지를 추구한다. 결국 동심을 일컫는 말이다. 어린아이의 마음과 얼굴을 갖는 일, 그것이 결국 도에 이르는 길이었다. 전세계 어린아이들의 얼굴은 대부분 똑같다. 작가는 티베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에서 자신이 찾고 싶었던 순수한 얼굴, 이미지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는 티베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얼굴을 그렸다. 무척이나 크게 그렸다. 이 강조된 아이의 얼굴은 순간 기념비적으로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초상화란 절대적인 존재, 지배계급 혹은 유명인을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임영선이 그린 아이들은 무명의 존재들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동안 미술사에서, 초상화의 영역에서 배제된 이들을 소재로 해서 그렸다. 동시에 문명에서 소외된 지역에서 사는 이들의 거대한 초상화를 전시장(문화와 문명의 장소)으로 끌어옴으로써 그들의 존재감, 건강하고 순박한 아이들에게 보내는 존경의 마음을 거대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에 해당한다.

커다란 화면 전체에 아이의 얼굴 하나가 가득하다. 둥근 달처럼, 태양처럼 환하다. 우뚝 솟은 히말라야의 산봉우리와도 같다. 아이의 얼굴은 증명사진을 찍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투명한 햇살이 강하게 내리쪼이고 순간 아이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아이의 얼굴, 눈동자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꼼짝없이 사로잡힌다. 마치 우리가 티베트에 직접 가서 이 아이와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흔히 천국이 가까운 곳이라 불리는 티베트의 고지, 라다크다. 히말라야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져있다. 하늘을 향해 떠오른 사막 같은 그 지역은 식물의 생육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대이고 염분이 많은 바위들의 땅이다. 산소분압이 낮은 탓에 그곳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몽롱한 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중력의 법칙에 붙들려 사는 일반적인 땅과는 조금 다른 곳이다. 공기의 빛깔은 완전히 투명하고 하늘은 과도하게 푸르다. 그 사이로 순백이 구름덩어리가 떠다닌다. 눈이 부시고 너무 맑고 밝은 것이다. 이 땅 자체가 이미 탈속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래서인지 그곳에는 무수한 사원과 수많은 승려들로 붐비고 그곳 사람들 역시 탈속적 삶을 살아간다. 물론 자본주의 문명의 파고가 오늘날 라다크를 어지럽히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분명 순박함과 천진함이 감동적으로 어른거리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임영선은 그곳을 방문한 기억을 그렸다. 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그렸다. 맑고 순수한 얼굴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의 얼굴과 그들이 생을 영위해가는 자연공간을 함께 그렸다. 얼굴과 풍경은 하나가 되어 뒤섞여있다. 사진을 이용해 이를 자신이 원하는 구성연출로 매만져 이룬 또 다른 풍경, 상황이다. 마치 초현실주의적인 병치처럼 느닷없이 얼굴과 풍경이 만났고 대상의 크기가 왜곡되어 있다. 그런데도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선 커다란 아이의 얼굴은 그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순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동자로 채워져 있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태양, 건조한 기후 속에서 아이들이 볼은 붉게 물들어있거나 갈라지고 터졌다. 빛에 타버렸다. 작가는 단속적인 붓질로, 촘촘한 터치로 볼을 메꾸었다. 얇게 펴바른 물감, 붓질은 마치 점묘화처럼 조밀하고 터치는 경쾌하며 탄력적인 자취로 투명하다. 피부조직이나 모공을 따라가는 그런 붓질이다. 한편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의 흐름은 그곳의 자연조건을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해주는 편이며 정면의 얼굴상에 변화를 준다. 일정한 거리로 물러나 보면 대범하고 거친 붓놀림이 모여 매우 사실적인 표정과 재현을 안긴다. 따라서 이 얼굴그림은 극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그만의 색다른 붓질과 물감을 다루는 방법론을 통해, 낯선 방식으로 재현을 성취해나간다. 추상적인 붓질들이 크기와 방향, 시간과 속도에 의해 달리 중첩되면서 이루어내는 기이한 사실주의다. 얼굴의 배경은 한결같이 밝은 단색을 단호하게 칠해 얼굴을 강조하고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얼굴의 하단에는 풍경이 실제 어깨와 그들이 걸친 옷처럼 연결되어 펼쳐진다. 옷 속에 전개되는 풍경, 목과 어깨가 자연스레 그들이 거주하는 자연공간,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 그려졌다. 그것은 다르면서도 결국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조망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진을 통해 연출된 장면, 의도적으로 만든 서사구조다. 예를들어 광활한 대지 위에 초연하게 살아가는 강인한 여자아이와 그녀의 도반인 개, 그리고 어른들이 함께 존재하는 그림이 눈에 띈다. 소녀의 치마폭에는 오체투지 하는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고 뒤편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호수인 남쵸호수가 보인다. 소녀는 그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주변사람, 짐승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그녀의 정체성임을 은연중 드러낸다. 이를 통해 모종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이다. 단일한 한 장면 속에 무수한 장면이 겹치고 여러 이야기가 공존한다. 시간과 공간이 뒤섞인다. 그것은 회화가 지닌 매력이다. 따라서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기록이나 다큐멘터리적 시선에서 벗어난다.

아름답고 절대적인 자연 앞에서, 불모의 땅 앞에서도 신께 순응하며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작은 몸이 큰 바위 얼굴 같은 아이의 얼굴과 함께 한다. 기념비적으로 큰 아이의 얼굴은 작가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나 보다. 우리는 이런 얼굴을 죄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우리들이 사는 이 공간에는 저런 아이들의 얼굴이 아니라 그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욕망에 들뜬 얼굴들만이 떠다닌다. 작가는 티베트아이의 순진무구하고 건강한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선물처럼 안긴다. 인간이 애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러나 지금은 망실되고 유실되어버린 어떤 근원적인 얼굴이자 그 얼굴에 깃든 마음을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얼굴을 만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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