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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숙 / 수묵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박영택

수묵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이 애니메이션-수묵‘은 그림 영상이다. 이른바 수묵으로 ’영상‘하기다. 생각해보면 수묵 자체가 무척 영상적인 편이다. 주어진 화면, 종이 안으로 삼투해 들어가는 먹의 흐름과 번짐이 다분히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잔상처럼 안긴다. 그것은 느린 유속으로 번지고 퍼져나가면서 종이를 물들이고 지지체와 하나가 된다. 자연법칙에 순응해 나가는한편 주어진 물질의 속성에 조응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엿보는 것이다. 거기에 자연의 엄정한 이치도 숨쉰다. 그렇게 흰 종이를 검은 색으로, 회색 톤으로 물들이며 모종의 상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지극히 우연히 만들어지는 수묵이미지는 인위와 무위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그것은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다분히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며 이것과 저것 사이를 넘나들기도 한다. 황선숙의 영상이미지를 보면 단호한 하나의 이미지를 안기지 않는다. 영상의 속성상 그것은 매번 다른 화면으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화면은 유독 이미지들의 걷잡을 수 없는 변환과 이동, 대체, 연결과 접속을 빠르게 보여준다.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반복적인 형상들로 인해 본래적 의미에 묶여 있던 이미지들은 새로운 힘으로 전환한다. 이미지의 연상작용, 이미지에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갈 뿐, 목적도 없고 종착지도 부재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그런 영상 이미지작업이다. 작가의 마음과 순간순간 떠오르는 여러 감정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그런 작업이다. 그 장면들이 더없이 시적이고 몽환적이다. 파편적이고 유동적인 단어와 감정, 의식과 기억, 추억의 조각들이 마구 산란한다. 이미지란 그런 산란 속에 반짝이고 흩어진다. 이미지를 보여주는 속도의 편차가 크다. 빠르고 느리기가 마구 섞여있다. 빠르게 스치고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덧없는 이미지, 영상은 주어진 세계에 대한 작가의 감성적 터치, 실존적 고백과도 같다. 그런 느낌이다. 흑백(먹)과 칼라의 교차, 빠름과 느림의 혼재, 구체적 형상과 추상적 흔적이 뒤섞여있다. 숨이 가빠진다. 어지러이 영상들이, 이미지가 흐른다. 기본적인 형태를 단순하게 그린 드로잉이 명멸한다. 그러니까 붓놀림과 점, 선들이 선회하며 무엇인가를 연상시켜준다. 그것은 결국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다. 자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자연으로 변한다. 순환론적 체계속에서 이미지는 마냥 선회한다. 이처럼 두 존재는 분리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다가온다. 다분히 윤회적 사상이 감지된다.

그러니까 어떤 이미지가 단서가 되어 다시 다른 이미지로 변신을 거듭하는 것이다. 한 이미지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연상되고 파생되어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간다. 이미지에서 이미지가 나오고 한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품고 있다. 회임한다. 이 같은 이미지의 산출은 애니메이션작업에 적합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이미지연출이 회화로서는 부족하다고 여겨 영상작업, 애니메이션으로 해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다시 영상을 전공, 이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먹의 번짐, 퍼짐이 자연계의 순환과 유기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매체라면 작가는 그 수묵을 영상과 접속시켜 그 의미를 증폭한다. 이른바 수묵이 영상과 궁합이 맞는 부분이다. 이미지의 출현은 다른 이미지를 산포하고 다시 지워지고 그런가하면 다시 나타나기를 거듭한다. 그 이미지의 연출이 다소 쓸쓸하고 호젓하고 어딘지 어둡다. 작가의 내면이 그런가? 그런 영상이 흐르는 사이로 바람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스산하고 음울하다. 적조하고 쓸쓸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선회와 어디선가 달려들어 고막에 붙는 소리들이 어지럽다. 어딘지 불길하고 음산한 기운도 감돈다. 근작에 와서는 지극히 개인적 감수성으로 절여진 상황성이 다소 신화적이고 영성적으로 변한다는 느낌이다. <시간의 침묵>연작은 이중의 이미지가 우아하게 겹치고 흐르고 떨어댄다. 여전히 소재는 나무, 물, 나뭇잎, 사슴, 사람의 모습이 계속해서 겹치는 장면이다. 사슴과 호숫가, 나뭇가지와 손바닥은 작가가 꿈에서 본 장면들이다.“내게 작업은 낮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울, 민낯으로 꾸는 밤의 꿈이다.”(작가노트)다분히 신화적이고 영적이다. 무엇보다도 적막하고 정적이다. 영상들은 현기증 나게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거듭하고 그 이미지들은 별개의 것이면서도 우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인 유사성으로 겹친다. 하나가 둘이 되고 그것은 다시 몇 개의 이미지로 겹쳐있다. 소리가 지워진, 침묵으로 절여진 영상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그 이미지의 흐름과 찰나적인 변신에서 소리를 상상하다. 흔들리고 떨어대는 이미지가 청각적으로 전이된다. 그외 다른 작품들 역시 미디어와 수묵, 수묵과 움직임,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만남을 의도한다. 아울러 진화하는 동시대 디지털 매체로 내밀한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수묵화는 정적인 세계를 담아왔다.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한 자연을, 그 안에서 고독하게 침묵으로 좌정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왔다. 그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조화로운 삶을 차분히 인내하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해왔다. 수묵화에는 시간이 없다. 우주자연은 영원히 순환하다. 어느 한 시간, 지금 이 순간의 장면을 그린다는 것은 덧없다. 의미없다. 그래서 그림에 그림자는 부재하다. 다만 영원한 모습을 그릴 뿐이다. 지속되는 순환의 시간 안에서 영원을 보는 자의 눈을 그린다. 그러나 황선숙은 ‘움직임에 대한 동경과 먹에 대한 동경을 결합’시키고 있다. 작가가 그린 원화(수묵으로 그린 드로잉)가 스캐닝 과정을 거쳐 영상으로 발화한다. 한 장면, 장면 모두가 무척 회화적이다. 엄청난 양의 원화가 겹치고 겹쳐 흐른다. 다분히 모호하고 애매하지만 그 흐름은 무척 서사적이다. 이 회화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달되는, 계속해서 다른 무엇으로 전이되는 그런 회화다. 움직이는 회화이자 단지 동영상이 아니라 그림을 흔들고 떨게 해서 보는 이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회화다. 그러기위해 작가는 애니메이션이 필요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것은 단지 외부세계를 재현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흐름이나 내면세계 같은 것들, 꿈이나 상상의 흐름을 적절하게 가시화 하는 매체로 다루어진다. 섬세한 이동, 암전과 드러남,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화면에서 나는 작가의 예민한 감성과 신경의 흐름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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