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어둡다. 그리고 환하다.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한 대비와 표면의 견고하고 매끈거리는 질감, 그리고 정서적 느낌이 강하게 환기되는 구성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다. 구상화이지만 세부가 과감하게 지워지면서 드러나는 평면적인 색 면과 그 사이로 부분적인 터치(요철의 느낌으로 부푼 부위)가 다분히 추상적인 화면으로도 다가온다. 좀 극적인 장면으로 연출되어 있다. 일상의 사물과 비근한 도시의 풍경들이 그저 평범하게 포착되고 있을 뿐이지만 명암의 대비와 대상에 접근하는 시선의 각도가 그 평범함을 어딘지 비장하고 예감적인 상황성으로 몰고 가는 편이다. 그것은 다소 불안하고 숭고한 풍경으로 떤다. 하찮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 안에도 깃들어있다고 믿는 그 무엇을 베어 나오게 하려는 것은 아닐까? 자신과 인연이 되어 마주한 저것들에 보내는 업보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카르마를 지닌 대상들!
하늘과 건물, 배경과 사물은 극단적인 대비로 자리하고 있다. 모든 대상은 오로지 납작하고 평면적인 색 면으로 단호하게 마감 되어 있고 하늘은 환하게 비워두었다. 밝고 어두운 부분의 극명한 대비들이 진동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부적인 것들은 희미해지고 어둡고 밝은 부분들의 대비가 간추려진다. 우상호는 그렇게 세상과 사물을 보았다. 그것은 세계를 주관적으로 보려는 의지이자 시선 너머가 본 것을, 느낀 것을 이미지화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작가는 명암대비가 강한 대상, 풍경을 찾고 이를 카메라 렌즈로 담아낸 후 다시 그 명암대비를 좀 더 강조해 간추려낸 후 이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는 채집된 시각이미지들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이를 포토샵을 통해 일정 정도 변형하는데 이때 세부가 지워지고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가 강하도록 이미지를 조절한 연후에, 이를 그대로 화화로 옮긴다. 분명 손으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어딘지 인쇄나 기계적 내음이 나는 이유도 그로인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이 작가가 전공한 칠화기법에서 연유하는 것도 같다. 그는 중국에서 칠화기법을 공부하고 그 기법을 통해 벽화제작을 해왔다. 근작은 아크릴릭을 이용해 칠화기법을 응용한다. 칠화는 두껍게 올리는 과정에서 요철과 갈아내서 벗겨내는 효과가 뒤따른다. 이 연마의 과정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우상호의 연마기법 역시 칠화기법에서 착안한 방법론이다. ‘칠흑’의 어둠도 칠화에서 연휴한다. 그는 무거운 옻칠을 대신해 아크릴로 스케치를 하고 주사기 바늘로, 그 바늘 크기에 견인되는 라인, 윤곽선을 두껍게 올린다. 내부를 아크릴로 채색하고 주사기 바늘을 이용해 그리며 착색을 한 후 마른 후에 다시 갈고 닦아내길 20, 30여회 반복한다. 그렇게 쌓아올린 부분이 견고하게 올라가고 갈아낸 자리에 오랜 시간과 공간의 흔적들이 희미하게 올라온다. 마지막으로 바니쉬를 발라 반질거리고 견고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화면은 저부조에 가깝다. 작가는 매우 소프트한 재로로 칠화기법을 응용한 아크릴화를 만들었다.
명암대비가 이렇게 강렬하면 역설적으로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둡고 밝은 부분들의 대비를 통해 입체감을 살리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대상을 좀 더 단순화하고 요약해내기 위해 이런 처리, 구성이 필요했던 것 같다. 혹은 검은 부분, 검정의 색채, 화면의 어둡고 깊은 부위에 대한 작가의 기호가 자리하고 있는 것도 같다. 어두운 그림이다. 블랙, 깊음이다. 빛과 어둠, 밝음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수묵의 대비를 연상시킨다. 갈아내고 닦아서 날아간 부분은, 흔적만 남겨진 부분이 하늘, 여백이 된다. 엷은 물감을 덧바르고 표면을 재차 거칠거나 고운 사포로 갈아내기를 수 차례에 걸쳐 반복 중첩한 일련의 그림들에서는 두툼한 물감 층이 이룬 물성과 함께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한 표면질감이 감촉된다. 이 평면 안에는 무수한 시간의 흔적이 올라가있고 노동의 흔적, 바닥으로 향해 치달아 가는 깊이에의 갈망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선회한다. 그런 흔적의 결들이 베어 나오는 표면은 사진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오로지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깊이 있는 느낌이다. 결국 우상호는 단지 회화적 표면이 아니라 시간성이 깃든, 인간적 체취와 승화의 욕망을 지닌 깊은 화면을 보여준다. 그렇게 드러난 화면은 지난 시간의 흔적,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그림 역시 카르마다. 동시에 그는 어두움과 밝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빛과 어둠은 의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 삶이 있기에 빛을 볼 수 있고 빛이 없는 곳에서 불안을 느끼고 빛이 있을 때 편안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빛을 추종하게 되었다. 빛의 과다가 아니라 빛이 옮겨진 어둡고 깊은 빈 공간에서 그동안 잊혀졌던 상상을 되찾고 새로운 희망을 읽는다.” (작가노트)
그는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그 빛과 어둠을 본다. 그는 일상세계에서 채집된 여러 소재를 그린다. 그가 거닐며 보았던 도시의 풍경과 작업실 풍경, 그리고 주변에서 접한 여러 사물들이 그림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과 인연을 맺어온 것들을 선택했다. 그 안에 카르마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과 자신의 업을 생각해보았다. 작업실에 놓인 책장과 그 안에 꽂힌 책들, 나와 인연을 맺어 읽은 행간을 간직한 그 책들의 등을 그렸고 광산박물관에서 본 옛날 자동차의 차체를 그리는가 하면 마트를 채운 라면과 온갖 물건들도 그렸다. 마주한 도시의 건물들도 그렸다.
붓다는 말했다.
“지금 이 자리의 당신은 지난날 당신이 행했던 것이며, 미래의 당신은 지금 그대가 행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마음이라든가 의식 또한 그 이전 순간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될 뿐이다. 우리가 다른 삶에 연결되는 것은 그것이 순수하든 순수하지 못하든 하나의 삶에서 행한 우리의 행동 때문이다. 우리는 그 과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카르마(Karma, 業), 즉 인과법칙이다. 카르마는 어원상으로 <행위>를 뜻한다. 카르마란 행위 속에 잠재되어 있는 힘이자 우리의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인과응보이다. 우리가 몸이나 말이나 마음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에 상응하는 인과응보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과거에 우리가 말했던 말과 행위, 생각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삶에 대해 완전히 책임져야 한다.
우상호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한 모든 것에서 카르마를 접한다. 그가 그린 그림은, 보여지는 현재의 이미지 역시 지난 시간과 행위의 결과와 그 쌓임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는 그 카르마를 칠화기법에서 응용한 연마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게 강한 명암의 대비, 빛과 어둠의 세계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비범함 현전이 뒤섞이며 다가온다. 삶과 죽음,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한 자리에 들러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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