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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백 / 낯선 것들의 충돌, 그 아름다운 풍경

김종근

그 이후 나는 황규백과 요꼬이의 판화전을 열었고, 1988년에는 갤러리 현대와 공동으로 판화전을 열었었다. 그와의 첫만남은 그 판화전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판화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판화가로만 불리지 않는다.

화가 황규백(72), 그는 193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성숙한 나이인 36세에 화가가 되겠다며 배를 탔고 한달 보름만에 파리에 도착한 해가 1968년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에꼴 드 루브르」 에서 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판화공방으로 유명한 아틀리에 17에서 판화의 대가 윌 리엄 헤이터에게 메조틴트 기법의 판화를 익혔다.

그는 미술을 했지만 문학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 초기에 그 자신의 실험을 좌절시켰던 메조틴트 기법을 스스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1970년 뉴욕으로 옮겨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거기서 음각판화의 위대한 실험자로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동판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근대미술박물관」, 「빠리」의 「국립도서관」을 비롯 전 세계의 주요 미술관의 컬렉션, 엄격한 「알베르티나」에도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무수히 많은 국제전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60년대말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물방울 작가’ 김창열과 더불어 그는 가장 성공한 한국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판화는 당시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고, 그 돈으로 당장 뉴욕 소호의 300평짜리 집을 사 두었을 정도였다. 뉴욕에서 활동한 한국 작가치고 그만큼 “부와 명성”을 함께 쌓은 이도 드물다고 했다. 지금은 영구 귀국을 했지만 소호에 꽤 큰 스튜디오를 갖고 있던 그는 70년대 백남준, 김환기가 부러워할 정도로 “인기작가”였다고 했다.

특히 그의 메조틴트 판화기법은 1642년 독일의 루드비히 우트레히트가 발명, 초기에는 초상화의 제작 및 복제를 위해 주로 사용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사진술이 발전하면서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다시 인기를 얻은 동판화로 예리한 조각도를 이용해 무수한 구멍을 낸 후 잉크를 붓고 천으로 문질러 찍는 매우 정밀한 기법으로 벨벳처럼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는 예술이다.

그는 이러한 기법으로 꽃과 우산, 시계 일상 사물에서 서정성을 되살려냈다. 이경성 씨는 그의 판화를 “사실적 자연이 아닌, 인간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초현실적 자연이 그의 세계”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난 ‘몰락한 귀족’ 같은 분위기가 좋아요. 멋과 사치, 예의범절을 아는 여유가 있는듯 하면서도 어딘지 우울한 사람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몰락한 귀족’처럼 바늘없는 호화로운 회중시계. 거울이 촛불 켜진 식탁 위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의 거울’ 같은 작품들은 매체는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독특한 방식으로 병치시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명상적ㆍ초현실적 언어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다리 위의 우산, 큰 바위 위에 놓인 우산, 사다리와 달 그림 등 매우 은유적인 것들이다.`

잔디 위의 흰 손수건`(2003)은 판화작품(1973)과 같은 이미지이다. 이렇게 그의 모든 작품들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동화를 연상시킨다. 코스모스, 회중시계, 붉은 버찌, 하얀 손수건, 찻잔, 장갑, 우산 등. 하늘을 벽 삼아 펼쳐진 손수건 윗부분에 두 개의 못을 박아 마치 손수건이 하늘에 걸린 것 같은 모습이다.

‘스카프가 있는 첼로’, ‘달과 사다리’등은 바이올린 우산, 사다리, 바위 같은 소재를 이용해 섬세하면서 때론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낸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초현실 또는 판타지라고 말하지만, 현실공간의 일부를 통해 관객이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일본의 천재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만약 화가가 된다면 ‘큰 벌판에 바위 하나 그리겠다’고 했던 다자이 오사무. 다섯 차례나 자살을 기도한 끝에 결국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한 그에게는 어쩌면 몰락 귀족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다자이 오사무는 누구일까? 1909년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출생한 일본의 농민 계급 출신으로 토지를 담보로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지 못한 영세 농민의 토지로 많은 부를 축적해 대지주가 된 아버지 쓰시마 집안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이었다. 아버지는 우유로 세수를 했다. 이렇게 농민의 원한이 깊어갈수록 쌓여가는 집안의 부를 자신의 치부로 여기며, 부친을 모델로 대지주를 고발한 작품을 쓴 몰락한 귀족. 바로 그런 귀족이다. 황규백은 이것에 진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잡초에 묻혀 있는 먼지 쌓인 고성,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골동품 같은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이것이 그의 ‘몰락 귀족론’이다.
또한 그는 시인 휘트만의 「풀잎」을 좋아한다. 드넓은 대지 그리고 풀잎, 그리고 그 위에 솟아나는 꽃의 이미지. 바로 그것은 그의 그림이다. 「휘트만」의 시를 들어보자. “나는 이제 대지의 위임에 압도당하고 있다. 대지는 평온하며 인내심이 있다 / 대지는 저토록 부패한 것에서 저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생장시킨다.” 브룩클린 미술관 큐레이터였던 조 밀러의 황규백에 대한 묘사이다.

황규백의 작품의 특징은 낯선 오브제들의 충돌에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과 사물의 전혀 이질적인 충돌과 조화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정감을 끌어내는 그러한 작품이다.

분명 그의 오브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즐겨 쓰던 주제, 즉 바이올린과 코스모스, 악보, 잔디, 우산, 새, 앵두, 걸상, 보자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부드러운 빛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가 고전적인 우아함을 느끼게 하며 때로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여기서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발견한다. 그는 그의 그림이 논리를 넘어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림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손수건을 하늘에 걸어 놓기도 하고 잔디밭에 놓아 두기도 한다. 그는 현실적인 공간 속에 비현실적인 공간을 배치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상상의 미학’이 그림의 요체가 되며 그의 작품세계라고 말한다. 뉴욕시절 잔디밭에 누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얼굴을 덮었던 흰 손수건이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 떠오른 느낌을 판화에 옮겼다고 했다.

이제 메조틴트의 달인이었던 그가 유화 작품 75점으로 화가로서 다시 데뷔전을 갖는다. 특히 이번 전시는 유화작품으로는 처음 여는 데뷔전이라는 점에서 그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한 향수를 가져다 준다.

‘스카프가 있는 첼로’, ‘달과 사다리’, ‘굴렁쇠’ 등 40여 점. 그가 왜 판화를 접고 그림을 그릴까? 그는 “반평생 판화만 했지만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수가 3백점 약간 넘는다”고 했다.
물론 판화에서 유화로 표현 매체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판화는 마치 바느질을 하듯 골이 빠지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인물도 그려 볼 생각”이라고 했다. 평생 소원이 유화를 마음껏 그려보는 것이었다는 그는 “이제야 소원을 풀게 됐다” 고 했다.

“나는 몰락한 귀족이 좋다. 퇴락한 모습 속에 옛 영화가 어렴풋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황규백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황규백은 화가일까? 아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시인이다. 그런 초현실주의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여름 하늘 아래 종이, 행커치프, 담요 등을 세워 놓을 수 있고, 시인이 아니고는 꽃의 연약함과 풀잎의 농담을 그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조 밀러의 이런 묘사가 황규백을 시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 이후 나는 황규백과 요꼬이의 판화전을 열었고, 1988년에는 갤 러리 현대와 공동으로 판화전을 열었었다. 그와의 첫만남은 그 판화전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판화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판화가로만 불리지 않는다.

화가 황규백(72), 그는 193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성숙한 나이인 36세에 화가가 되겠다며 배를 탔고 한달 보름만에 파리에 도착한 해가 1968년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에꼴 드 루브르」 에서 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판화공방으로 유명한 아틀리에 17에서 판화의 대가 윌 리엄 헤이터에게 메조틴트 기법의 판화를 익혔다.




그는 미술을 했지만 문학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 초기에 그 자신의 실험을 좌절시켰던 메조틴트 기법을 스스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1970년 뉴욕으로 옮겨 작품 활동을 해왔다. 그는 거기서 음각판화의 위대한 실험자로서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동판화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근대미술박물관」, 「빠리」의 「국립도서관」을 비롯 전 세계의 주요 미술관의 컬렉션, 엄격한 「알베르티나」에도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무수히 많은 국제전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60년대말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 ‘물방울 작가’ 김창열과 더불어 그는 가장 성공한 한국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판화는 당시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고, 그 돈으로 당장 뉴욕 소호의 300평짜리 집을 사 두었을 정도였다. 뉴욕에서 활동한 한국 작가치고 그만큼 “부와 명성”을 함께 쌓은 이도 드물다고 했다. 지금은 영구 귀국을 했지만 소호에 꽤 큰 스튜디오를 갖고 있던 그는 70년대 백남준, 김환기가 부러워할 정도로 “인기작가”였다고 했다.

특히 그의 메조틴트 판화기법은 1642년 독일의 루드비히 우트레히트가 발명, 초기에는 초상화의 제작 및 복제를 위해 주로 사용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사진술이 발전하면서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다시 인기를 얻은 동판화로 예리한 조각도를 이용해 무수한 구멍을 낸 후 잉크를 붓고 천으로 문질러 찍는 매우 정밀한 기법으로 벨벳처럼 부드럽고 깊은 맛을 내는 예술이다.

그는 이러한 기법으로 꽃과 우산, 시계 일상 사물에서 서정성을 되살려냈다. 이경성 씨는 그의 판화를 “사실적 자연이 아닌, 인간 심리를 바탕으로 하는 초현실적 자연이 그의 세계”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난 ‘몰락한 귀족’ 같은 분위기가 좋아요. 멋과 사치, 예의범절을 아는 여유가 있는듯 하면서도 어딘지 우울한 사람같은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몰락한 귀족’처럼 바늘없는 호화로운 회중시계. 거울이 촛불 켜진 식탁 위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의 거울’ 같은 작품들은 매체는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독특한 방식으로 병치시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명상적ㆍ초현실적 언어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다리 위의 우산, 큰 바위 위에 놓인 우산, 사다리와 달 그림 등 매우 은유적인 것들이다.`

잔디 위의 흰 손수건`(2003)은 판화작품(1973)과 같은 이미지이다. 이렇게 그의 모든 작품들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동화를 연상시킨다. 코스모스, 회중시계, 붉은 버찌, 하얀 손수건, 찻잔, 장갑, 우산 등. 하늘을 벽 삼아 펼쳐진 손수건 윗부분에 두 개의 못을 박아 마치 손수건이 하늘에 걸린 것 같은 모습이다.

‘스카프가 있는 첼로’, ‘달과 사다리’등은 바이올린 우산, 사다리, 바위 같은 소재를 이용해 섬세하면서 때론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낸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초현실 또는 판타지라고 말하지만, 현실공간의 일부를 통해 관객이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은행 FORYOU 웹진 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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