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광하 / 한국적 색채와 이미지를 찾아서

김종근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유일한 서한집이 있다. 고흐는 언제나 동생이 보내준 돈으로 자신이 먹을 빵보다 그림의 모델료를 먼저 지불했던 배고픈 화가였다. 1887년 그는 작가 지망생이었던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선적 가치로서 ‘예술’을 내세우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것은 “죽어있는 역사나 교훈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을 풍부하게 끌어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살아있는 삶이란 바로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신 세계와 이 땅의 원형, 그 뿌리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62세의 이광하, 재야 작가처럼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려 온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런 예술가의 숙명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광하는 “색과 형체의 맑은 유동성의 느낌, 내면적 아름다움을 발화 시키길 나는 원한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고흐가 “잘 익은 곡식이라고 모두 흙으로 돌아가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한 “옛것이 아름다운 만큼 새것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과거나 미래는 우리와 간접적인 관계 밖에 맺지 않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는 직접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들과 어떤 불가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광하. 그는 1942년 5월 29일 평안북도 만포 출생이다. 그는 196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고, 1965년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를 졸업했다. 1961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후 프랑스 파리의 크리스티안 푸조 문화센터에서 열린 개인전까지 현재까지 그는 수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이것만으로 그는 아주 특별한 약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에게 40여 년의 화력에 비하면 그의 작품 전시 발표는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그는 부부전을 3번 가지기도 했다. 이것은 참으로 다른 작가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경력이다.

그는 지금의 중림동에서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장의 5남매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졸업 후 성북 , 숭문 , 연희 중 고교에서 미술교사 생활을 했고, 1970년대는 지금의 중앙대 전신인 서라벌 예대에서 강의를 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보아 그는 일찍부터 작품에 매달릴 수 있는 유복한 주변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작가들이 자신의 역경을 넘어서서 예술에 매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이광하는 좀 달랐다. 그것은 실력에서도 분명 달랐다. 그의 놀라운 청년시절의 훨씬 다채롭고 빛나는 수상경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1961년 약관 19살의 나이에 그는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제10회 국전에 특선을 차지한다. 불량스러움과 사춘기를 갓 지낸 젊은 청년기에 입선도 어려운 것이 당시의 국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서 1962, 1963년 국전에 특선을 하면서 그는 이미 대학 4학년의 나이에 국전 최연소 추천작가로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1963년에 신인예술상전 차석상과 현대작가전 수석장려상, 신상전 현대문학상 장려상, 64년에는 신인예술상 장려상을 모두 휩쓴 것이다. 이처럼 그는 20대 초반에 다른 작가들이 평생을 거쳐 얻어야 할 수상과 영예, 경력들을 그는 모두 얻었다. 어쩌면 너무 일찍 그러한 주목을 화단으로부터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그에게 건축가 김수근은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는 전공을 조금 소흘히 하면서 결국 건축미술과로 졸업하게 된다. 이것이 가볍게 짚어본 그의 약력이다. 이러한 건축과로의 변신은 그에게 순수예술의 세계에서 약간 멀어지게 한 이유가 된다. 물론 작품에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인 요소들은 바로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타고난 화가였다. 그의 그림이 어떠했는가를 보기에는 1959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한 작품이 그의 표현력과 묘사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그는 그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러 온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1969년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미모의 재원인 김미자 씨가 바로 그이다. 엉뚱하게도 그와 결혼을 기념하는 전람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6번째 개인전이다. 이제 그의 예술에 김미자가 등장한다.

얼마전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화가 27명이 참가한 ‘한국 빛깔의 신비’ 전시회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미로홀에서 열려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이광하의 작품은 한국적 조형미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많은 작가들이 한국인의 서정성과 민족정서를 부드러운 선과 색채로 표현했다. 그 가운데 가장 한국적 이미지와 조형성을 강조한 이광하의 ‘사랑이야기’는 서양의 많은 화가들과 미술 관계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 때 그의 작품을 보았다. 그 때 그 작가를 나는 이제 만난 것이다. 그 때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과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차를 나누고 점심을 하면서 그의 대작이 걸려있는 사무실에서조차도 그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인 김미자 씨는 그가 매우 코믹하고 유머스럽고 가정적이고 작가로서의 사고가 깊다고 하였지만 그는 기어이 몇마디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말을 아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하였듯이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어떤 좌우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도 일체의 화단에 그다지 깊은 관여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그가 십여 차례를 밑도는 정도 밖에 전시를 하지 않은 것에도 약간은 결벽증 같은 것이 스며있다. 물론 한 작품을 오래두고 본다든가 몇년이 지나 다시 손을 본다든가 아니면, 그림을 태운다든가 하는 약간은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그는 작업에 빠져들면 담배를 계속 피운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는 나가기보다는 집에서 소주로 폭주를 한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들을 더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지나간 자료들을 모아 놓은 책자나 카탈로그가 전혀 없었다. 아마도 그 자신이 갖는 완벽성의 고집 때문이리라. 그는 아직도 무엇을 기다리는 듯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태도는 그의 작품에도 예외없이 드러난다. 그가 어떤 특정한 이념이나 거창한 이론을 가지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생활 속에 정취와 모습들을 화면 속에 담아내는 자세가 그러하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그러나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현상들의 만남 그는 이러한 세계들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의 뿌리는 여전히 한국적인, 전통적인 것들에 뿌리내리고 있다. 비록 그가 다루고 있는 세계는 전통적이고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사랑”이라는 것이지만, 그의 고집은 그의 화제에서처럼 그의 제목도 수년간 하나같이 “러브 스토리”이다. 그의 예술세계에 화두는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이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세계는 음과 양이 하나가 되어 빚어내는 그러한 세계인 것이다. 그의 세계에는 낮과 밤, 아니 좌우의 대비,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등의 결합 또는 완전한 추상적인 세계의 조화가 먼저 자리한다. 이처럼 작품 속에 드러나는 주제는 의외로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다.

산과 달 소나무와 불사조이거나 봉황동 전통적인 우리의 테마들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색동 무늬와 강강수월래를 연상시키는 형태, 솟대 그리고 산과 바다, 색채의 대비 이러한 조형 요소들이 한 화면에 어울려 작품의 특질을 형성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산과 바다. 우주의 만상을 선과 색채, 그 사이의 색면 아래에서 순수함을 표현하려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고흐가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이광하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미술사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추구했던 작가들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이광하는 천부적으로 타고난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 정적이고 그러면서도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칼라풀한 그의 작품세계는 따뜻하다. 그리고 200여 호에 달하는 대작에서 보여지는 세심한 작품, 다소 복잡하고 지나치게 다양하리라 보여지는 그 전통적인 색채에서 우리는 그만의 작은 것들이 보여지는 세계에 진정한 미감을 보게 된다.

여전히 그는 다리가 불편한 가운데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그는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시기에 작품평가를 지금 정의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도 그는 전업작가로서 자신의 작업에 혼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지난 프랑스 파리 푸조문화센터에서의 찬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야 말로 한국적인 정서와 색채 그리고 조형이 골고루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특히 최근에 보여지는 일련의 작품에서는 그의 부인인 김미자 씨와의 합작들은 새로운 패턴으로 그의 회화 양식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바로 그가 추구하는 것은 구상과 추상의 만남 같은 것이다. 즉 이광하의 추상적이며 기하학적인 구성 그리고 김미자의 구상적이며 사실적인 그림들이 한 화면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광하의 작품세계는 이제 새로운 작품 스타일과 한국적인 색채로 그의 예술세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시기에 도달해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세계와 고집스러운 태도는 우리가 눈여겨 볼만 하다.


흔들리지 않고 한국적인 미의 세계를 지치지 않고 지켜가고 있는 고집스러움. 이것은 다름 아닌 오로지 화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예술가로서의 철학이다.

헤어지면서까지도 그는 그의 작품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끝끝내 그의 예술세계를 마치 그림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작은 그러한 그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젊은 작가들이 그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화가는 죽어서 그림을 남긴다. 그가 아름다워 보인 순간이었다.


국민은행 FORYOU 웹진 2004.1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