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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의 마술사 샤갈, 자신을 말하는 초록

김종근

피카소는 그랬다. “마티스가 죽은 후 진정으로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있는 화가는 샤갈뿐이다.” 그만큼 샤갈은 색채에 관한 한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준 금세기최고의 화가이다.

마르크 샤갈 역시 여느 화가들처럼 여러 가지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였지만,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초록색의 사용에서 그 특징적인 빛을 발하였다.

그의 회화에 빈번하게 그리고 인상적으로 쓰이는 색 가운데 초록색의 색채는 안정감과 고향에의 향수, 그리고 자신을 표시하고 상징하는 색채라는 것에 주목 할 만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 색채들의 근원이 어디서 태어난 것인가를 주의 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주제와 색채의 원천은 러시아 바로 고향이다. 1887년 7월 6일 러시아의 작은 도시 비데프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의 원래 이름은 ‘모이셰 하츠켈레프’이었고 성은 ‘세갈’이었다. 샤갈의 아버지는 성을 ‘샤갈’로 바꾸었고 ‘샤갈’ 은 ‘큰 걸음’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집안은 하시디즘 유대교를 믿는 독실한 가정으로 하시디즘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수탉이나 암소 같은 동물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믿는 신앙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종교이다. 샤갈이 평생 그림 속에 동물을 그리고 동물들이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환생해서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 종교적 배경 때문이다. 사람이 수탉을 타고 가는 장면들이 그래서 그에게서만 나타난다.

샤갈 그림의 주제가 이런 유대인과 러시아의 배경에서 출발했다면 , 그가 진정한 색채에 눈뜨게 된 것은 1910년(23세) 비나베르의 후원으로 8월 파리에 도착 하면서 이다.

그가 파리에서 나름대로의 색채와 빛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파리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 전부터 꿈꾸고 동경 했던 세잔느 같은 화가들, 또한 화집으로만 보아오던 그림들이 모두 파리에서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 이었다.

숱한 화가들이 드나들던 미술학원 그랑 쇼미에르, 그 근처 벌집이라 불리는 <라 뤼세>의 몽파르나스 화실에서 그는 세계 각국의 에꼴드 파리 화가들과 어울려 보헤미안적인 삶을 시작 했다.

그는 이곳에서 시인 산도라, 쟈콥, 아폴리네르, 화가 들로네, 레제, 모딜리아니 등 젊은 화가들과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 그는 최초로 무심사로 출품하는 앙데팡당 전에 출품 하였고 거기서 많은 입체파 화가들과 만나면서 서구 예술의 새로운 형태인 큐비즘의 흐름에 합류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가장 잘 알려진 1911년의 《나와 마을》이라는 작품이다. 커다란 암소와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 그림은 소의 모습과 붉은 색 바탕에 흰색이 섞인 고향 풍경이 배경으로 들어와 있다. 이 구성적 화풍은 당시에 유행하던 큐비즘이나 들로네의 음악적 선율이 가미된 오르피즘의 영향을 보여준다. 형태에 있어서는 입체파 화풍을 , 색채에 있어서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시키는 들로네 작품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화면의 분할이라든가, 크고 작은 인물의 대비 등 극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양식들이 이 시기의 절대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 자신의 모습을 한 얼굴이 초록으로 칠해져 있다. 여기서 녹색은 바로 화면의 붉은 색과 대조를 이루며 인물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는 종종 자신을 녹색의 인물로 표현하는 습관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색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과 지름길은 그의 팔레트를 통하여 색깔을 보는 일이다. 팔레트는 예술가들의 습관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들의 색에 대한 선호도와 취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레트는 예술가들의 조형성과 표현성을 대변한다. 그림속 팔레트의 초록색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샤갈은 이미 야후다 펜에게서 배울 때부터 독창적인 색채를 사용하였고 그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스승 바크스트로 부터는 색채의 단계를 좀 더 단순화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러한 충고는 그의 그림에서 복잡한 색보다는 단순하면서 칼라 풀한 색채를 받아들이게 된다. 파리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야수파의 색채 론을 받아들이고, 야수파의 자유로움과 강렬함을 받아 들였다. 레제나 들로네와 가까웠던 샤갈은 큐비즘의 영향을 받지만 끝까지 색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얼마나 색채에 민감하고 색채를 중시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와 마을》은 고향을 떠나 파리에 머물면서 제작한 것으로 다른 작품보다 샤갈의 강렬하고 원색적인 색채의 대비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이 아득한 고향 풍경을 떠올리는 작품들은 연 이어 제작되는 초기 회화 속에 황소와 우유 짜는 여자와, 닭, 러시아의 시골집 등의 표현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이 풍경들이 다른 어떠한 인상보다 그의 시각적인 기억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을 수차례 증언하고 있다. 그는 먼 곳의 고향 풍경과 이전에 없었던 인물 구성으로 화사한 색채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기묘하게 섞인 색채의 소용돌이는 화면에서 더욱 빛나고, 화풍에는 화려한 스토리의 달콤함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었다.

1914년, 아폴리네르의 주선으로 샤갈의 작품은 헤르발트 발덴이 주재하는 베를린의 [ sturm (폭풍)]화랑에 소개되었는데 이 시기의 작품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듯 한 열정적인 색채로 일종의 표현주의를 느끼게 해주는 화풍이었다. 베를린을 경유해서 샤갈은 조국의 고향으로 귀국하는데 거기에는 평생의 반려자인 벨라와의 결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탄생일》, 《결혼》, 《산보》등은 그의 행복 한 순간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화에서 발견되는 하늘을 나는 형상들이 등장 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나무들과 집들의 색깔도 당연히 행복과 희망의 초록색으로 그려진다. 《마을 위》와 같은 많은 기쁨의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이렇게 태어났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녹색과 블루가 적절히 섞여 있지만 샤갈 자신을 나타내는 모습에는 녹색의상을 입고 있다. 지면은 따뜻한 색이 중심이 되는가 하면 하늘을 나는 두 부부는 꿈의 색깔이라 할 수 있는 약간 차가운 색조의 초록색과 블루이다. 화가 자신인 샤갈이 사랑하는 벨라와 같이 공중을 떠다니는 이 환상적인 구성과 이미지, 장식적 화면은 그의 명성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그는 색채의 사용에서 보색과 대비를 적절히 이루어 내며, 색을 혼합하는 등 지극히 독창적 채색법을 발전 시켰다. 형태는 색채의 효과를 노리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샤갈은 큐비즘과 만나면서 점차 조형적 형태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환상적인 색채도 심화 시켰다. 샤갈은 색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나는 사람의 색채들을 대조적으로 장식했다. 샤갈은 친숙한 것, 사랑과 증오와 같은 인간 감정에서 흐르고 있는 모든 것을 화면에 실으려 했다. 이러한 표현법을 보인 샤갈의 작품들은 독일 표현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쉬르리얼리즘의 선구적 역할을 돕기도 하였다.

물론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그는 색조를 더 한충 원색적으로 빨강과 파랑 그리고 초록색등으로 대조를 보이면서 색채에 무게를 주었다. 그 색채의 대조는 특히 종교적인 테마를 표현하는데 두드러졌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기도 했던 이유로 그는 종교적 테마인 떠돌이 유대인을 많이 그렸고 샤갈은 멸시와 핍박을 그들의 얼굴에서 슬픔과 고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샤갈은 유대 노인 한 분을 집으로 초대했다. 노인은 의자 위에 앉더니 곧 잠이 들었다. 샤갈은 재빨리 노인을 그렸다. 그 노인의 옷이 초록색 옷이었다.

이렇게 샤갈의 그림은 뛰어난 색채로 인해 “이제부터 자네의 색채가 노래를 하겠네.” 라고 말 할 정도로 빛을 발하기 시작 했다. 빨강, 노랑, 분홍, 초록 물감이 팔레트에 가지런히 칠해진 것이 샤갈의 팔레트인데 이 색채들은 그대로 그의 그림에서 등장한다.

1912년 《골고다》를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그가 상당히 입체파의 작품의 영향과 초록색과 빨강색의 배합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신성함을 보여준다.

입체적인 구성법으로 나뉘어진 예수님의 골고다에 끌려가 매달린 모습이 초록색으로 칠해져 그가 초록색을 신성과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하나의 메타포적인 칼라가 아닌가. 판단된다. 1915년의 누워있는 시인의 작품에서도 녹색이 중심이 되어 말과 돼지가 놀고 있는 전원 풍경이다. 그 고즈넉한 풍경 전면에 시인이 아주 길게 누워 있다.

하늘의 일부 색상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지붕도 나무도 초록색이다. “새로 깎은 잔디밭의 단순한 초록색은 단지 보잘 것 없는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만족감을 느낀다”. 고 괴에테는 광학논문에서 말하고 있다.

무성한 여름잔디의 이 누워 있는 시인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사색을 꿈꾸는 사람처럼 길게 누워 평온을 말하고 있다. 샤갈의 그림 속에 이러한 초록은 만족감인 동시에 성장이며 희망을 말한다. 벅차오르는 새로운 모습의 표정과 절대적인 행복감,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화폭에 아름다운 색채를 보고 정말 색채가 노래하는 듯 한다고 말한다. 그의 초록은 1917년 팔레트를 가지고 있는 자화상에서는 초록옷의 모습으로 자신을 상징하는 대표성이 초록색임을 암시한다.

샤갈은 종종 화폭 위에 빨강, 노랑, 파랑 색깔을 움직여 암소를 실은 짐수레가 마을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풍경을 그렸다. 짐수레의 바퀴는 노랗게, 그 위에 실린 암소는 파랗게, 짐수레를 끌고 가는 어미당나귀는 빨갛게 색칠했다. 이렇게 다소 즉흥적인 느낌으로 색채를 칠하는 것 같지만 샤갈은 색채의 대비나 구성에서 치밀함을 보여준다. <나와 마을>작품을 위한 에스키스는 그의 이런 색채와 형태에 대한 진지함을 잘 보여준다. 피카소는 “샤갈의 그림은 정말로 대단해. 결코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이 아니더군. 르누아르 이래 샤갈처럼 빛을 잘 이해한 화가는 없다” 고도 했다.

샤갈은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아래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 신부를 그리기 좋아했다. 그러한 화폭에 중심적인 색채는 청순하고 순결함의 상징인 흰색이 중심이지만, 나무나 꽃은 언제나 초록색이다. 화려한 예복을 입은 신랑 신부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그의 그림에서 묻어난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당나귀는 바이올린을 켜고, 천사는 하늘에서 꽃다발을 들고 내려온다. 샤갈의 그림은 이처럼 행복과 사랑의 서정시가 되어 색채와 함께 하모니를 이루어낸다. 그는 스스로 “우리들의 인생에는, 화가의 팔레트에 놓인 것같이,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보여 주는 유일한 색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색입니다. 나는, 이 사랑이라는 색에 모든 영역에서의 성취를 허락하는 모든 특질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에 화학이라는 말을 빈번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화학은 인생 그 자체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샤갈은 이 사랑의 색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달콤한 사랑의 색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 샤갈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작품 스타일과 영감에 의한 착상들은 완전히 변했다. 그는 극적인 세계상을 묘사했다. 예를 들자면 그의 걸작 중의 하나인 《천사의 타락》 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 수난상》 같은 작품들에서 그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박해와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은 그를 1941년 미국 망명길로 내몰았으며 그것은 그에게 주제뿐만 나이라 색채에서도 중요한 변화의 징후를 가져왔다. 더욱이 1944년 벨라의 죽음으로? 그는 일 년 가량 작업을 못하고 마침내 다시 작업을 시작 했을 때는 이전의 밝은 색채에서 어두운 색조와 우울한 효과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생애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194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작품의 대부분에서 그의 강한 색조와 시적인 꿈들이 악몽들로 바뀐 듯 했다.

샤갈은 지나간 과거와 미래를 함께 결합시키는 그림들 속에서조차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즉 벨라에 대한 사랑)을 형상화하고 노력했다. 그 후 샤갈의 색채는 그의 작품 속에서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샤갈의 색채는 녹색은 물론 빨강과 파랑 노랑 그리고 환상적인 혼합 색으로 반짝거리거나, 양털처럼 푹신 해보이거나 때로는 터치가 대범하면서 선명한 색조를 유지했다.

그의 색채에는 노랑색과 검정도 무시 할 수 없다. 그의 색채의 사용을 보면 예수의 몸이 노란색이고, 오른쪽 밑에 모세가 들고 있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 노란색, 모세 옆에 짐승의 색깔이 노란색이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맨 앞줄에 여자가 안고 있는 아기가 노란색을 보여준다. 눈에 띄는 노란색들이 삼각형을 이루면서 이 작품의 전체 의미를 끌고 간다.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장관이었던 망드레 말로는 샤갈의 그림을 보고 “색채의 유희”라고 했다. 화려하면서 장식적이고 모네의 분위기를 연출시키는 그에게 색채는 공간이 동시에 본질이고 모양을 만들고 형상을 흡수하는 유희적인 것이 색채의 본질이다. 그 본질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중심이 샤갈의 서정성이다.

분명 소박한 동화의 세계나, 하늘을 나는 연인들이란 주제와 자유로운 공상과 풍부한 색채로 마음까지 맑게 풀어주는 것은 샤갈만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수닭》 그림에서 처럼 사람보다 더 큰 닭을 껴안고 가는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 풍경은 모두 녹색 분위기로 꾸며지고 있다.
그의 이러한 다양한 색채와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많다.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바이올린 연주자》 《기도하고 있는 유대인》 《에펠탑 앞의 신랑과 신부》 《서커스》 등과, 자서전에 《나의 인생》이 있다.

그러한 자질을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나의 인생]에서 엄마의 묘소를 참배한, 다음의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너무나 그 때의 샤갈 심정을 잘 말해준다.?

“강이 멀어지고, 다리가 점점 더 멀어지면 영원의 울타리가, 땅이, 저 묘에 아주 가까웠다는 것일까? 여기에 나의 영혼이 있다. 여기에서 나를 찾고 싶다. 나는 이 곳이다. 나의 그림, 나의 탄생은 이곳인 것이다. 슬픔이여, 슬픔이여.”

샤갈은 1985년 3월 28일 저녁 그의 화실에서 한낮을 보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람과 동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샤갈은 그렇게 우주 속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것이다. 수많은 아름다운 그림들과 시를 남겨놓고 샤갈은 “민중이여, 내 노래는 그대를 위해서이다 .그대는 이 노래를 듣고 기뻐하리. 나의 힘찬 목소리에 모든 슬픔과 고단함이 사라진다. 나는 당신을 보고 꽃과 숲, 사람과 집을 그린다. 야만인처럼 나는 당신의 얼굴을 색칠 한다” …

그 색은 초록, 그리고 빵강 그리고 파랑 노랑 이었다. 초록 그 색은 그가 다다르고 싶었던 희망과 평화, 안식의 마지막 색채 이었던 것이다.

월간 중앙 2006년 11월호
미술평론가 김종근의 ‘색채, 화가들의 영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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