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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설의 신작 / 자유로운 정신의 지평에선 제스처

김종근

“선을 그으며 마치 무심히 어린아이같이 붓을 옆으로 쥐고 긋는다.
긋지만 형식에 구애 없이 자연스레 붓에 의지와 행위를 모두 맡기고자 한다. 선은 허공을 향해 힘차게 발길질 하듯 쭉쭉 뻗어 공간과의 화해와 조형을 구축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선이 아니다. 톰블리나 바스키아가 스틱 선을 주로 섰다면 난 단지 모필 에서 오는 힘과 직관적 선으로 농담과 기운을 느끼게 하고 싶을 뿐이다. “

작가노트 중에서


조영설의 이러한 자전적인 발언이야말로 그의 화두가 무엇이며 그의 작품세계가 어디를 지향하는지 명확해 진다.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 해놓은 그의 작가적 태도에서 우리는 바로 도가사상의 장자에서 나오는 소요유의 한 성향을 발견한다.

인간은 어떠한 지식이나 앎에 구속되어 자연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기에 인간이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연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와 일체화한다.는 말은 완전한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무한한 자유의 경지를 누리는 것이다. 조영설의 예술 의지나 철학은 이것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림 속에 거침없고 절제된 격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거닐며 노닌다> 라는 의미이다. 어렵지 않게 조영설의 회화적 출발에서 장자의 철학에서 자유의 강조가 그와 무관하지 않음을 찾아 낼 수 있다. 그의 그림을 보자 , 그 어느 것에도 그의 화면에는 주저함과 답답함이 없다. 작가는 이미지와 색채의 공간 안에서 내적인 정신의 자유를 구가하면서 유유자적한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반복적이거나 틀에 박힌 형식, 지루한 고정관념 같은 인상을 볼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그는 회화란 자유로운 정신의 표현이고 거기에서 참다운 예술가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상념으로 작업한다고 ,그가 즉흥적이고 감성적으로 뿌리고 긋고 작업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그의 이 추상적이고 극렬한 제스처의 작업 뒤에는 수없이 많은 양의 기초적인 드로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의 회화에 깊이와 작가정신의 견고함을 엿 볼 수 있다. 자유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그리거나 대충 혹은 무절제하게 화폭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화면에 낙서처럼 그어지고 덧붙여진 불규칙한 이미지와 색채들은 언제나 역동적이고 파격적이다. 만물이 한순간도 그칠 사이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듯이 그의 자유로운 경지의 세계 속에는 자연에 몸을 맡기고 만물의 기운에 따라 소요하는 영토에 조영설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것을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참다운 자유의 존재로서 예술가라고 이해하고 있다. 즉 선을 긋지만 “형식에 구애 없이 자연스레 붓에 의지와 행위를 모두 맡기고자 한다.” 는 것이다. 바로 그 어떠한 인념이나 형식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조영설의 모습은 우연이도 자연 앞에 보이는 몰입과 무욕의 정신세계가 중국의 예술가들이 갈망 했던 최고의 경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어리아이의 마음이 자유였듯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박하지 않은 자유로움이 조영설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얽매임을 거부하는 그는 그의 작업 속에서 이우환의 영향을 구태여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우환이 동양의 철학적 세계를 동경 했다면 조영설은 장자의 세계관을 마음과 작품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동양에 중요한 오행을 상징하는 5가지 색을 반드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즉 자유로운 세계에서도 어두운 배경과 흰색의 여백과 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구성은 그가 밝혔듯이 배경은 실체적 우주를 그리고 밝은 선은 기를 표현한다. 그는 그의 선이 마치 무위작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선이길 갈망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조영설의 근작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칸딘스키나 자우끼가 보여주는 회화의 원초적인 몸짓과 맥을 같이한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한국미의 특질처럼 무기교의 철학과 같은 관조적인 인상도 있다. 언듯 보면 단순히 선을 긋거나 색을 입히는 과정은 공간을 달리는 필치가 연속되는 공간에서 스스로 유희하듯 장난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화폭에서 그 자신의 고뇌는 노출되지 않는다. 동양적 명상과 관조의 세계에서 직관으로 그가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더욱 자신의 작업의 의지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이 정신에는 그 직관이 오랜 깨달음과 정진에서 나오는 것임을 구체화 시킨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르가즘이다. 내 삶이 오르가즘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르가즘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오르가즘을 그림 안에서 자유와 지순의 정신과 교감하는 것이다. 그 방식을 禪적 명상과 직관으로 풀어내고 싶어 한다.“

만약에 톰블리의 회화가 화가의 신체와 캔버스, 그리고 화가가 떠올리는 기억속의 신체 사이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조영설의 회화는 오히려 20세기 회화사에 가장 아름답고 시적인 화가의 행렬에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여전히 추상표현주의 화가나 동양의 화가들이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선과 몰입의 세계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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