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권이나의 작품세계를 다시 한번 들춰 보거나 작품을 떠올린다는 것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녀의 개인전을 두 번씩이나 찾아가 내가 느낀 전율의 감정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2년 전인가 그녀의 자료가 석주미술상 심사위원회의 후보 자료로 올라와 논의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작품성이나 그녀가 가진 작품의 독창성에 충분히 평가를 하고 공감, 동의했지만 그녀에게 상을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유보 하자고 했다.

이유는 작품이 충분히 수상 할만 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프랑스에 사는 이유로 국내 활동이 더 적극적이지 않았고 ,권이나 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뛰어나거나 훌륭한 작품세계를 가진 작가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로부터 마니프 미술전에서 , 또 석주미술상 수상식에서 나는 그의 작품을 보았고 이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개인전과 서울에서의 연이은 개인전을 가지면서 그는 우리가 가졌던 몇 가지 우려를 불식 시켰고 당당하게 일어섰다.
이러한 의미는 그의 회화가 결코 상투적이지 않고 신선함을 얻는데 크게 성공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의 그림들은 밝거나 선명하지 않다. 우울하고 칙칙하고 명료하지 않다. 더욱이 색채도 무채색으로 가득 찬 이미지들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는 그렇게 맹목적이지 않다. <화가의 혼>이란 작품을 보자. 이 그림은 얼핏 보면 꽃병에 노란 화이자가 어설프게 꽂혀 있는 것처럼 밋밋하다. 별다른 기교도 이 그림엔 없다. 별다른 구성도 기법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스라하게 오른쪽 화병에 한 인물이 떠오른다.

화가의 혼은 이중섭의 초상처럼 중의적인 이미지를 연상해 보일 뿐이다. 그의 간결한 비유적인 인상은 이처럼 모티브가 가진 상징적 이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적합한 형식인 것이다. 그의 테크닉과 기법이 어디로 향하고 있음을 잘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테마는 이처럼 주변에 흩어진 삶의 순간들에서 만난 것들이 모두 등장한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드의 스치는 듯한 인상, 오빠에 죽음에 접한 작가의 이미지는 처연하고 애틋한 강렬함만 전해줄 뿐, 그는 더 이상의 어떤 사족을 덧붙이지 않는다.

<검은댕기>로 그어 내린 뒷모습은 충분히 그 슬픔의 깊이와 비극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의 이런 단편적인 이미지를 화면에 결합시키는 스킬은 <어머니의 초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평면적인 화면의 얼굴 모양에 작은 천 조각을 잘라 덧붙여 얼굴로 만들어 내는 그의 번득이는 재치가 놀라울 정도이다. 무채색 배경으로 뒤덮인 화면에 몇 번의 붓질로 되살아난 파란 색채의 상의와 붉은 색채의 치마는 그의 인물화가 어떤 흐름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에게 회화는 이미지의 연금술사처럼 그려내는 것이다. 왜 그의 화면은 이렇게 칙칙하고 어둡고 을씨년스러울까? 이런 우리의 물음에 대해 그의 회화세계를 나는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어쩌면 권이나는 뭉크가 26살 때에 말했던 “우리는 더 이상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거나 여인네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실내는 그림자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천하고 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고 말이다. 그의 전 작품을 둘러보아도 그의 회화에는 우리가 흔히 보았을 법한 쉽고 편한 일상적인 풍경은 없다. 대신 그의 회화에는 너무나도 간결하고 심플한 삶의 편린들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혀 사람들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 조각에서 출발하여 회화로 넘어오면서 권이나가 가지고 있던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를 그리려는 의지가 크게 작용 한 것이다. 마치 “두려움과 병마가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키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라고 절규했던 뭉크의 이 고통스런 자전적 고백이 그의 회화세계 속에 얼마나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새침때기 같은 고통과 슬픔, 비애가 화면에 차 있어도 그 그림의 표정들은 단촐 하기 그지없다. 그만큼 그는 그림이란 견딜 수 없어 받아들인 필연적인 언어의 토하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고뇌와 개인적인 슬픔의 내면 모습이 과일 그리고 시인, 열애, 창가 같은 최근작품에서 한결 같이 강렬하게 표출 되는 것이 이러한 진정성을 대변한다.

그 인물들이나 대상들이 세밀하면서도 강한 생략과 무심한 침묵으로 대결한다. 무엇인가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그림들은 한결 같이 최소한의 언어로 소통을 이루어낸다. 그 침묵의 언어들 속에 내밀하게 드러낸 여인의 속살 같은 비밀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어떤 슬픈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전율 감을 팽팽하게 만들어 놓는다.

밝은 빛깔보다는 어둡고 가련한 추억이 지배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온몸으로 다가와 그의 회화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그가 표현해야 할 진정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숨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인 진실과 진정성이다. 이것이 그가 그림을 선택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숙명을 의미하며 지금 그는 이 세계를 치열하게 담금질 시키고 있다. 권이나의 회화세계의 중심에는 이렇게 한 인간이 거쳐 온 격렬한 운명적 슬픔과 경험이 명백한 모티브로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슬픔의 기억이자 우리들의 기억이기도 하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그 이미지들은 툭 뱉어진 오브제처럼 화면에 등장하고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들도 익명성의 인물들이지만 누구의 모습인지 알 수 있듯이 영혼의 울림 같은 고백적 이미지로 묘사된다. 가 무수히 홀린 듯한 붓터치로 달랑 하나의 모습만 그려대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단순한 아이콘이 권이나 회화의 가장 큰 특질이 되고 있는 것은 그의 커다란 발견이다. 그의 최고조로 억제되고 절제 된 색채의 완성은 그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부분을 아끼면서 내면의 심정을 아껴두는 비의적인 스킬, 이처럼 회화가 말하고 싶은 부분을 다 말하지 않아도 하나의 단일한 이미지의 노출로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것이 회화의 진실이다.

그림이란 어쩌면 생의 숨결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소리 없는 울림을 색채와 표정으로 넘어 설 수 있는 것이야 말로 회화의 힘이다. 누구든 그의 그림 속에 하나의 표정과 느낌만으로 과감하게 생략 된 편린들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면서 다른 그림과 비교할 수 없는 독창성으로 가벼운 떨림을 주는 것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이것을 느끼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이다.

다만 그의 캔버스에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픔을 낮은 목소리로 담아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때 묻지 않은 신선함과 진부하지 않은 수사법에서 나는 그의 새로운 비전과 중요한 무게를 본다. 내가 여전히 권이나의 회화가 우리화단의 구상미술에 진부한 표현법과 화풍, 기법에서 새로운 한 흐름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이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권이나의 다소 신인처럼 등장한 낯선 출현은 우리 미술계로서 반가운 만남이 틀림없다. 특히 현상만을 표현하는 화단에서 자신의 진정한 본능을 원초적인 자아와 언어로 인간이 가진 슬픔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담아낼 줄 안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드물다.

그것도 구체적 형태를 거부하고 불투명한 기억속의 한 장면처럼 자신의 표현적 욕망을 완성하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우울한 분위기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마지막 언어로 되돌려 놓는 일이 권이나의 참다운 예술임이 여기서 더욱 명백해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 어느 것을 집어 들어도 치열한 전투와 격전지에서 막 길어 올린 듯한 강렬한 전율과 의미심장함을 통감한다.

다시 인용하건데 누가 뭐래도 그의 그림은 평소에 집에 걸어 놓고 싶지는 않지만 문득 마주쳤을 때 내면세계를 다시 들여다보는 마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가까이 걸어놓고 싶은 그림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감정을 주는 결정적인 이유도 그의 작품에 강력한 메시지의 힘이 바로 그 단순함의 드러냄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그림이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나의 “창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권이나가 그만의 언어로 보기 드문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내는 열정은 그의 가슴에 그림은 진실만을 옮겨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뜨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원숙함과 세련미의 조형 양식으로 확연하게 구별 지우는 수상 기념전 , 단아한 붓질로 수없이 그어 내린 투명한 붓질이 주는 중첩감과 그곳에서 가능한 공간의 깊이. 그 조형 방법이 만들어내는 입체감과 수많은 선의 형상은 분명 한국 구상미술에 새로운 희망이다.

그는 회화 양식으로 평면에서 느낄 수 있는 입체감과 깊이가 보일 때까지 물감을 마르고 문지르는 진부한 기술로 가장 정통적인 화면을 창조해 낸다.
오랜 시간이 걸려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되는 손 떨림으로 인한 무수한 작품에 그어진 짧은 선들, 그 선들이 모여 합창이 이루어지고 이어져 긴 선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마침내 <달빛>도 되고 <열애>도 된다.

권이나 작품속의 최소한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인물들 때로는 격렬한 화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정지되어 있어 죽은듯한 이 슬픔의 볼레로, 그림이 진지한 중독의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이유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