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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 황금색의 찬란한 그림, 최고의 그림 값

김종근

<색채, 그 화려한 역사>에서 만리오 부르사틴은 “색채란 자연에서 비롯된 추상작용의 반영이며 ,자연적인 것속의 인위적인 것 , 다시 말해 형상이다.”라고 했다.
즉 색채는 화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불꽃처럼 사라져간 열정의 화가 반 고흐는“ 색채는 물체의 실재가 아니고 생명도 아니고 자연의 법칙 또한 아니다. 이 세상에는 기본색인 빨강 노랑 파랑만이 존재 한다”고 했다. 노랑은 보통 태양의 색이라 부른다. 어둠에서 벗어나 하루가 시작되는 최초의 빛깔이라고도 한다. 노랑은 예술과 철학의 색이며 미래의 희망과 총명함을 암시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장 이상적인 색채는 노랑을 바탕으로 한 황금색이다. 황금색의 의상은 호화로움과 권세를 상징한다. 금색 의상이나 금색 액세서리는 대개 여성의 피부에 찬란한 윤기를 더해 줌으로서 최고의 아름다운 인상을 만들어낸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덮고 있는 황금색이 그러하다. 그는 황금색의 찬란함으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냄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매혹은 상징주의와 아르누보를 교묘하고 멋지게 황금색과 결합 시키는 것으로 출발했고 그리하여 클림트만의 장식적 문양과 그의 기교에 사람들은 열광하는 것이었다.
1907년 드디어 클림트는 황금색 옷을 걸치고 아름다운 여인과 포옹하는 황홀한 포즈, 카페의 벽에 걸릴 1순위의 행복한 그림 <키스>를 탄생 시켰다.
그러나 정작 이를 그린 그는 너무나 불행하고 외로웠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이 없었다”. 고 할 정도로 가난했고 일찍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그의 인생은 충격과 두려움 그 자체였으며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나 사랑이 풍부한 남자였다. 무려 수십 명의 여인이 그의 품을 거쳐 갔고 심지어 그가 죽었을 때 14명의 사생아 어머니가 대신 유산상속을 청구할 정도였다 그림에 모델이 되었던 여성과는 정사를 나눈다는 소문이 난무할 만큼 여성편력이 탁월했던 그는 ‘빈의 카사노바’로 불렸다. 그는 오로지 여인들만이 관심 있어 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 없다.
자화상이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내가 그릴 줄 알고, 데생도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만 내게 확실한 것은 나의 자화상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 작품의 대상’으로서의 나 자신에게는 흥미가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게 관심이 있으며, 색다른 자연 현상에 더 큰 흥미를 느낀다..... 인간의 형상과 풍경, 그리고 이따금씩 초상화들을. 만일 누군가가 화가로서의 나에게 무언가를 알고자 한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를 ! 그리고 그 안에서 다른 사람과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기를!” 주장 했다.

그러나 이 <키스>속의 모델은 클림트 자신과 빈 실업가의 아내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로 추정된다. 두 남녀를 둘러싼 황금색의 배경과 금색의 나뭇잎 줄기, 화사한 꽃밭에 무릎을 꿇은 아름다운 여인, 남자의 옷에 그려진 패턴화 된 기하학적 사각형 무늬, 여인의 옷에 수놓은 꽃처럼 화려한 횡금색이 절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자인 에곤 쉴레 역시 똑같은 그림을 본 떠 ‘추기경과 수녀’를 제작할 만큼 포옹 장면은 모든 예술가들에게는 매혹적인 테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로 쓰인 황금빛의 중심적인 색채는 실제 그가 동양미술에 대한 컬렉터로서 황금색의 비잔틴적 요소와 일본 기모노 디자인의 영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프레데릭 마리아 비어>의 초상화에서는 그가 동양 정원에 깊은 흥미가 있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데 그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도자기에 심취 하였다.

<키스> 에서 보면 겹겹이 금을 중첩 시킨 것은 일본 시라쿠의 판화배경과 유사하며, 금은의 사용도 이 판화들에서 비롯되었으며 구성이나 주제도 에도시대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당시 자포니즘(japonism)은 고흐와 모네,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클림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화사하고 고혹적인 여인들의 초상화는 ‘채색된 슈베르트의 선율’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 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는 육체적 욕망이 강렬하고 노골적이며 병적이며 관능적이라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작품 유디트는 그 특성이 더 두드러지다. 화려함을 지배하는 다양하고 장식적인 무늬를 배경으로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 어슴푸레 감기거나 조금 열린 눈과 그 눈동자는 유디트의 미모와 꾐에 속은 홀로페르네스가 “ 이 여자처럼 외모가 아름답고 말재주가 훌륭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 정도로 요염하고 섹시하다. 오른쪽 젖가슴은 다 드러내놓고 , 왼쪽 젖가슴은 언 듯 비치는 옷 사이로 에로틱과 요염의 극치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미래가 그려져 있다” 라고 쓰인 황금색의 그림에는 모든 구성이 비대칭으로 이루어져 이 여인의 강한 인상이 음탕하다고 부를 정도이다.
그리하여 에로틱하고 섹슈얼한 이 유디트 그림은 숭고미를 지닌 남자를 파멸시키는 요부의 대명사로 불려진다. 세기말의 퇴폐적인 기분이 충만하며 우수와 음탕. 황홀과 섬세. 무아경과 절망이 화면에 깔려 있다.

마침내 이 그림은 당시 비인 상류사회 귀부인들의 초상화를 위한 샘플이 되었으며 클림트의 황금빛 시대를 예고하는 작품이 되었다.
이 클림트의 황금색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구성과 장식성, 화려함과 고귀함 등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클림트가 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학교의 영향도 있지만,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가 높은 장식성을 추구하면서도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고 발산하는 창조적인 힘의 뿌리도 바로 여기에서 이다.
이러한 모든 창조적인 영감들은 클림트에 있어 일종의 구원 같은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플라토닉 러브와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에 영향을 끼친 미치 침머만, 에밀리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같은 당시 귀부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다.
그 가운데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애정을 주며 갈망 했던 사람이다. 물론 에밀리 플로게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정신적 사랑을 나눈 여자들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그의 그림 속을 거쳐 갔다. 그러나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그녀의 초상은 정숙해 보이며 에밀리 플로게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클림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나눈 여자였다. 클림트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안정을 찾았으며 뇌일혈 발작으로 쓰러 졌을 때 말한 첫마디가 <에밀리를 불러 달라>는 정도 이었다. 클림트가 진심으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는 증거이다.
56세 루마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클림트는 비엔나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60세까지는 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도 소용없이 2월 6일 숨을 거두었다. 병원의 영안실에서 그를 따르던 에곤 쉴레가 죽은 얼굴을 그렸다. 아틀리에에는 미완성으로 끝난 많은 작품이 남겨져 있었고 클림트 사후 그의 재산은 클림트 자매와 에밀리 플로게에게 나누어 졌다. 후에 플로게의 아파트에 화재가 나 클림트의 스케치북 50권이 타는 사건이 일어나 클림트 마지막 예술마저 사라져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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