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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론 / 자연의 소리

윤진섭

Ⅰ. 
김광우에게 있어서 자연은 영원한 화두다. 거기에 인간이 덧붙여진다. 그래서 40여 년간 지속돼 온 그의 작품의 명제는 일관되게 <자연+인간>이다. 작업의 초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에 그는 이 명제에 ‘우연’을 덧붙인 바 있다. <자연+인간+우연>이 <자연+인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1980년대 중반.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비로소 ‘우연’이란 단어를 작품의 명제에서 빼기 시작한다. 작품의 명제에서 ‘우연’을 제거했다고 하는 사실은, 관점이 크게 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인간>을 작품의 명제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볼 때 중력 혹은 힘에 의한 사물의 변형 양태(자연+인간+우연)에서 문명비판(자연+인간) 쪽으로 그의 시선이 선회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명제와 관련하여 작품의 특징을 간략히 서술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자연+인간+우연>의 시기는 사물에 가해지는 힘의 크기에 따라 변형된 사물의 표정을 조각의 형식을 빌어 서술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브론즈, 대리석, 나무, 화강석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을 지닌 단순한 추상적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중간부분이 꺾여 주름이 진 원통형이거나, 넓은 천을 빙빙 돌릴 때 나타나는 부풀린 매듭의 연속, 마치 샌드위치처럼 두 개의 현무암 덩어리에 방석을 브론즈로 떠서 끼워놓은 것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연’은 바로 이처럼 어떤 사물에 힘이 가해졌을 때 나타나는 표정에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물들, 가령 둥글고 긴 베개를 반으로 꺾었을 때 어떤 주름이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또한 부드러운 풀자루를 주무르다 정지한 상태의 표정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추상조각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작위성을 특징으로 하는 <자연+인간+우연> 연작에서 문명비판적인 시선의 <자연+인간> 연작으로 선회할 때, 김광우가 소재로 선택한 것은 인간과 기계였다. 특히 여성의 인체에서 장기를 제거하고 그 속을 기계의 부품으로 가득 채운 일련의 작품들은 이 주제에 썩 부합하는 것이다. 그는 ‘환치(depaysment)’ 기법을 사용하여 사물의 초현실적 풍경을 드러내는 작업에 주력했는데, 그것은 가령 오토바이에 커다란 날개를 부착한 것에서 잘 나타나듯이 낯익은 사물들을 서로 다른 맥락에 전치시킴으로써 낯선 광경을 연출하는 기법에 집약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연’이다. 과연 그는 자연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김광우에게 있어서 자연은 ‘모태’로서의 대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을 요리하고 ‘다루는(manipulate)’, 즉 ‘개입하는 자’로서의 주체적 의미를 지닌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이 끊임없이 자연을 정복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원근법은 인간이 근대적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 합리적 틀로서 거기에는 자연 정복자로서의 인간의 욕망이 깃들어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디드로나 달랑베르와 같은 백과전서파의 활동에서 잘 드러나듯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램프’로서의 기능을 하고자 하였다.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한 계몽주의자들의 혁명적 사고는 그러나 자연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끊임없이 상처를 입고 파헤쳐지는 불운의 연속이다. 신체의 연장(延長)으로서 기계의 발달은 자연의 훼손을 가속화했다. 과학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신비스런 힘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고자 하나 과학에 근거한 인간의 예측은 자연의 힘 앞에 언제나 무력할 뿐이다.

가공할 기계문명에 대한 김광우의 비판적 시선은 인간의 몸을 매개로 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기계문명의 주체인 인간의 몸에 그러한 문명의 산물인 기계의 부품을 집어넣음으로써 상황을 전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인간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행위는 자연의 이법에 대한 거역을 의미하며, 장기가 적출된 텅 빈 공간에 거꾸로 기계의 부품을 가득 채우는 행위는 자연에 대한 인간 정복의 참담한 결과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우연’이 작품의 명제에서 탈락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의 개입과 그럼으로써 찾아 온 자연의 훼손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기상학이 설명해 줄 때, 신화의 창조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천둥소리가 하늘이 노한 것이 아니라, 번개가 칠 때 주변에 있는 공기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팽창하며 내는 소리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과학적이긴 하지만 설화(이야기)의 창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1980년대 중반이후, 김광우의 작품 명제가 <자연+인간>으로 전환되면서 그의 시선이 문명비판 쪽으로 돌려지게 된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대립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친화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자신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자연을 들어 설명하기 보다는 반대로 기계문명과 인간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거꾸로 자연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오토바이를 소재로 한 <자연+인간> 연작은 이러한 그의 관점이 잘 드러난 매우 뛰어난 작품들이다. 부목(浮木)을 자르고 다듬어 기계 부품이나 낡은 생활용품과 결합하여 만든 이 연작은 재기에 넘치는 창의력의 소산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라기보다는 미적 대상에 적합한 이 연작에는 ‘우연’의 의미로서의 자연적 요소가 개입돼 있는데 부목이 바로 그것이다. 파도에 휩쓸려 바닷가에 도달한 부목을 우연히 습득하여 제작에 보탠 그것은 인체와 기계부품과의 결합을 통해 문명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던 시기의 작품들보다 훨씬 더 완곡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악기를 비롯하여 주방용품, 각종 생황용품 등 스텐 제품을 적재적소에 붙이고 이를 잘 다듬은 부목과 결합시킨 이 오토바이 연작은 나무라고 하는 자연의 산물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직설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완곡한 우회로를 택한 김광우의 문명관이 잘 드러난 수작(秀作)이다. 


Ⅱ. 
노을공원에 설치된 김광우의 <자연+인간(숨쉬는 땅)>(5.0mx10.0mx2.4m)은 고내후성 강철로 만든 직경 5미터의 둥근 통 안에 잔디밭을 일군 형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곡식 가루를 거를 때 사용하는 둥근 체 두 개를 마주 보게 땅에 묻은 것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작품은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강철판을 여러 장 용접하여 만든 통의 바깥 면에는 검붉은 녹이 슬어있어 재질감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그 안에 심은 잔디의 파란 색과 어울려 친 환경적인 작품의 의미를 강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최소한의 인공성(통)과 자연(잔디)과의 결합을 통해 흔히 야외 조각 작품이 범하기 쉬운 자연과의 부조화를 극복하고 그 규모에 있어서 웅장한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은 무엇보다 비스듬히 경사진 형태감이 주는 세련미에 있다. 땅에서 불쑥 솟은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가장 긴 쪽의 높이가 2.4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가까이에서는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다본다면 강철 통의 검붉은 색과 그 안에 담긴 잔디의 파란 색이 조화를 이루어 관람객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색다른 미적 경험을 제공해 준다. 거리와 주변 지형의 높이, 그리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국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원통 구조의 경사 각도에 따라 약간 비탈지게 형성된 통 안의 잔디밭은 작품이 놓인 공원의 잔디로 인해 시각적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철 통의 검붉은 색깔로 인해 끊어진 듯하지만 다시 그 너머로 이어지고 있다. 관람객이 서있는 위치와 보는 방향에 따라 작품이 다른 모습을 띠는 것은 야외조각공원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좁은 전시장과는 달리 넓은 평원 위에 펼쳐진 야외조각공원은 탁 트인 조망과 듬성듬성 놓여진 조각 작품들로 인해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며 예술품을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인 환경을 제공한다. 이번에 설치된 김광우의 <자연+인간(숨쉬는 땅)>이 대지예술적인 특징을 보이는 것 또한 이 작품이 지닌 친환경적인 성격에 기인한다. 거대한 규모의 기념비적인 성격을 띤 이 작품이 관람객에게 주는 친근한 느낌은 인공성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의 성격을 최대한 살린 아이디어에서 온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서로 마주 보며 영원한 사랑을 유지하라고 권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마주 본 두 개의 원통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친밀감을 더욱 북돋우는 요인은 형태에서 오는데, 원통의 뒷면이 마주보고 있는 접촉면 보다 더 높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중심을 향해 몸체가 비스듬히 기운 자세를 취하게 된다. 형태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 자세는 수직으로 서 있는 것 보다 더 친근한 느낌을 준다. 서로의 어깨 죽지에 머리를 기댄 한 쌍의 비둘기가 머리를 곧추세우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비둘기들보다 더 친근해 보인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은가. 


Ⅲ. 
1992년에 김광우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일관되게 유지해 온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자연+인간> 연작)을 잠시 멈추고 다시 자연친화적인 작업에 몰입한 바 있다. <자연+인간+우연>이라는 명제를 붙인 이 작품은 길이가 40미터에 이르는 야외 설치작업이다. 길이나 굵기가 서로 다른 나무둥치에 나이프, 포크, 수저를 비롯한 식기류와 톱, 드라이버, 스패너, 가위와 같은 공구류를 조각하여 길게 펼쳐놓은 그것은 우선 스펙타클한 규모가 보여주는 장관이 관람객의 시선의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나무들의 행렬은 마치 수용소를 향해 걸어가는 병사들의 대열처럼 장중해 보이기까지 한다. 자신의 전 역량이 실린 이 기념비적인 작품을 통해 김광우는 비로소 화단에 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기에 이른다. 그것은 인류가 이룬 기계문명의 폐해에 대한 김광우의 비장한 선언과도 같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작품을 통해서 비판을 하는 길 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그로 하여금 그처럼 거대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든 동인이었으리라. 그가 나무로 만든 갖가지의 기물들은 자연목의 무리와 섞여 장대한 대열을 이룬다. 그것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세계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시선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달라지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 패기에 찬 열정에서 장년기의 의욕과 원숙함을 거쳐 노년기에 나타나기 마련인 관조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경사각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사물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예술관은 마치 농주가 발효돼 농익듯이 무르익는다.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는 어느덧 지혜로 바뀌며, 은근한 유머가 슬며시 발동한다. 김광우의 오토바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바로 이 부류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청을 돋워 기계문명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토바이의 부품을 부목으로 슬쩍 바꿔 끼우면서 자연이 소중함을 자연의 숨결로 보여준다.  자연의 소리를 자연스런 상태에서 들려줌으로써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 전략이야말로 어느덧 노경에 접어든 김광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그렇다면 노을 공원에 설치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이야말로 김광우가 들려주는 가장 지혜로운 ‘자연의 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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