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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 부정의 정신과 과정으로서의 조각

윤진섭

얼마 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HOMA)에서 열린 김영원 개인전(2012.06.01 - 2012.07.13)은 작가의 작품 활동 40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직 정년퇴임을 기리는 매우 뜻 깊은 자리였다. 김영원은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구상조각계의 중진으로 광화문 세종대왕상 제작의 경우에서 보듯이 탁월한 실력과 역량을 검증받은 바 있다. 그러나 김영원 조각세계의 본질적 성과는 기념조형물보다는 오히려 그가 그동안 추구해 온 일련의 궤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는 그만큼 그가 ‘문제 작가’이며, 아직도 실험을 그치지 않는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인전이 열린 현대미술관 입구에 설치한 대형 조각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김영원은 스케일은 물론이고 내용과 형식면에도 과감한 변신과 함께 작품제작에 대한 거침없는 투자를 통해 작업 후반기를 종착점이 아니라 하나의 과도기로 삼으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과도한 상업주의에 빠져 작가의 사회적 의무와 본질을 잃고 있는 듯한, 소위 ‘작가주의’의 실종이라는 조각계의 현실에 비쳐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구상조각가로서 김영원의 화단 내 위치는 매우 크며 그 영향력은 심대하고 할 수 있다. 

40여 년에 걸친 그의 조각세계를 총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었던 자리는 작년 11월에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생명과 명상의 조각/김영원’전이었다. 초기작에서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김영원의 40년 조각세계를 두루 살펴볼 수 있었던 이 전시는 그가 대형 작가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자리였다. ‘생명과 명상의 조각’이라는 표제어에서 알 수 있듯이, 대지적 사유에 기반을 둔 김영원의 조각은 ‘생명’에 그 화두를 두고 진행돼 왔다. 그의 작업에서 대지는 생명이 발아하는 바탕이며, 근본이다. 그의 조각에는 서구에서 발원한 현대문명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 담겨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그러한 주제의식이 최초로 제기된 것이 바로 1977년에 발표한 <중력 무중력>시리즈이다. 벌거숭이 인간군상으로 대변되는 이 연작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신의 인물상을 통해 현대의 인간이 처한 상황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 시대는 급속한 변화와 가치관의 혼란, 인간성의 훼손과 파괴, 소외와 불안 등 인간에 대한 부정적 요소가 독버섯처럼 퍼져있다. 끝없는 물질문명의 추구가 비인간화의 극점을 향해 치닫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삶의 감각적 총화가 예술이라면, 오늘날 예술의 모습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이 혼돈과 방황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오래도록 고민해 왔다.” 
                                                          - 김영원, 작업노트 중에서-

김영원이 술회하는 이 작업노트 속에서 나는 그의 예술에 대한 관점과 예지를 읽는다. 그는 미시적 관점보다는 거시적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는 40여 년에 걸친 세월동안 오로지 조각을 통해 나름대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와 문명, 그리고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구해 왔다. 그가 오늘날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가 바라본 세계에 대한 감각의 총화인 것이다. 그것은 곧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다. 조각가로서 40여 년의 세월을 활동하면서 느끼는 사고의 진행 과정 그 자체, 그것은 곧 문명의 진행과정이기도 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의 변천 과정이기도 하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문명의 대 전환과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화를 목격한 작가의 그러한 진술은 조각에서 형식의 변화는 물론 형태의 변화를 말해 주고 있다.

김영원의 근작들 중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림자의 그림자>시리즈이다. 그것은 아바타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명의 근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자아의 분신으로 대변되는 ‘아바타’, 그 개인주의의 극심한 몰입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놀이가 불러올 위험에 대해 완곡한 어법으로 비판하는 김영원의 작가적 시선은 곧 디지털 문명을 바라보는 한 관점인 것이다. 브론즈에 분홍색 채색을 한 <그림자의 그림자(꽃이 피다) 09-1>는 마치 한 송이의 꽃에서 꽃잎이 거듭 피어나듯이 한 인간의 복제품이 계속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디지털의 무한 복제에 대한 경고이면서, 유전 공학에 의해 장차 무한 증식될 인간 복제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아닐 수 없다. ‘그림자’란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는 실재에 대한 허상이며 동시에 재현의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서구의 현대문명에 대한 완곡한 은유적 비판인 것이다. 


김영원은 일찍부터 불교와 선(禪), 그리고 수련을 통한 기공 명상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그에게 소재나 주제 면에서 그의 조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공 명상의 수련 과정이기도 한 선(禪) 춤은 그대로 한 판의 퍼포먼스가 되기도 한다. 그는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선 춤을 추었고 그의 행위는 거대한 기둥에 그 흔적을 남겼다. 퍼포먼스이기도 하면서 결과물로서의 조각이기도 한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김영원의  대지 조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땅에서 조금씩 인체가 드러나는 모습을 시리즈로 만든 조각 작품들은 근본적으로 윤회적이다. 그것들은 개념적으로 윤회적 사이클을 보여준다. 마치 지형윤회처럼 되풀이 되는 만물의 순환체계를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 중 불교의 오체투지에서 소재를 구한 작품(<제3조각을 위하여>), <절하기-1, 1999> 등은 불교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 대작들이다. 그것들은 인체 조각을 한 후 이를 깨뜨린 다음 파편을 다시 결합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1980년 후반의 <중력 무중력>시리즈가 보여준 ‘부정의 정신’ 이후에 발표된 것들이다. 불교에서의 해탈이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과 같이 김영원은 해체와 부정의 방법을 통해 궁극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40여 년에 걸친 지난한 조각의 도정이 과정으로서의 예술인 것처럼 그는 수행을 통해 예술과 삶의 두 축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예술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축은 그의 자아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김영원의 인체조각은 때로 인체를 ‘탈(脫) 물질화’한다. 이른바 두께가 엷은 평면화한 인체들, 거기에는 인체가 지닌 부피감이 없고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그것을 과연 인체라고 할 수 있을까? 육탈(肉脫)된 인체들은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처럼 공허한 메아리만 전해줄 뿐이다. 이 현실감 없는 작품이 주는 소외효과는 그러나 강렬하게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바라보다 05-2>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수십 개의 흰색 조각품들이 늘어선 이 군집상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관객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설치 형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군집 작품 대부분이 관객의 해석에 의해 의존한다는 것은 김영원의 조각이 지닌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작품이든 관객의 반응을 낳는다는 점에서 상호작용적이다. 그러나 그 공감의 효과는 기존의 문법과 상투형이 돼 버린 기법으로는 약화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원의 조각의 관객의 비상한 반응을 얻는 이면에는 새로운 기법과 형식을 추구하는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이 존재한다. 그가 문제 작가이면서 실험작가이기도 한 까닭은 비록 그의 조각세계가 근본적으로는 구상성을 토대로 하면서도 구상조각의 상투형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조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 계간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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