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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석원 / 폭포처럼 유장한 ‘한국적인 미’의 세계에 대한 천착

윤진섭

Ⅰ. 
이번 개인전에 출품한 폭포 연작을 그리기 위해 사석원은 오랜 기간 전국에 산재한 산들을 찾아다녔다. 그 햇수가 무려 2년 이상이다. 그러니까 이번 개인전은 수없이 발품을 판 결과다. 다양한 형상의 폭포를 찾아 여러 각도와 위치에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본 폭포의 이미지를 떠올려 작업을 한 것이다. 거기에 흥이 없을 수 없다. 

풍류(風流)는 작가 사석원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미 전국의 유명한 막걸리집을 찾아 다양한 술과 안주를 맛보고, 그 체험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경력이 있는 그에게 이 풍류는 삶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미 오래 전에 전업작가의 힘들고 고된 길을 택한 그는 화실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문을 나서는 환희에 젖어 지낸다.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낙이란 여행과 술집 순례,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일이다. 늘 웃는 얼굴에 사람 좋아 보이는 그는 매사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하는데 이골이 나 있다. 아니 그것은 그의 천성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의 이러한 천성이 귀품있는 가계(家系)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그의 회상을 담은 글에는 양장점을 운영했던 어머니와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삼촌과 고모, 형제 등 대가족 중심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머니와 관련된 대목들이 눈에 띈다. 이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그의 작업에서 왜 여성성이 강하게 느껴지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거니와, 이 여성성이야말로 사석원 작품의 큰 의미인 것이다. 나는 사석원 작품의 큰 특징을 이루는 두꺼운 물감이 주는 물질감과 그로 인한 촉각성이 대지적이며 모성적, 우주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의미야말로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동양적 가치인 것이고 음(陰)의 세계인 것이다. 우주의 순환을 논한 주역의 세계관에 비쳐본다면 서양의 양(陽)에서 동양의 음(陰)으로의 전환, 서양의 남성적 시선에서 동양의 여성적 시선으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또한 서양의 이성중심적 시각에서 동양의 ‘몸’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석원의 그림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몸성’인 것이다. 그것은 두껍게 처바른 물감의 물질감에서 발현되고 있다. 

Ⅱ. 
사석원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가 쓰는 재료는 유성물감과 아크릴과 같은 서양식 재료이다. 이른바 동양과 서양의 융합이 일찍이 그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는 물론 재료의 사용에서 오는 형식적 특징에 불과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정서 또한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에는 ‘중심’이 분명하게 설정돼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민화의 세계이다. 조선시대에 이름 없는 서민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민화의 저 유치찬란한 세계에 사석원이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어렸을 적 어머니가 운영하던 양장점의 한 구석에서 그림에 몰두하곤 했다는데 그때 어린 아이의 눈에 깊이 각인된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이 오늘날 그의 그림의 근저를 이루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그것과 일곱 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는 작가의 회고 사이에는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다. 특히 유년시절부터 비롯된 광범위한 독서 체험은 그 자신 사고 표현의 중심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에게서 보이는 탁월한 문재(文才)는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말을 하지 못 했다는 진술은 그 반대급부에서 표현의 과잉과 만난다. 사석원의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저 분출하는 듯한 기(氣)의 용틀임은 억압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표출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날 것 그대로 생짜의 맛이다. 사석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이 생짜의 맛은 원색에서 온다. 오방색 중심의 민중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 미적 취미는 교양과 아취(雅趣)로 대변되는 사대부 중심의 선비문화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것은 문인화와 서예로 대변되는, 익히고 가공된 선비문화에 대한 저항적 발현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식자들의 이분법적 도식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 정작 민화의 생산자인 서민들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공간을 장식하고 싶은 순수한 욕구에서 붓을 들었고 소박하게 자신들이 보고 생각한 것을 표현했던 것이다. 민화의 범본이 산수화를 비롯하여 화조, 기명절지 등 사대부 그림이 되고 있는 사실은 이를 말해준다. 민화의 생산자들이 그림에 대한 아카데믹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날것’으로서의 민화가 지닌 힘과 매력의 원천이다. 사석원은 민화가 지닌 이 조야한 야생성에 주목한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호방한 필치, 원색의 사용, 붓의 힘찬 기세는 바로 이러한 민화적 야생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비단 민화의 형식적 특징뿐만 아니라 그것의 내면성이다. 민화는 서민들의 삶 자체에서 소재를 빌어 왔다는 점에서 아주 서민적인 미술의 장르이다. 예술과 생활의 일치를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실천해 온 분야가 바로 민화이다. 굳이 미술의 서양적 장르 개념에 빗대어 말하자면 ‘팝아트’에 해당할 터인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산업시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것은 발생의 기원 자체가 다르다. 이것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소위 근대가 시작되는 구한말 이후이다. 그 이후의 과정은 민화가 지닌 조야한 야생성이 퇴색하면서 세련된 도시적 혹은 교양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동양화가 등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사석원이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것과 이 세련된 도시적 혹은 교양적 감수성의 연마 사이에는 일종의 함수관계가 성립한다. 일찍이 사석원이 대학시절 미술교육을 통해 주입되고 함양된 이러한 예술적 전통에 도발을 꾀한 이면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통해 스스로 천착해 온 민화의 발견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화실에는 민화에 관련된 국내외 서적들이 많다. 민화 서적에 대한 그의 수집벽과 독서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일상생활은 서민적 애환이 깃든 대포집의 순례와 깊숙이 연루돼 있다. 그는 전국의 술집을 찾아 순례를 하고 이를 신문에 연재할 정도로 취미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맛깔 난 필치로 술집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사석원이 지닌 대중적 취미와 호방성은 곧바로 풍류와 연결돼 있으며, 그러한 정취가 발현된 장소가 다름 아닌 캔버스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풍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왜냐하면 자고로 ‘풍류’야말로 조선시대의 대표적 ‘유한계급(leisure class)’인 사대부들의 미적 취미의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볼 때 서민들의 문화적 형식인 민화와는 정 반대편에 서 있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점차 민주화하면서 풍류는 조선시대의 지배문화에서 변질돼 점차 개인화되었다. 오늘날 풍류는 개인적 취향에 다름 아니다. 술을 마시거나, 시를 짓거나, 명승지를 찾거나, 판소리를 듣던 조선시대의 여가 문화가 파편화되면서 현대에는 개인의 소일거리나 미적 취미의 차원으로 축소되었다. 사석원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풍류에 관심이 많다. 그것은 그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 흥에서 그의 그림들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그의 그림은 ‘흥’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즐겁고 서민적인 정취가 듬뿍 묻어나는 해학의 정서이다. 



Ⅲ.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사석원의 이번 개인전 소재는 폭포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장대하고 다양한 물줄기의 모습이 그림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석원이 이번 전시의 소재로 취하고 있는 폭포는 사실 조선시대 풍류문화의 중심을 이룬 장소였다. 거기에서 많은 음주가무와 판소리의 시연이 벌어졌으며 많은 화가나 선비들이 산수화의 소재로 폭포를 다뤘다. 사석원의 이번 폭포 연작은 이러한 사대부 중심의 풍류문화와 가장 서민적이랄 수 있는 민화가 함께 만난 자리이다. 어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서 있을 듯싶은 이 두 문화가 사석원의 기민한 상상력에 의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재적 차원의 만남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크다.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문화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이 바로 그의 폭포 그림인 것이다. 이 두 요소는 그의 그림 속에서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그래서 과연 어느 것이 선비문화이고 어느 것이 서민 문화의 소산인지 분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합치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이 두 이질적인 요소는 그의 그림에서 잘 체화된 다음 뒤섞이고 교호(交互)된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풍류문화의 상징인 폭포가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조선시대 민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 닭, 소, 호랑이, 토끼, 말, 독수리, 양, 부엉이, 물고기 등등은 전면에 나타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해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민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유치찬란하며 조야한 색깔 또한 이러한 해학적 분위기의 조성에 한몫을 하고 있다. 민화의 서민적 생명성과 약동성이 사석원에 의해 현대적으로 해석, 새롭게 조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직접 현장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석원은 금강산과 백두산을 비롯한 조선팔도의 명승지를 직접 탐방하고 이를 사진에 담았다. 그는 직접 촬영한 수많은 폭포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의 폭포 그림을 위한 바탕인 동시에 폭포 이미지의 출처가 되고 있다. 그는 폭포를 비롯한 주변 경관을 그리고 그 위에 동물이나 인물을 그려 넣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사석원 특유의 상상력이다. 그의 상상력은 유년시절에 어머니의 양장점 한 구석에 있던 책상 밑에서 그림을 그릴 때의 연장선에서 나온다. 그의 그림이 지닌 이러한 특성은 유치찬란할 정도로 조야한 원색적 색상과 함께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해학적 유머의 진원지이다. 

그와 함께 주목해야 할 특징은 물감의 두꺼운 질감이다. 이 물성적 특징은 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튜브에서 직접 짜서 처바르는 특유의 기법에서 연유한다. 사석원은 그림을 그릴 때 유화용 붓을 사용하지 않고 동양화 모필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붓의 뼈, 즉 골법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사혁이 말한 육법 가운에 골법용필(骨法用筆)은 그의 작품의 주된 회화적 특징을 이룬다. 그의 그림에서 이 골법은 호방한 필치의 강한 심지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유화용 붓으로는 이 맛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둥근 서양화 붓으로는 입체감을 잘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가 질긴 골법의 사용과 함께 두꺼운 물감의 물성적 특징 또한 사석원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튜브에서 갓 짜낸 물감은 심지어는 두께가 1센티미터 이상 될 정도로 두껍게 올라가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말에 의하면 겨울철에 두꺼운 이불을 덮는 것처럼 따뜻한 정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 사석원 특유의 생략기법이 가미되면서 화면은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띠게 되는 것이다. 

사석원에게 따라붙는 인기작가라는 호칭은 작가 자신에게 은근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 속에는 대중적이라는 함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실험도 허용될 수 없을 정도로 정형화된 세계를 견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살펴본 사석원은 실제 부단한 실험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회화 세계는 꾸준한 변화의 연속이다. 주제와 소재에서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가 오랜 기간 동안 시도돼 왔다. 이번 개인전 역시 이 연장선상에 서 있다. 한국적인 고유의 미적 특질, 즉 ‘우리다운 것’에 대한 천착이 유장한 폭포의 흐름처럼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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