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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고향으로서의 그림

윤진섭

필자가 어렸을 적, 초가집을 지을 때면 동네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서서 구경을 하곤 했다. 목수들은 아주 천천히 일을 했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는 여러 달이 걸렸다. 맨 먼저 하는 작업은 집 지을 터에 높다랗게 쌓인 흙을 커다란 바위로 단단하게 다지는 일이었다. 이 때는 마을 청년들 여럿이 “에헤라 뒤야, 콩볶은이 나간다.” 라는 사설을 읊으면서 굵은 동아줄로  단단하게 묶은 바위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집 주인이 나누어주는 볶은 콩을 얻어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의 골조가 완성되면 벽을 만드는 일만 남았는데, 인부들은 벌건 진흙에 잘게 썬 볏짚을 버무려 작은 호박만 하게 뭉친 다음, 격자형으로 묶은 수수깡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는 물 묻은 손으로 흙벽을 맨질맨질하게 다듬었다.  

하종현의 <접합> 연작을 볼 때마다 필자는 유년 시절에 본, 초가집 벽 만드는 광경을 떠올리곤 한다. 이 작품의 요체는 ‘배압법(背壓法)’ 이다. 이 명칭은 물감을 캔버스의 뒤에서 밀어 넣는다고 해서 필자가 붙인 것이다. 성긴 마대를 커다란 나무틀에 맨 다음 걸죽하게 갠 유성물감을 평평한 주걱으로 떠서 마대사이로 밀어 넣으면 반대편에서 볼 때 물감이 송골송 맺히게 된다. 하종현은 어느 때는 인위적인 흔적을 가하지 않고 비져나온 물감의 흔적  자체를 작품으로 삼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어떤 행위를 가했다. 그 행위란 어떤 사물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긁기나 긋기, 흘리기, 밀어내기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마치 어린이가 흙장난을 노는 것과도 같은 원초적 동작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느 글에선가 그의 이런 행위를 가리켜 저명한 문화사학자 호이징가가 문화의 요체로 파악한 ‘유희성’이 깃들어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유희 곧, 놀이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삶은 놀이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놀이가 없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공허할 것인가. 우리는 어린 시절에 터득한 공기놀이나 딱지치기부터 시작해서 살아가면서 좀더 복잡한 구조와 규칙을 지닌 각종 운동경기와 게임을 배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생활의 의미를 터득한다. 거기에는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등 각종 규범과 의무가 포함돼 있다. 어린이가 종이 위에 연필로 끄적거린 단순한 드로잉에는 ‘짓거리’로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가 담겨 있다. 그것을 그린 어린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다 복잡한 규칙을 배워가듯이, 이 ‘짓거리’는 복잡한 사회의 규범과 규칙에 대한 원초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또한 회화(繪畵)의 원초성이기도 하다.   

하종현의 <접합> 연작에서는 개펄에서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뻘밭에서 뒹굴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원초적 자유의 내음이 맡아진다. 그 자유는 ‘접촉’에서 온다. 접촉은 무엇과 무엇이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너와 만나고 너는 또 그 누군가와 만난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접촉을 매개하는 것이 다름 아닌 몸이다. 몸이 있기 때문에 접촉이 가능하다.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인 접촉은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동시에 평등을 지향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이 접촉의 본원적인 의미를 잊고 산다. 접촉의 야생적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이익과 탐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든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종현의 그림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거기에는 아무런 형상이 없기 때문에 일견 난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를 자극하는 어떤 향수 같은 게 느껴진다. 시골의 푸근한 토담 벽 같은 느낌, 우리가 나서 자란 황토에 대한 향수 등은 하종현의 작품에서 맡을 수 있는 친근한 정서들이다. 그의 그림은 우리를 잃어버린 고향으로 인도한다. 접촉의 의미를 상실한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찾아가고 싶은 근원적 고향 말이다. 

- 월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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