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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는 행위

윤진섭

한 여름, 장대 같은 소낙비가 지나간 후 저 멀리 우뚝 서있는 산을 바라보면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청산은 부끄러운 듯 운무 속에서 벗은 몸을 살포시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럴 때면 거기에는 영락없이 절이 있었다. 절은 크나 작으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산과 구름과 안개, 그리고 가끔씩 살랑이는 풍경 소리가 있으면 족했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대웅전의 기왓골, 그것은 어렸을 적 본 콩밭 이랑을 연상시켰다. 그럴 때면 스님의 염불 소리는 들려도 그만 안 들려도 그만이었다.   

박서보의 <묘법> 연작. 그 중에서도 검정에 가까운 짙은 회색조의 작품들은 산사(山寺)의 기왓골을 연상시킨다. 세로로 죽죽 그어진 선들. 백호, 이백호, 삼백호 혹은 오백호나 되는 커다란 작품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 꼭 우리의 전통 기와지붕을 닮았다. 그것은 크면 클수록 숭고한 느낌을 준다. 스님들이 입은 먹빛 옷을 연상시키는 회색은 수행을 상징하는 색이다. 모든 빛의 파장을 빨아들이는 검정색은 또한 모든 유채색을 섞었을 때 나타나는 색이기도 하다. 불교의 교리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과 오욕칠정의 감정을 삼킨 색이 바로 검정색인 것이다. 지금은 검정에서 벗어나 현란한 유채색을 다루고 있지만, 박서보 작품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검정에 가까운 회색조 연작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장중한 색인 검정은 흰색의 첨가율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톤의 회색을 낼 수 있는 색이다. 색의 함량에 따라 순백에서 순흑으로 혹은 순흑에서 순백으로의 이동이 가능한 <묘법>은 한국 단색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국 단색화의 요체가 행위의 반복을 통한 촉각성의 표출에 있다고 할 때, 박서보의 <묘법> 만큼 이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 여러 번 밑칠을 한 캔버스에 물에 불린 한지를 덧대 물감과 섞고 나무 꼬챙이로 긴 이랑을 만들어가는 이 고단한 작업은 마치 불가의 선(禪) 수행을 연상시킨다. 불자들이 삼천 배를 하듯 박서보는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그 기간이 무려 4십 년이다. 그의 작업이 서구 미니멀 회화 작가들의 것과 다른 점은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서구의 미니멀리스트들이 수학과 언어의 반복성에 착안, 격자의 무한 확장성에 기반을 둔 시각중심적인 자세를 견지한 반면, 그는 행위의 무(無)목적성을 주장한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의 행위는 ‘마음을 비우는’ 행위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의 근저에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수양한 뒤 사람을 다스린다.’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윤리관은 곧 조선조 5백년을 떠받쳐온 유교적 성리학의 근간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전통의 현대화를 말할 때 필자는 한국의 단색화만큼 성공적인 사례는 없다고 생각한다. 박서보의 작품이 지닌 고유의 미적 특질은 김환기를 비롯하여 정창섭, 정상화, 윤형근, 하종현, 권영우, 이우환, 윤명로, 최명영, 김기린과 같은 1세대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동양에서 서예나 문인화는 전통적으로 인격의 도야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이른바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은 고매한 정신의 표출과 관계가 깊다. 즉, 학문과 예도의 정진을 통한 정신성의 고양이 중시된 것이다.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정신이 살아 꿈틀대는 것이 바로 ‘단색화(Dansaekhwa)’ 이다. 1970년대 초반에 일단의 화가들에 의해 집단적 미감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그것은 전통이 현대성의 옷을 입고 동시대의 지평에 떠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지평에 부상된 최초의 미술사적 사건이자 독자적인 어법에 의한 하나의 풍경이었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의 기수로 출발한 박서보는 70년대 들어와 일련의 <묘법> 연작을 발표하면서 다시 문제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유백색의 캔버스 바탕에 빗살무늬 토기처럼 연필로 무수한 사선을 그었던 그는 40여 년이 흐른 현재 특유의 촉각성이 두드러진 단색의 회화 세계를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 월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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