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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길 / 감각의 유희

윤진섭

“원길: 그래요? 나도 젊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시간을 따르는 것이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와 합일되는 방법을 자연과의 작업을 통해서 배우고 싶어요. 자연미술은 자연을 단지 하나의 대상이나 재료로 다루지 않아요. 그리고 정의하거나 해석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연미술에 있어서 어느 한 쪽은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장악하거나, 두 가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머금듯 하나로 존재하면서도 각각의 특질을 훼손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전원길, John Grande와의 인터뷰 중에서  


Ⅰ.
 전원길이 캐나다의 미술평론가 존 그란데와 나눈 대담 중에서 발췌한 이 구절은 그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명확히 대변해 주고 있다. 이 말을 크게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인생이 시간의 축적인만큼 산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늙는 것조차 자연의 이법(理法)을 좇는다.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은 인간의 몸이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예술 역시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서 이법에 좇아 이루어져야하며, 미술은 마치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정복이나 정의, 혹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自) 그런 것(然)’이기 때문이다. 

 전원길은 대학 재학 중인 1980년대 초반에 ‘야투(野投)’ 그룹에 가담,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을 해 왔다. 그 시간이 물경 이십 년을 넘었다. 1960년생이니 오십대 초반의 나이치고는 경력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행위를 하고 자연과 더불어 지내며, 자연에서 작품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고, 자연에서 작품의 소재와 모티브를 찾는다. 말하자면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고 호흡을 하며 그 속에서 자연의 이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미술과 생활이 하나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예술적 실천’이자 ‘예술의 삶에의 투신’이기도 하다.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숲에서 전원적 삶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자연과 예술은 동전의 앞뒤와 같고 물을 머금은 스펀지와도 같다. 혼연일체인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야투 활동 시절에 전원길이 행한 일련의 퍼포먼스는 자연과 동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령, 바닷가에 서서 밀려오는 파도와 일치되는 선을 가슴에 그리는 행위라든가, 팔뚝정도 굵기의 나무줄기에 팔을 올려놓고 그 위에 매직으로 하나의 선을 긋는 행위, 붉은 고추 밑에 손바닥을 벌리고 그 안에 고추를 그리는 행위 등은 자연과 자신의 신체가 일체가 되길 희구하는 태도이다. 

 전원길의 초기 퍼포먼스에 나타난 이러한 자연관은 이후 그대로 전 작업에 고르게 스며들게 된다. 회화를 비롯하여 사진, 오브제, 설치,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하여 자연에서 발견한 삶의 진리와 자연의 법칙을 개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르와 매체를 막론하고 전원길의 작업에서 개념적 경향과 함께 진행 과정(process)이 두드러지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대학시절에 그가 받았던 모더니즘 미술 교육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와 동세대의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서구 모더니즘 미술에의 경도는 방법론은 물론이요 의식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야투’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해 온 전원길의 예술관은 서구 모더니즘의 핵심인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른바 시간의 선형적 흐름에 따른 진보(progress)에 대한 질문, 자연의 도구화, 기술문명의 폐해에 대한 고발 등이 자연에 대한 생태적 접근을 통해 매우 완곡하면서도 은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특징은 서구 근대성의 핵심으로 치부돼 온 ‘시각 중심적’인 것에 있지 않고 ‘촉각 중심적’인 데 있다. 퍼포먼스를 비롯하여 회화와 입체, 설치작업에서 전원길은 손을 비롯한 신체를 자연에 의탁하는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즉, 회화에서는 두꺼운 물감의 질감을 통해, 자연을 캔버스로 한 입체와 설치, 퍼포먼스에서는 몸의 ‘뛰어듦(企投)’를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전원길의 입장이 시각중심적인 서구의 근대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장악이 아니라, 자연에의 동화, 즉 자연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태도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Ⅱ. 
 전원길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통찰과 그 성과는 길이가 무려 7미터에 달하는 대작 <여름 나뭇잎>(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 칼라)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가로 30센티 세로 30센티의 정방형 패널 168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전체가 녹색조로 이루어져 있다. 패널의 바탕색은 각기 서로 다른 색의 기미를 띠고 있는데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들은 자연의 색이다. 그는 그렇게 조성된 바탕색 위에 실제의 나뭇잎을 전사하거나 오브제로 붙인 나뭇잎에 채색을 가해 화면위에 고착시킨다. 이 작업에서 질감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며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모습을 닮고 있다. 즉, 자연에 조작을 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전원길의 작품에서 그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장소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인위성에 대한 배제는 극심해진다. 특정한 장소에서 받게 되는 각별한 느낌, 거기에 어떤 나무들, 혹은 숲이 있고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있다. 그는 그러한 분위기에 주목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빛과 자연속의 물체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분위기의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주변에서 발견한 자연물을 통해 작업”을 하는 것이다. 사진으로 찍은 나뭇잎 연작은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이 사진 속의 사물들은 너무나도 비인위적이어서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면들이다. “이것들이 과연 작품이 될까?”하는 질문이 떠오르는 사진들, 그러나 그런 사진들이야말로 과거 30여 년간 ‘야투’의 회원들이 몰두해 온 예술이 아니던가. 자연에 대한 조작이나 인위성을 거부하는 행위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현대미술의 한 지류를 이루어 온 것이다.  



Ⅲ. 
 전원길의 <영원한 풍경>을 비롯하여 <하늘나무>, <꽃비>, <꽃> 연작은 연한 파스텔 톤의 바탕에 가는 선을 사용한 드로잉이 중심이 돼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원한 풍경> 연작은 상상 속의 천상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푸른 색 바탕에 구름을 연상시키는 희뿌연 물체와 그 주변에 늘어져 있는 흰 실선들, 그것들은 허공을 소요하는 신선 같기도 하고 밀림에 늘어선 나무줄기나 식물의 덩굴 같기도 하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나무처럼 ‘리좀’적 구조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섬세한 선으로 드로잉을 하는 전원길의 예민한 감성은 아마도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의 사물들과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 같다. 거기에는 길이 있고 그 길은 감각적인 붓질로 이루어진 색의 계조(gradation)로 이루어져 있다. 전원길이 그려내는 이 환상적인 풍경은 현실의 자연을 떠나 이상향의 세계를 그리는 작가의 내면적 풍경이리라. 실로 ‘감각의 유희’라고 부를 수 있는 전원길의 회화는 마치 자수를 연상시키는 도드라진 물감의 흔적처럼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 행위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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