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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풍향

윤진섭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2005년에 제1회 동북아비평포럼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내건 주제가 ‘비평의 위기:미술비평과 전시기획 사이’였다. 그로부터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계의 사정은 과연 어떠한가? 그 당시보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비평계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분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세미나를 기획할 당시만 해도 평론가는 전시기획자에 밀려 미술계에서의 입지가 매우 옹색한 사정에 처해 있었다. 미술잡지를 비롯한 언론은 편집회의에서 정한 전평을 평론가에게 의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니 평론가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좋은 전시를 선정하고 전평을 쓰는 것은 뒷전이고, 독자적인 매체가 없는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얼핏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비평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술잡지는 특히 경영이 열악한 상태에 있는 경우, 작가와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해서 오는 청탁이란 대개 비평의 대상으로는 탐탁치 않은 것들이다.


평론가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청탁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딱 부러지게 거절하자니 잡지사 측과의 인간관계나 여러 사정을 고려할 때 뒤가 켕기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렇게 거듭해서 거절한다면? 당연히 지면은 줄어들 게 뻔하고 그 결과 미술계에서 평론가로서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요즈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갑과 을의 관계가 비평계에도 관행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는 비단 평론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뿐만 아니라 비평계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정의 이면에는 미술계의 예민한 풍향계이자 때로는 방향타가 되길 자임한 비평계가 오랜 기간 타성에 매몰되면서 문제의 해결을 방치해 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업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미술잡지는 그렇다 치고 비평계의 유일한 단체인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그러한 타성을 타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가? 지령이 100호를 넘긴 ‘미술평단’이 있지만, 그것은 과연 한국 미술의 현장을 담아내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한때 협회의 살림을 맡아본 경험이 있는 나의 입장에서도 선뜻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이 없음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비평의 위기’가 논의될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항간에는 읽을 만한 비평글이 없다, 비평은 거간에 불과하다, 비평이 작가들과 야합을 한다와 같은 비평 불신의 목소리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전시 서문은 주례사에 불과할 뿐, 정작 작가의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다는 비판은 평론가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언사일 것이다. 이런 우울한 소리를 들으면서 문필(文筆) 일을 해야 하는 것이 평론가의 처지라면 그 일 자체에 대한 냉정한 자성과 비판이 응당 따라야 하는 것이 오늘날 비평계의 위치가 아닐까? 


이른바 자칭 평론가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쩌다 미술계의 밥을 오래 먹다보니 이런저런 경험과 인맥이 쌓이고, 글줄 깨나 쓴다고 남들이 그러니 슬그머니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어느 날 매스컴에 등장한다. 개중에는 심지어 화랑을 경영하는 사람마저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어떻게 해서 미술평론가라는 직업이 그렇게 만만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보다 기가 찰 일은 비평계마저 그런 사태를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일이다. 심어지는 메이저 언론사마저 이런 저런 인맥을 업은 함량 미달의 인사들에게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버젓이 달아 칼럼을 연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관행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그럭저럭 쌓이다보면 미래의 어느 날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이 비평계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소셜 네트워킹이 발달한 시대에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자칭 평론가들의 눈부신 활약은 실력과 진정성을 고루 갖춘 아날로그 평론가들의 느린 행보를 비웃듯 종횡무진으로 펼쳐지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또 다른 형태의 비평의 위기가 우리 옆에서 싹트고 있는 것이다.  


평협은 과연 이런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런 현상을 그저 당연한 세태로 치부하고 침묵해야 할 것인가? 벌써 오래 전에 미술잡지를 비롯한 언론사에 자의적으로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부여하는 일을 자제해 달라는 공문을 발송하는 문제를 검토한 적이 있었지만 유야무야되고 만 적이 있다. 그렇게 한들 과연 실효성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 당시 회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일단 평협의 이름으로 언론사에 공문을 발송하여 명칭 사용에 대한 자제를 요청하는 안을 검토해 볼 일이다. 특히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이 지닌 전문성의 문제를 거론하여 비전문가가 미술평론가의 이름으로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일만은 막았으면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정의 노력을 한다면 비평계의 흐려진 물은 조만간 눈에 띄게 정화될 것으로 믿는다. 


‘비평의 위기’를 주제로 설정하면서 당시 염두에 뒀던 것은 평론가와 전시기획자와의 관계였다. 이는 특히 전시기획자의 담론 생산 기능이 일정 부분 평론가의 고유 기능과 일치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전시기획자는 단순히 전시기획만을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의 해설이나 전시기획의 변을 통해 비평적 시선의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럼으로써 어느 면에서는 평론가의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문화적 조건을 염두에 둘 때 전시기획자(큐레이터)와 평론가의 구분이란 단지 명칭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명제의 성립도 가능하다. 비평의 어원인 ‘krinein’이란 말 속에는 ‘구분하다’란 뜻이 함유돼 있고, 궁극적으로 가치 판단의 문제를 다루는 이 행위 속에는 작품을 선별하는 큐레이터의 시선이나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여 기술하고 평가하는 평론가의 시선이 겹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역의 구분만은 명확하다. 주지하듯이 전시기획자(큐레이터)는 전시기획을 주 업무로 하고 평론가는 전시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양분된 영역이 고착되면 될수록 둘 사이의 제휴는 어려워진다. 나는 당시 세미나에 발제한 글을 통해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나는 이 양자 사이에 소통이 원활치 못한 점을 지적하여 “비평과 전시기획이 분리되고 상호 소통이 없는 데서 같은 문화생산자로서의 동지 의식이 서서히 엷어져 가고 있다. 이를 가리켜 단지 시대적 상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비평적 위기의 심연이 너무 깊다”고 지적하였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나는 그 당시 세미나의 발제문인 ‘비평의 위기’에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오늘의 입장에서도 음미해 볼만 하다고 여겨져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비평가와 전시기획자는 일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여기서 누가 형이냐 아우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전시기획을 하지 않는 비평가는 생각할 수 있으나, 비평 행위를 하지 않는 전시기획자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점이 다르다. 전시기획자는 업무상 도록이나 홍보, 혹은 보도 자료에 쓸 글을 쓰면서 늘 비평적 행위를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드시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판단하고 비평하기는 매일반이다. 미술사적 의미를 지닌 보다 큰 규모의 전시일 경우, 서문격으로 쓰는 전시기획자의 글은 흔히 전문적인 비평적 글쓰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때로는 각주가 줄줄이 달린 학술 논문의 형태를 띠기도 하나, 그것이 법조문이 아닌 이상 어딘가에는 필자의 비평적 시선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비평가가 판단하고, 평가하고, 기술하는 것처럼 전시기획자도 유사한 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평가와 전시기획자의 비평적 행위를 어떻게 구분하고, 분리할 수 있단 말인가?    


<미술평단,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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