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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풍경을 찾아서

윤진섭

아시아의 풍경을 찾아서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호남대 교수)



“비평은 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 사유와 존재 사이의 거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다.”

가라타니 고진  


   최근 아시아에 대한 논의가 국제적으로 분분합니다. 중국의 약진과 일본의 집단 자위권 발동을 위한 헌법 개정, 북한의 핵무장 등 작금 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 아세안(ASEAN)의 지지는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 등이 난무합니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경제적 위상은 현재 북미와 유럽에 이어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수치상으로 나타난 결과일 뿐이고 실제적으로는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삼분지 이를 차지하는 아시아의 인구는 아시아의 경제 부흥을 촉진하는 주요인입니다. 풍부한 자원과 인구, 높은 노동력의 확보, 폭 넓은 시장의 잠재적 가능성은 세계의 시장에서 아시아의 경제적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IT 강국의 면모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아시아의 높은 위상은 미술 부문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현재도 많은 제도들이 속속 설립 중에 있습니다. 각종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 페어, 옥션, 문화재단 등등이 설립돼 후발주자로서 아시아의 면모를 일신하는 중에 있습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창설을 계기로 아시아에서 많은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가 출범하였습니다. 타이페이 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북경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싱가포르비엔날레, 요코하마트리엔날레, 오사카트리엔날레 등등은 아시아의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중요한 포석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의 KIAF를 비롯하여 홍콩아트페어, 싱가포르아트페어, 샹하이아트페어 등 각종 아트페어의 번성은 세계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아시아 미술시장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미술의 발전은 미술시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곧 아트페어나 옥션과 같은 미술시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작가로서 개인은 생존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서구 근대미술의 역사가 자본주의 역사와 동일한 궤적을 그리면서 전개돼 온 과정을 생각할 때 쉽게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서구의 경제 발전 과정을 학습한 아시아 제국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고 세계 경제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미술의 경우, 후발주자로서 출발한 아시아는 서구 중심의 판도에서 고지의 확보를 위해 악전고투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망은 매우 불투명합니다.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카셀 도큐멘타와 같은 세계 유수의 미술잔치에 아시아인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아직도 백인중심주의에 빠진 서구의 오만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시아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난망합니다만, 그들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오리엔탈리즘’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인식과 사유를 기반으로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을 맡아 일하던 지난 2005년에 아시아비평포럼을 창설하였습니다. 제1회 행사명은 ‘동북아비평포럼’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생각은 동북아시아 즉, 한국, 중국, 일본의 비평 관계자들만이라도 우선 한 자리에 모여 비평의 현안에 대한 근본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설정한 주제가 ‘미술비평과 전시기획 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제의 설정 배경에는 큐레이팅이 강세를 보이는 작금의 현실이 놓여있습니다.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지난 60년대 이후 전시기획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국립현대미술관(1969-  )이 설립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전시기획이란 개념조차 형성되지 못 하던 때였습니다. 그저 작가들이 필요에 의해 그룹을 만들어 주로 대관화랑에서 전시를 치를 때의 일입니다. 1967년, 본격적인 의미에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물론 그 효시는 1956년 동방문화회관 화랑에서 열린 [4인전]입니다만)의 집단적 포문을 연 [청년작가연립전] 이후, 작가 주도의 전시기획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화단에서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앙데팡당전]을 비롯하여 [대구현대미술제], [서울현대미술제], [에꼴드서울] 등 미협 중심의 대규모 행사들이 전시기획 전문가의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주로 덕수궁에 소재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A.G>, <S.T>, <신체제>, <회화68> 등등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미술단체의 회원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대관화랑을 빌려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전시기획 체제가 미술평론가를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은 광주비엔날레가 창설된 1990년대 중반 무렵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평가 겸 전시기획자들이 활발한 활동을 보인 시기는 90년대 중반 이후의 몇 년 간이다. [광주비엔날레](1995)를 비롯하여 [부산비엔날레](1998), [미디어_시티 서울](2000)과 같은 대형 국제전이 경쟁적으로 열리면서 국내의 기획전문가들에 대한 수요가 증대했다. 이제 비평가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현재 미술현장에서 활발하게 전시기획을 하는 전시기획 전문의 큐레이터들은 이 무렵엔 학창생활의 낭만에 젖어있거나, 유학을 하거나, 아니면 직장을 잡기위해 갤러리를 기웃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미술이론 전공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이후 전시기획자들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사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들은 신속하게 화랑이나 미술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보의 빠른 유포와 다양한 담론의 생산이 비평가보다는 전시기획자들로부터 비롯된다. 전시기획자는 전시장이라는 미술현장에 보다 밀착돼 있기 때문에 생산된 담론을 직접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많은 편이다. 작가가 비평가보다 전시기획자와의 접촉을 더욱 선호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전시기획자가 지닌 현장성의 매력에, 또는 거기에서 비롯되는 문화적 파워에 있다고 여겨진다. 비평이 서재에서 고독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전시기획은 보다 액티브하면서 동시에 피드백이 빨리, 그리고 훨씬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졸고, <비평의 위기>, 동북아비평포럼자료집, 2005-


   미술비평의 위기적 징후를 진단한 이 글의 말미에 저는 “(그러나) 비평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생명력이 길다. 비평가는 특유의 직관적 촉수로 시대에 대해 말걸기를 계속한다. 그것은 고독한 행군과도 같다. 패트런이 없어도 묵묵히 가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비평가의 숙명인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당시의 심정은 동구 밖에 우두커니 서서 우울한 낙조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자본이 지닌 무소불위의 힘은 미술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넘어서 미술의 제도를 공략하고 있습니다.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비평계, 미술저널, 문화재단, 컬렉션 등 미술계의 각종 제도들(institution)은 자본의 횡포로 말미암아 거간을 일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평은 자본이 지닌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평의 통제에서 풀려난 미술계의 기민한 시스템은 ‘스타 작가’의 양성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비평가의 직무유기가 한몫을 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제 거대 담론의 생산을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자리를 큐레이터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큐레이터들은 직업상 비평에 준하는 담론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작가들을 ‘컨트롤’합니다. 세계의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전시를 협업하거나 교류하고, 작가를 수출합니다. 세계 유수의 비엔날레는 미술 담론의 발신기지라기보다는 스타작가의 양성소에 가깝고 미술시장의 전진기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비엔날레에서 누가 떴더라 하는 소문이 들리면 자본은 그 특유의 순발력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합니다. 불가사리가 쇠(金)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돈(金)’은 이제 현대의 정신적 가치를 재는 금과옥조가 되었습니다. 큐레이터가 돈 많은 부잣집의 머슴 되기를 자청하는 시대에 비평가는 폴 발레리의 잘 알려진 표현을 빌면 ‘쇠꼬리에 붙은 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상실한 비평가는 이제 더 이상 비평가가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을 포함하여 비평가 여러분에게 비평의 본연적 자세를 되돌아 볼 것을 이 자리를 빌어 정중하게 제안합니다. 


   이듬해에 열린 포럼의 명칭은 <아시아비평포럼>이었습니다. 저는 <아시아비평포럼 2006 : PARADIGM 전환기에 있어서 미술관 경영의 과제와 전망>이란 주제로 경기도 미술관 세미나실에서 행사를 치렀습니다. 이 자리에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비롯하여 이준 삼성미술관 Leeum 부관장, 하계훈 단국대 교수, 마리텐 베르퇴 스테데릭 현대미술관 부관장, 스시마 K. 발 인도트리엔날레 감독, 토시오 시미즈  가쿠슈인 여자대학 교수 등등 약 20여 명에 이르는 국내외 미술비평 및 전시기획 전문가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글로벌리즘’을 화두로 현대의 미술관과 아트 이벤트는 과연 본연의 기능을 하며 정도를 걷고 있는가 하는 점을 광범위하게 살펴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의 사정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제와 맞물려 민감한 사안들이 산재한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현안들에 대한 여러분의 기억을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 제가 발표한 기조문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에 따른 문화지형도가 급격히 변모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국내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최근에 불거진 국립현대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제의 실시를 대표적인 예로 들겠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령 일본의 미술관 독립법인화, 미국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업경영 방식의 적극적인 도입과 함께 미술관 경영에 닥친 새로운 바람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정부의 지원으로부터 독립된 이후에 닥칠 국공립미술관의 구체적인 생존전략에 따른 대응 방안이 절실히 요청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부의 지원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미술관에 불어 닥칠 새로운 바람은 여러 후유증과 함께 새로운 제도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활로 모색과 대안을 낳을 전망입니다. 즉 기존의 박물관 및 미술관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현실적인 조정을 비롯하여 큐레이터의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 기금 조성의 문제, 주변 문화기관과의 협업 시스템 강구의 문제,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아시아 지역 미술관들 간의 네트워킹 문제, 아시아 지역 미술관들 사이의 공동 큐레이팅 시스템의 개발 및 이에 따른 아시아 담론의 공동 개발 등등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과제들입니다.”  졸고, <인사말>, 제2회 아시아비평포럼, 2006 


   이어서 저는 블록버스터 급 국제 아트 이벤트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거대 자본에 의한 문화 이벤트 회사의 설립과 이에 따른 미술관의 점진적인 침투, 그로 인해 빚어지게 될 미술관의 점진적인 붕괴 현상이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음”을 함께 고민하고자 했습니다. 

   이제는 사정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습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의 국공립미술관 대다수가 비전문인 관장들로 채워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시의회의 감사에서 미술관의 관객 수를 해당 년도 미술관 성공 여부의 주요 지표로 삼던 비합리적인 수준에서 블록버스터 전시를 유치하는 일이 관행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포럼이 상황을 호전시키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문제의 제기는 시기적절하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아시아비평포럼>은 상당한 기간을 건너뛰고 이제 3회째를 맞이합니다. 저는 이 포럼이 아시아 미술비평에 대해 의견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제는 독립법인화로 이름을 바꿔 다시 논의의 선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근현대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새로 개관한 서울관과 앞으로 열 청주관 등을 포함, 공룡처럼 몸집이 더욱 커졌습니다. 토론 시간을 통해 국립현대미술관의 독립법인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기 바랍니다. 

   아시아는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ASEAN(동남아국가연합),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네팔, 티베트 등의 서아시아, 그리고 멀게는 중동을 포함하는 거대한 땅입니다. 석유를 비롯한 자원이 풍부하고 고유의 전통과 민속이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불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이 혼재하는 다양한 종교의 혼합체입니다. 대륙문화와 해양문화를 기반으로 국가마다 특색 있는 문화가 형성된 아시아는 현재 전통과 모던 라이프가 오랜 기간에 걸쳐 혼효(混淆)돼 동양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뭉뚱그려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양과는 매우 다른 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향취와 삶의 표정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시아성(性)’이니 ‘아시아적 가치’, 혹은 ‘아시아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 서구와의 관계를 염두에 둡니다만, 이러한 관점이 자칫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아시아를 동일한 정신적 신념과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이는 민족 개념을 상상의 공동체로 파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관점처럼 하나의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지하듯이 모든 아시아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아시아적 가치’나 ‘아시아성’, 혹은 ‘아시아의 정신’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아시아는 마치 무지개가 방출하는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처럼 분광(分光)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는 수많은 ‘차이들’이 존재합니다. 상이한 역사와 전통, 종교, 민족, 인종을 지닌 아시아 제국은 그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적 스펙트럼으로부터 다채로운 예술이 파생됩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이후 서양의 모더니티가 동양인의 삶 속으로 흡수되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동양인의 세계관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근대적 삶의 양식(樣式)은 식민화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동양인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상흔(trauma)을 남겨놓았습니다. 탈식민주의는 오랜 식민지의 사슬에서 벗어난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양심을 지닌 서구의 학자들이 반성적 차원에서 내놓은 담론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가공해 낸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양의 입장에서 ‘타자(other)’로 분류된 동양은 동양의 입장에서 볼 때는 ‘주체’입니다. 자아(ego) 중심의 편견은 ‘타자’를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시선이 머무는 곳, 즉 정복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원근법의 일점소실은 앞을 향해 전진하는 발전지향적인 진보에 대한 신념을 상징합니다. 서구의 시각중심적인 장악력은 서세동점이란 결과를 낳았습니다만, 그 반대급부로서 동양의 촉각중심적 사유 방식은 자연존중의 사상을 낳았습니다. 어느 것이 보다 낳은 가치인지는 먼 훗날 역사가 말해주겠습니다만, 이 자리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자리라기보다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논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아시아의 현대미술(Contemporary Asian Art)’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동시대’로 번역되는 ‘contemporary’란 형용사는 어감 상으로 볼 때 국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며 전지구촌을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한 차원을 표방합니다. 그것은 고대(antique)와 근대(modern)와 같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같은 시대의 각 지역이라는, 공간상으로 편재된 방위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 개념인 현대성(contemporaneity)은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상이한 역사와 전통, 종교, 인종, 민족, 지리적 조건, 기후, 풍토 등등이 녹아있는 의미의 담지체로서의 두 문화권을 공히 포괄합니다. 현대성 앞에 동양과 서양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문화와 예술의 우열을 논하지 말고 인류 보편적 시각에서 살아갈 것을 권유합니다. 

   그러한 전환기적 삶을 앞두고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거시적 관점입니다. 이제 과감한 문화의 평탄작업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서구추종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을 찾고 명명하는 작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의 단색화를 ‘Korean Monochrome Painting’아닌, ‘Dansaekhwa’라 칭하는 작업을 무려 15년에 걸쳐 해 왔습니다만, 이제 그 결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서구의 큐레이터들과 이론가, 미술평론가들이 이 동향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고유의 용어(terminology)를 고안하고 정착시키는 일은 힘들지만 매우 보람있는 일입니다. 재미(在美) 소설가인 김은국의 소설 제목 중에 ‘빼앗긴 이름을 찾아서’란 것이 있는데, 비록 빼앗긴 것은 아니지만 자국 미술의 어떤 사조에 스스로 이름을 찾아 부여하는 일은 매우 주체적인 행위의 발로입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쓴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면 ‘풍경의 발견’을 찾아나서는 일에 비유됩니다. 그는 “‘풍경의 발견’은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선적인 역사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왜곡되고 전도된 시간성 위에 존재한다. 이미 풍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 왜곡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시아의 대다수 나라들은 식민화의 경험이 있습니다. 힘이 센 서양의 제국에 나라를 침탈당하고 자국의 언어 사용이 제한되며, 사회의 여러 부면에서 차별당한 데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상흔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이 아픔이 채 치유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사안에 부딪치면 상처가 도지곤 합니다.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편 중의 하나는 ‘우리의 풍경’을 찾아나서는 길일 것입니다. 아시아의 각 나라에서 고유의 풍경을 찾아나갈 때 아시아의 풍경은 다채로운 색채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비평포럼2013> 기조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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