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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열 / 낯선 숲

윤진섭

낯선 숲



사회에 대한 자연의 유비 사진작가 권오열이 매사 깔끔하고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그의 첫 개인전이기도 한 더 뉴게이트 이스트 갤러리 개관기념전의 서문을 쓴 지인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고(故) 하동철 교수와 권여현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확하고도 치밀한 성격을 지적하고 있는데, 나 역시 이 같은 그들의 지적에 동의한다. 특히 권여현 교수는 '철저한 객관, 냉정한 미니멀리스트'라는 표제 하에 권오열의 인간성과 작가정신을 논하고 있어 주목된다. 권 교수는 '차가우리만큼 담담한 자세로 자기의 의지와 감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있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철저한 객관적 미니멀리스트'로 권오열의 작가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최근에 사진계에 열풍처럼 번지고 있는 소위 연출 사진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권오열은 냉엄한 객관적 시각으로 자연을 다룬다. 자연 중에서도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식물, 꽃, 숲, 나무 등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의 사진에서는 어떤 기술적 트릭이나 조작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찍은 사진의 균질적인(all-over) 화면에는 마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회화처럼 전체적으로는 균질적이나 일루전을 암시하는 공간들이 산재해 있다. 자연이 만든 구멍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움푹 파인 공간은 권오열 사진을 매우 다채롭게 만드는 바리에이션의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자연 대상을 지각할 때 가령 그것이 숲이면 숲 전체를 한꺼번에 인식하지 못하는 지각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반면, 카메라는 대상 전체를 기계적인 눈을 통해 재현하는데, 권오열의 사진 작업은 이 부류에 속한다. 일찍이 프랭크 스텔라는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이를 권오열의 작업에 적용하자면 '사진기가 보는 것이 곧 사진기가 보는 것이다.(What camera see is what camera see.)'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사진기가 제 스스로 걸어가서 대상을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기에는 어느 정도 작가의 주관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상(피사체)의 선정에서 촬영의 범위, 거리의 설정 등등 사진 촬영에 필요한 제반 여건은 작가 스스로가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것은 프랭크 스텔라가 기존의 회화에서 제반 의미소(意味素), 즉 이미지를 완전히 소거하고 줄무늬 자체에 착안한 것과 비견된다. 프랭크 스텔라가 변형 캔버스의 외곽 형태에 병행하는 줄무늬를 그 안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행위는 곧 그 당대 회화의 논리이자 회화적 조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권오열은 사진에서의 내적 질서를 매우 중시하는 작가다. 그가 한 장의 사진을 찍기까지에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따라붙는다. 우선 날씨가 흐려야 한다. 그가 맑고 화창한 날을 피하는 이유는 피사체에서 보이는 반사광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는 은은한 화면 효과를 선호한다. 그렇기 때문에 빛에 의해 산란하게 보이는 화면은 그가 찾고자 하는 화면 전체의 은은한 계조(gradation)의 생성에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다. 화면 전체가 보여주는 은은한 효과는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내적 질서를 위해 필수적이다. 두 번째 조건은 바람이 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피사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만일 바람이 부는 상태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아무리 미세한 바람일지라도 피사체를 흔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프린트에서는 미세한 흔들림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권오열은 미세한 흔들림마저 불안의 징조로 여기는 묘한 습성이 있다. 그는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젖혀지는데 사진의 수많은 잎사귀 중에서 단 하나라도 젖혀진 것을 발견하면 그는 실패작으로 간주할 만큼 철저하게 완벽을 꾀한다.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일년 중에서 촬영에 임하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권오열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미적 요소는 질서와 조화다. 그가 사회를 조화롭고 질서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면에는 자연이 지닌 이 질서와 조화가 사회의 윤리적 측면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지나치게 튀면 사회의 질서에 금이 가는 것처럼 권오열의 사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상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가 자체의 질서를 통해 조화와 상생을 이루는 것처럼 권요열의 화면은 은은한 계조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보여준다. 이때 질서가 깨진다는 것은 곧 불안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연은 사회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유비일 것이며, 권오열의 사진은 자연을 통해 사회에 대해 말하는 일종의 유비물이 돼 준다. 




권오열이 취하는 대상은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아파트를 비롯하여 공원, 학교 등지에서 흔히 접하는 식물, 꽃, 숲, 나무 등등이 그가 즐겨 촬영하는 대상들이다. 열무, 느티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나무, 흰줄무늬사사, 벚나무, 벼, 댑싸리, 당귀, 메타새콰이어, 구상나무 등등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자연 대상이 그의 사진에 등장한다. 그는 대상의 위나 혹은 전면에서 이들을 촬영한다. 바람이 불지 않고 흐린 날을 택해 권오열은 촬영에 임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서술한 것과 같다. 그는 디지털 카메라로 이러한 대상들을 촬영하는데, 그 이유는 디지털 카메라가 가장 자연색에 가까운 색상을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필름 사진을 기피하는 이유다.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잡은 피사체는 출력된 권오열의 사진 화면에서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지닌 미세한 대상의 조합으로 태어난다. 비례의 신비를 담고 있는 자연물은 비례 법칙의 가시적 현현(顯現)으로 그의 사진을 통해 우리의 눈앞에 전개된다. 이 자연의 신비한 아름다움이 권오열의 독자적인 시각을 통해 비로소 표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식물의 각 단위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이 시각적 잔치는 다시 말하거니와 사회에 대한 하나의 준엄한 유비이다. 거기에는 사회를 작동하는 원리들이 은유적으로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조화와 상생, 질서와 화합, 순응과 통합 등 사회의 구성원리를 그의 작품을 통해 유추해 보는 것도 또한 유익한 일이 아니겠는가.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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