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정명 / 인류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박물지적 관심

윤진섭

인류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박물지적 관심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조각가 김정명과 나와의 인연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대백화점이 운영하던 현대미술관의 총괄관장으로 부임하여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현대미술의 쟁점시리즈’ 첫 번째 전시인 [창작과 인용]전에 그를 초대한 것이다. 이 전시회는 압구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구상미술의 재조명’ 시리즈와 함께 현대미술의 쟁점을 이루는 여러 사안들을 연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으로 있었는데 아쉽게도 단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혼성모방과 패러디의 문제를 집중 조명한 이 전시회는 다행히도 미술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전시관계자들을 적잖이 흥분시켰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이 전시회의 도록에는 김정명의 작품 이미지 세 점이 실려 있는데, 모두 다 제작 연대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방면의 선구적인 작품들이어서 보는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사랑했는가?>(캔버스에 유채, 90x72cm)와 <잠든 지오르지오네의 비너스>(캔버스에 유채, 114x100cm)가 1982년에 제작된 것이고, 입체작품인 <포켓 속의 작품들>(F.R.P에 아크릴, 100x56x27cm)은 이보다 다소 늦은 1989년에 제작된 작품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을 놓고 볼 때, 동서양의 고전 명화들이 작품에 인용되는 것이 하나의 유행으로 등장하는 때가 1990년대 초반 이후니까 김정명의 이러한 발상은 무척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김정명의 선구적 위치를 알려주는 작업의 또 한 예는 소위 ‘한국 팝(Korean Pop)’과 관련된 것이다. 작년 11월에 나는 [인사미술제]를 통해 ‘한국 팝’을 정리한 주제전을 기획한 바 있는데, ‘한국 팝’의 역사를 서술한 이 미술제의 도록에서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 서술하고 <창(娼) 75번지 2통 10반>(유리, 인쇄물, 15x15x38cm)의 사진을 실었다. 197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유리상자 속에 도발적인 포즈의 벗은 여자 사진을 찢어 넣은 것으로 이는 1980년대 초반에 제작된 그의 다른 작품 <캘린더> 시리즈와 함께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 두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명의 약 40여 년에 걸친 예술의 경로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시도 어느 한 지점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움을 추구해온 젊은 의식의 소유자이다. 나는 김정명의 이런 아방가르드적 작가주의 정신을 존중해 마지않는다. 그는 조형물 제작을 비롯한 여타의 잡다한 일들을 멀리하고 오직 창작에만 매진해 왔다. 그 결과는 세 권의 작품집에 고스란히 실려 있거니와, 수록된 작품들은 일련의 시리즈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의 작품세계가 초기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맥락을 이루며 전개돼 왔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일관성은 곧 김정명의 미술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예술에 대한 의식의 치열성은 1975년의 <스크랩> 시리즈를 필두로 70년대 중반의 <빨>,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프레임과 캔버스> 시리즈, 그리고 80년대 초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캘린더>, <손가락>, <공룡>, <혀>, <포켓>, <Yellow Line>, <말 풍선>, <큰 머리> 시리즈 등등을 추동시켜 온 원동력이다. 

 이 짧은 글로는 그의 방대한 작업을 모두 다룰 수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서술은 다음 기회로 미루거니와, 여기서는 우선 그의 <머리> 시리즈 대한 나의 인상을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것은 김정명이 미술을 보는 눈이다. 이것이 김정명 예술의 키워드가 될 터인데,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문화의 박물지(博物誌)’적 관심이다. 김정명에게서는 오랜 독서와 사색을 통해 형성된 특유의 촉수 같은 것이 느껴진다. 거기에 예술가적 직관과 상상력이 덧붙여져 마치 ‘9. 11 테러’를 예견한 듯한 작품을 낳았다. 하단부에 빌딩들이 묘사된 공룡의 꼬리 상층부에 비행기가 날아와 꽂히는 장면을 묘사한 <공룡 깜짝 놀라다 64x53x148cm, F.R.P에 채색, 1993)가 그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놀라운 환치(換置)는 김정명 작업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기민한 상상력은 동서양 문명을 가로 지르는 작업을 오랫동안 추동시켰고, 그 결과가 집대성된 대작이 바로 <머리> 시리즈(2001- )인 것이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건축물, 쓰레기, 브랜드, 만화, 상(賞), 성(性), 신앙, 별자리, 책, 손가락, 포켓, 십이지(十二支) 등 12개 범주로 설정해 이를 인간의 머리에 상징적으로 각인시킨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거기에는 김정명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바라보는 고유의 시선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통렬한 풍자와 함께 그것들의 영속적 가치를 회의하는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즉, 선사시대로 대변되는 근대 이전(pre-modern)에서 근대(modern)를 거쳐 근대 후기(post-modern)에 이르러 다시 근대 이전을 회고하는 원환적 순환 시스템이 작품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바라보는 지점이 바로 ‘포스트 모던’이라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즉, ‘세상은 돌고 돈다’는 주역의 원리가 압축돼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그의 ‘12 간지(干支)’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동서양을 관류하는 주요 인물과 다양한 사물의 만남은 이 같은 포스트 모던적 사고의 소치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머리에서 창안된 인류의 소산이 다시 머리로 돌아간다는 회귀의식이 깔려 있다. 인간의 두되는 창조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반성의 주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의 상징이자 문화의 박물관이요, 문명의 잡화상과도 같은 이 <머리> 시리즈에는 김정명의 문명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그는 말한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인간의 삶은 끝없는 오류이고 실수다.” 따라서 현대의 문화와 문명을 바라보는 그의 반성적 회의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언(傳言)된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되는 김정명의 <머리> 시리즈는 2001년에 발표한 브론즈 작업의 원형에 채색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먼저 것에 비해 훨씬 선명하며 사실적이다. 김정명은 작업 초기부터 회화와 조각 작업을 병행해 왔다. 그의 묘사력은 직업적인 화가에 못지않게 탁월하다. 그는 하나의 화면에 동서양의 고전 명화나 유명 인사들을 배치하여 그려 넣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 왔다. 이번 전시에도 이 작품들 중의 일부가 출품된다. 동서양을 통틀어 옛 인물과 오늘의 인물들을 시공을 초월하여 한 자리에 만나게 하는 특유의 시각은 이제 1천여 점에 이르는 캔 작품에 집대성되고 있다. 

 이번 초대전에는 <머리> 시리즈 외에도 <말 풍선> 시리즈가 다수 출품된다. 팝아트적인 성격을 지닌 이 <말 풍선> 시리즈는 <머리> 시리즈가 예의 콜라주 기법을 통한 ‘채움’의 전략인 것과 달리, 철저히 ‘비움’의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말이 소거된 ‘말 풍선’, 이 선명한 대위법이 과연 관객들에게 어떤 전언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