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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미술의 허브, 상파울루비엔날레

윤진섭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허브, 상파울루비엔날레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상파울루. 인구가 2천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도시다. 거기서 2년마다 비엔날레가 열린다. 라틴아메리카 권에는 1984년에 창설된 쿠바의 아바나비엔날레와 1973년에 칠레의 발파라이소 시가 창설한 발파라이소비엔날레가 있는데, 규모 면에서 볼 때 이 둘은 상파울루비엔날레에 필적할 바가 못 된다. 2001년에 창설 50주년을 맞이한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브라질 발견 500주년과 비엔날레 창설 50주년에 맞춰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했으나,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1년을 늦춰 2002년에 제50회 행사를 개최하였다. 나는 이 행사에 사진작가 김아타 씨를 선정, 커미셔너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내가 다시 상파울루 시를 방문한 것은 작년 10월이었다. 제41차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5년 만에 다시 본 상파울루 시는 외형은 별로 변한 것이 없어보였으나 남미인 특유의 정열적인 기질 탓인지 도시는 매우 활기차 보였다. 단, 치안이 불안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 주변에 삼성, LG, 기아자동차 등 한국기업을 알리는 대형 광고판이 즐비하게 늘어선 광경이었다. 

 상파울루비엔날레는 비단 브라질 국민뿐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미술인 모두가 자긍심을 갖는 남미 미술의 ‘허브’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현대미술에 관한 담론의 생산기지일 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 미술에 대응하는 전략적 요충이기도 하다. 그 주된 이유는 언어와 종교 그리고 역사에 있다. 멕시코를 포함한 카리브 해 연안의 중미와 베네수엘라에서 시작하여 브라질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긴 대륙에 산재한 남미 제국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라틴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 주민들이 카톨릭을 믿어 언어와 종교, 풍습 면에서 유사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삼바 축제와 탱고, 축구로 대변되는 정열적인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특질은 라틴아메리카 제국을 하나로 묶는 동인이다.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사실도 공통점이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 나라들은 대부분 19세기 초에 독립을 했다. 

 원주민들을 정북하고 나라를 세우는 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인들은 현저한 문화적 정체성의 혼미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중남미 국가들은 인종학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혼성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혼혈과 이민은 중남미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다. 왜 그런가? 이는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자명해진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의 군주들은 새로운 통상로를 개척해야할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느꼈는데, 이는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의 선장 카브랄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를 좇아 인도로 향했으나 정작 도착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반면,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제국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사벨라 여왕의 재정적 후원 하에 컬럼버스가 1492년 산 살바도르에 상륙한 이후, 스페인 인들은 신대륙 정복에 더욱 열을 올려 1519년에 코스테스가 멕시코의 아즈테크 족을 멸하였으며, 1533년에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정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사이에 피 튀기는 싸움이 있었던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주제가 중남미 제국 특유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점도 다른 문화권의 비엔날레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식인풍습이다. 

 1998년, 제24회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맡은 파울로 헤르켄호르프는 ‘식인풍습과 역사의 핵으로서의 카니발리즘(Antropofagia and Histories of Cannibalism of the Nucleo Historico)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는 역사적 전통 속에서 브라질 원주민들이 행했던 피와 살의 의식을 오늘의 국제 정세에 대입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던 것이다. 

 제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인육을 먹는 풍습은 공동체 사회의 안녕을 기원하고 더렵혀진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문화적 기제다. 그것은 봉헌의식에서 기인한다. 헤르켄호르프는 브라질 원주민들이 지녔던 이 식인풍습을 빌려 오늘의 국제정세에 대입하고자 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동,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각 권역을 대표하는 큐레이터들에게 이 식인풍습을 과제로 제시, 세계 문화의 새로운 지도 작성을 의뢰하였다. 유럽인의 방식에 익숙한 ‘메르카토식’ 지도작성법이 아닌, 큐레이터 각자가 속해있는 문화적 배경을 토대로 고유의 시선으로 길(Roteiros)을 찾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독특한 해석이 나왔다. 태국의 미술사가인 아피난 포샤난다의 경우, 카니발리즘을 후기식민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카니발에서 인육을 먹는 풍습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금융기관이 아시아의 통화에 가하는 공략이나 약탈에 비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해석은 ‘먹는다(to eat)’는 행위에 주목한 것으로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미국의 막강한 금융자본이 행하는 무차별적 탐식이 지닌 가학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내가 커미셔너로 참여했던 2002년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맡았던 알퐁스 후그 역시 헤르켄호프의 관점을 이어 중남미의 정치, 문화적 현실에 주목을 했다. 그 역시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 대해 견제구를 던졌던 것. 그는 비유럽권의 문화에 기획의 초점을 맞춰 남반구와 북반구의 정치, 경제가 분리, 심화되는 현실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즉 그의 관점은 예술가들이 두 개의 반구(hemispheres)를 묶는 본드의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상파울루시의 인구는 유럽인, 아프리카인, 인디언, 아시아인들로 구성돼 있는데, 이러한 현실은 도시를 다문화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알퐁스 후그가 상파울루비엔날레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남남의 통로(South-South Track)의 개척이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비유럽권 문화들을 엮는 가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작가들이 이전의 비엔날레보다 더 많이 초대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헤르켄호프와 알퐁스 후그 두 사람 모두 유럽과 미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견제구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의 나라들이 유럽연합을 결성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 역시 그들 모두에 맞서 견제구를 던져야 할 것이 아닌가. 문화가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선의의 의미에서 그러한 전쟁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정치를 포함하여 문화를 해석하는 독자적인 시선을 갖추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제국이나 라틴아메리카 제국이나 다같이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에서 공동운명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가 근본적으로 이질 문화를 수용한 반면, 라틴아메리카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요약되는 유럽에 문화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라틴아메리카는 후대에 와서 다시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시아의 입장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이야 어떻든 간에 현실은 현실이다. 비엔날레로 대변되는 소리 없는 문화의 각축전, 쏟아지는 말의 성찬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할지, 곧 다가올 아시아 지역 비엔날레들의 개막을 앞두고 깊이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본문 중 일부는 필자의 기발표 논문 ‘상파울루비엔날레에 관한 소고’를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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